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개전
오래전, 정령 실리카의 도시.
아직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도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분주한 상태였다.
“이쪽으로 옮기자고! 여기도 조금 더 파고!”
“여기도 모래가 더 필요해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도시엔 적막과 흐느낌만이 존재했었다.
저주에 걸린 현실을 비관하며 모두가 죽음만을 기다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분주히 움직이는 정령들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두가 밝은 얼굴로 바쁘게 움직이며 새로운 보금자리인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진시황! 우리의 도시가 완성되는 중이야! 내 집은 제일 높은 곳에 지을 거야. 돌멩이 더 멀리 던지기에서 내가 일등했거든!”
“잘 만들고 있는 건가? 영 믿음직스럽지가 않구나.”
“걱정하지 말래도. 진시황이 말한 대로 잘 하고 있다고 다들.”
토라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하며 진시황을 올려다봤다.
처음 진시황이 나타났을 땐 온몸이 굳었었다.
자신들을 구해줬지만 몸에서 풍기는 압도감이 엄청났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눈까지 검은 안대로 가리고 있어 무섭기도 했었다.
‘모두 진시황 덕분이야.’
토라가 미소를 머금었다.
진시황은 뭐랄까, 신비로운 존재였다.
실리카의 사정을 들은 진시황은 함께 슬퍼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가 라고 간단히 혼잣말했을 뿐이었다.
- 그럼 도시를 만들어야겠구나.
그다음에 진시황이 한 말이었다.
새로운 곳에 터전을 잡았으니 이전보다 더 멋진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무슨 소리를 하나 했었는데.’
토라를 포함한 실리카들은 벙찐 얼굴로 진시황을 바라봤었다.
지금 저주에 걸려 다 죽어가는 판에 도시가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언제부턴가 실리카는 진시황의 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진시황의 말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 이건 조각이란 거다.
도시 건설뿐만이 아니었다.
도시가 어느 정도 완성되자 진시황은 실리카에게 새로운 것들을 이것저것 알려주었다.
하나를 익숙하게 할 때쯤엔 또 새로운 걸 알려주는 방식으로 쉴 새 없이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로 변화가 찾아왔다.
웃지 않던 정령들이 웃기 시작했다.
전처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는 정령은 더 이상 없었다.
저마다 여러 일을 하며 하루를 바쁘게 보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제 때가 됐다.”
뜬금없는 말에 토라가 진시황을 바라봤다.
“토라. 모두를 모아라.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니까.”
마지막이란 말이 마음에 남았지만 토라는 되묻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흩어져 있는 실리카를 모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이 마지막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든 그걸 막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모였어.”
토라가 말하자 진시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 이곳을 떠날 거다.”
많은 정령이 입을 벌렸지만 왜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진시황은 언젠가 떠날 거라는 걸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제부터 하늘섬으로 갈 거다. 너희들에게 저주를 건 자가 있는 곳이지.”
“안돼!”
잠자코 있던 토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맞아! 가면 죽고 말거야!”
“거기엔 있는 존재들은 너무 강해!”
주변에서도 소란이 일어났다.
어린 실리카 몇 명은 가면 안 된다며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알고 있다.”
“…?”
진시황의 한 마디에 정적이 찾아왔다.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가는 거야…?”
“그럴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을 걸 알면서도 가야 하는 때가 말이다.”
무언가 더 말하려는 토라와 실리카들에 진시황이 손을 들었다.
“이런 걸 말하려고 너희를 모은 건 아니다. 알려줄 게 있어서다.”
“알려줄 거?”
고개를 끄덕인 진시황이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너희의 저주는 풀릴 거다. 애초에 절대적인 존재가 건 것도, 불사의 힘을 가진 영원한 저주도 아니니까.”
정령들의 눈이 커졌다.
만약 말한 게 진시황이 아니었다면 모두가 귀담아듣지 않았을 말이었다.
그만큼 정령들은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저주가 풀리는 걸 말이다.
그저 이 상태로 즐겁게 웃으며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하지만 당장은 아닐 거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겠지.”
“진시황 네가 풀어 주는 거야?”
“그것도 아니다. 난 그럴만한 힘이 없으니까. 다만 너희의 저주가 풀리는 건 확실하다. 무조건이지.”
정령들의 입이 벌어졌다.
