429화. 왕이 향했던 곳으로
디안이 사라지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멍한 얼굴로 언덕 아래 도시를 바라봤다.
드문드문 켜진 조명을 제외하곤 적막 그 자체인 도시.
찰싹.
뺨을 가볍게 한 대 후려쳤다.
의미 없는 도시 구경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게 다 뭔 일이냐.”
디안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공명까지 하며 어느 정도 상황이 파악되긴 했지만 이것만으론 한참 부족했다.
대체 진시황은 어떤 미래를 본 걸까?
어떤 미래길래 수백 년 뒤에나 태어나는 내가 등장한 걸까?
의문이 끊이지 않고 머리를 가득 채웠다.
일단 좀 걷자.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각하는데는 걷기가 최고였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고개를 휙휙 흔들었다.
“생각 멈춰!”
까딱 잘못했다간 방금처럼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다시 멍 때리게 될 것 같았다.
지금 아무리 생각해봤자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했다.
생각만으로 의문을 풀기에는 주어진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진시황을 직접 만나지 않는 한은 무의미한 짓이었다.
“후우!”
크게 숨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집중해야 할 건 하나뿐이었다.
내 무기고에 넣을 수 있는 무기가 존재한다는 것.
지금까지와 형태는 다르지만 디안이 보랏빛을 뿜어내며 증명된 부분이었다.
“무기를 찾는다.”
주어진 상황은 복잡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이제까지 해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공명에서 본 흔적을 따라가면 되었다.
오랜만에 또 들어가야겠구만.
내려가며 콧등을 찌푸렸다.
심심치 않게 들어가긴 했지만 데몬의 세계는 가능하다면 피하고 싶은 장소였다.
드글대는 데몬부터 텁텁한 공기까지 어느 것 하나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시황이 두 발로 들어가는 걸 본 이상 나도 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언덕을 내려와 아시나 일행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사라를 데리고 있는 세 사람이 지원을 기다릴 거라 말한 장소.
당장 데몬의 세계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갈 순 없었다.
“백운 님…!”
도시 구석을 향해 얼마나 걸어갔을까.
날 발견한 아시나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낮에 왔던 오래된 식당의 근처.
싸이비 신도가 아니란 확신이 드는 할아버지의 식당이 세 사람이 선택한 은신처였다.
“상처는 좀 괜찮아요?”
아시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릭신과 라샤드도 괜찮아요. 여기에 도착하니 할아버지가 치료를 더 해주셨거든요.”
“자네는 멀쩡하군.”
가게 문이 열리더니 할아버지가 모습을 나타냈다.
머리가 여기저기 뻗친 걸 보니 자다가 갑자기 깨어난 모양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생각나는 곳이 이곳밖에 없었어요.”
“허허 괜찮아.”
아시나의 사과에 밝게 웃어 보인 할아버지가 바지 주머니에서 두툼한 지폐 뭉치를 꺼냈다.
“요즘 하도 장사가 안돼서 몇 달 동안 팔아도 못 벌 돈이라네. 받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아이는 잠들었어. 한참을 운 건지 많이 지쳐있더군.”
“네 피곤할 거예요. 하루종일 뛰어다닌 것도 모자라 안 좋은 경험까지 했으니까요. 아 참, 백운 님.”
고개를 돌린 아시나가 사라의 부모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두 사람의 다리를 감싸고 있던 검은색 그림자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아 그거요.”
대략적으로 관 속에서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크게 입을 벌려가는 아시나와 할아버지.
“데, 데몬이라고요…?!”
“네. 그들이 모시던 비샤카 신의 정체였어요.”
할아버지도 말세라며 혀를 끌끌 찼다.
엄한 걸 모시고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데몬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쨌든 그 데몬이 죽어서 사라진 걸 거예요. 운이 좋아서 두 사람은 발목이 안 날아가고 끝났네요.”
이건 약간 유감이었다.
내가 박살내 놓긴 했어도 뭔가 2% 부족한 느낌.
“지원은 오늘 저녁 전에 도착할 거 같아요. 상황을 설명했더니 곧장 헌터랑 조사팀을 보내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말인데요. 백운 님과 관련된 건…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아시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사라의 집에서부터 세 사람이 궁금증을 꾹꾹 누르고 있는 게 보였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7급 헌터 세 명을 제압한 인간들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는지 말이다.
“저요? 음… 그냥 지나가던 김 아무개 정도면 좋을 거 같긴 해요.”
“우연히 지나가던 모험가 정도면 되겠네요.”
“바로 그겁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아시나도 미소를 그렸다.
여전히 내 정체가 궁금하긴 하지만 더 묻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아마 내일 낮이 되면 난리 날 거예요. 언덕 위 사원에서 죽은 사람이 꽤 많거든요.”
“안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나와봤었다네. 쾅쾅 소리와 건물이 무너진 건 둘째 치더라도 예고도 없이 엄청난 빛이 뿜어졌으니까. 나도 처음이었네. 태어난 이래로 그렇게 찬란한 빛을 본 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원이 높은 언덕에 위치했다 보니 생카트나의 빛이 비샤카파트남 전체로 뿌려졌던 모양이다.
“아 할아버지. 혹시 음식 좀 살 수 있을까요? 비상식량 느낌으로 좀 두고두고 먹어야 할 거 같은데.”
“파는 건 아니지만 쟁여 놓은 것들이 좀 있네. 카레랑 탄두리 치킨에 쓰이는 것들도 꽤 많이 가지고 있고.”
말을 마친 할아버지가 가게 안에서 큰 보따리 몇 개를 들고 나왔다.
단 걸 좋아하시는지 봉지에 든 초코바도 몇 개 보였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나.”
빈 보따리 하나를 들고 그곳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 넣었다.
처음 보는 인도 라면 몇 개와 냄비, 부르스타도 챙겼다.
“호, 혹시 도피 생활이라도 하는 건가?”
할아버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옆에 앉아서 바라보던 아시나도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나 한국에서 도주한 국제 범죄잔가 하는 얼굴이었다.
“나쁜 사람은 아니고요. 어디 갈 데가 있어서요.”
든든하게 챙긴 보따리를 등으로 돌려 맸다.
“돈은….”
“돈은 됐어.”
“넵?”
날 바라보던 할아버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데몬에게 사람을 갖다 바치던 놈들을 없애주지 않았는가. 그대로 놔뒀다면 도시에 큰 위험이 됐을 걸세. 그런 놈들을 잡아 준 사람에게 어찌 돈을 받을 수 있겠나. 그리고 돈은 이거면 충분하네.”
할아버지가 들고 있던 돈다발을 재차 흔들어 보였다.
다시 봐도 두툼한 녀석이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럼 또 봬요. 아시나 님도 돌아가서 치료 잘 받으시고요. 다른 두 분이랑 사라한테도 인사 전해주세요.”
인사를 건네며 손을 흔들었다.
“어… 네! 백운 님도 조심하세요!”
“벌써 가는 겐가? 또 보자고.”
갈 줄 몰랐는지 얼떨결에 일어나며 손을 흔드는 두 사람.
슬며시 웃어 보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고 언덕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이상 더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공명 속에서 봤던 진시황이 균열로 들어갔던 사원이자 조금 전 셀베스가 튀어나왔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고요한 적막이 깔린 데몬의 세계 어딘가.
어둠이 가득한 공간에 앉아있던 데몬이 몸을 일으켰다.
다부진 근육을 가진 데몬은 인간과 다를 것 없는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창백한 회색 피부와 무미건조한 회색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크르르…!”
조용히 하늘을 응시하던 데몬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셀 수 없이 많은 데몬 무리가 서 있었다.
크기와 생김새가 가지각색인 데몬 부대.
그 중 맨 앞에 있던 거대한 덩치의 데몬이 입을 열었다.
“길을 비켜라… 칼린.”
전체적으로 회색을 띤 데몬의 이름은 칼린.
칼린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말을 건 데몬을 바라봤다.
“의미 없는 죽음이란 걸 알고 있을 텐데.”
칼린의 한 마디에 데몬 부대가 분노한 듯 울부짖기 시작했다.
“건방진…! 이 숫자를 보고도 그딴 말을 하는 거냐!?”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강한지가 중요한 거지.”
“입 닥쳐라! 불사라 불린다고 정말 죽지 않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물러나지 않을 걸 알아서일까.
눈을 찌푸린 칼린이 몸을 돌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손을 뻗어 검 한 자루를 집었다.
칼린과 데몬들이 서 있는 곳은 그런 장소였다.
손을 뻗으면 곧장 검에 손이 닿을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검이 꽂힌 장소.
“무모하구나. 검의 무덤에서 나와 싸우려 하다니.”
그곳은 검의 무덤이라 불렸다.
칼린이 머무르는 곳이자 그 누구에게도 패배한 적 없는, 칼린을 가장 강하게 만들어 주는 공간이었다.
“그 오만함을 박살내고자 이곳으로 온 거다! 아직도 네놈들이 신의 사도라고 생각하는 거냐! 네놈도 느꼈을 텐데?! 셀베스가 죽었다는 걸!”
칼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데몬 무리가 나타나기 전 칼린도 셀베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의도와 마음가짐은 다를지언정 오랫동안 같은 신을 모시던 이의 죽음.
친구와 동료 같은 낯간지러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당황하던 참이었다.
“셀베스도 죽지 않는 존재로 이름을 떨쳤었다! 하지만 죽었지! 넌 다를 거라 생각하면 오만이다!”
울부짖은 데몬이 칼린에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뒤에 늘어서 있던 무리도 일제히 칼린을 향해 솟구쳤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온 데몬들이 칼린을 향해 이빨을 내밀었다.
닿는 모든걸 꿰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이빨이었다.
“몸이 굳기라도 한 거냐!”
칼린이 조용히 날아드는 이빨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데몬들의 이빨이 칼린의 몸을 꿰뚫었다.
“…!!”
정확히는 꿰뚫으려고 했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뚫어냈다 생각했고 말이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결과는 정반대였다.
카가가각!!
칼린이 입고 있는 건 검은색 천 바지뿐이었다.
상의엔 갑옷은커녕 옷이라고 할만한 것조차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빨은 칼린의 몸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뭐… 뭐냐!!”
당황한 데몬들이 다시 한번 공격을 퍼부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수백 수천의 공격.
시야가 완전히 가려질 정도로 정신없이 쏟아졌지만 그럼에도 칼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쏟아지는 공격따윈 자신에게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럴 리가…!!”
무리의 앞에 있던 데몬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칼린은 처음에 서 있던 위치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짧은 회색 머리를 흩날리며 조용히 데몬들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약하구나.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낮게 읊조린 칼린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들고 있던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자, 잠깐…?”
데몬이 잠깐이라고 외쳤을 때.
이미 칼린은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어… 어디로?”
칼린을 찾기 위해 데몬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자신을 따라왔던 수백 마리의 데몬 부대.
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검에 베여 피를 흩뿌리는 중이었고, 그 사이로 검을 든 칼린의 뒷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검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 런….’
데몬의 머리로 오래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바람을 타고 데몬의 세계를 떠돌던 이야기.
- 검의 무덤엔 죽지 않는 검귀가 산다.
언제 베인 걸까.
데몬의 목 언저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눈앞으로 흩뿌려지는 피를 바라보며.
‘불사의 검귀….’
데몬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칼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