평소 정령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목소리보다도 더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토라와 정령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진시황은 실리카에게 기약 없는 희망이나 주자고 말을 지어내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내 기나긴 여정에 종지부를 찍어 줄 사람이 올 거다. 그가 오면 너희의 저주도 풀릴 거고. 그러니까.”
한숨을 내쉰 진시황이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기다려라.”
“…!!”
정말이지 짤막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 한 마디가 정령들에게 준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다.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해준 말.
그 말은 정령들이 오랫동안 잊고 살던 무언가를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었다.
정령들을 한 번 쭉 훑은 진시황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런 진시황에 토라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고개를 돌린 진시황에 토라가 숨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우리의 도시가 지어지면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 그리고 그 이름을 진시황이 정해줬으면 좋겠어.”
다른 정령도 토라 옆으로 다가와 진시황을 올려다봤다.
“… 차후아.”
잠시 생각하던 진시황이 오묘한 이름을 남기고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점점 멀어져 갔다.
남은 정령들이 조용히 차후아란 이름을 되뇌며 미소를 지었다.
의미는 알 수 없지만 마음에서 왠지 모를 뜨거운 게 올라오는 이름이었다.
잠시 후 정령들 쪽으로 몸을 돌린 토라가 입을 열었다.
“도시의 이름은 차후아! 진시황이 마지막에 말한 대로 이곳에서.”
토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기다리자!”
* * *
이야기를 마친 토라에 다시 한번 도시 차후아를 둘러보았다.
데몬의 세계에서 진시황이 정령 실리카를 위해 짓게 한 도시였다.
처음에 봤을 땐 정령의 도시라니 신기하다가 감상의 전부였는데.
듣고 보니 감회가 남다른 기분이었다.
“우린 진시황이 심어준 희망으로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어.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진시황이 해줬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진시황은 다시 돌아오지 않은 거지?”
토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섬 쪽에서 며칠 동안 큰 소란이 있었어. 아마 진시황이 무언가를 한 거라고 생각해. 우린…. 직접 가보지 못했었고.”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지 풀이 죽는 토라와 부엉이 정령들.
못 가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밖엔 데몬들이 득실대고 있었을 테니까.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야기를 듣고도 대체 진시황이 무슨 미래를 본 건지는 여전히 미지수였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해진 게 있다면 진시황은 하늘섬으로 갔다는 것.
내가 이 세계로 넘어와 정한 목적지를 변경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토토. 넌 왜 낮마다 거기에 있었던 거야? 데몬은 밤에만 나오겠지만 위험하잖아.”
토라의 옆에서 빼꼼 나와 있는 토토.
잠시 망설이던 토토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시황이 말했다는 누군가가 나타날까 봐 기다렸었어. 하지만….”
토토가 말끝을 흐리고.
잠자코 듣고 있던 토라가 말을 이었다.
“너무 강력했지. 지금까지 지켜봐 온 하늘섬의 존재들은.”
“맞아…. 절대 이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었어. 우릴 죽이는 막강한 짐승들도 하늘섬 근처에도 못 갔으니까.”
정령들은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론 오랜 시간이 흘러 마음이 꺾여 가는 중이었다.
토토가 날 만났을 때 진시황이 말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도 이것이었다.
토토는 단순히 내가 데몬에게 공격당할까 봐 이곳으로 데려왔었다.
“좋아. 정했다.”
잠시 생각하다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마침 하나둘씩 꺼내먹던 초코바가 떨어진 참이었다.
“지금 출발한다.”
“뭐? 어디로?”
“어디긴 하늘섬이지.”
무언가 말하려는 토토를 대신해 토라가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건 죽음뿐이야. 무모해. 하지만.
토라가 묘한 미소를 그렸다.
“자넨 가겠군. 우리가 아무리 위험하다고 뜯어말리더라도.”
“정답입니다. 솔직히 제가 진시황이 말한 사람이라곤 말씀드리기가 힘들어요. 왜냐면 저도 모르겠거든요. 그럼에도 가야 해요. 제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고요.”
“그런가.”
“그리고 만약에 하늘섬에 있는 놈이 죽어야 저주가 풀리는 거라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풀릴 테니까.”
“…!”
놀라는 정령들을 뒤로 하고 배낭을 등에 멨다.
손을 흔들며 출구로 걸음을 옮기기 전.
여전히 걱정 가득한 토토에게 입을 열었다.
“토토. 하늘섬 쪽에서 큰소리가 나면 잘 보고 있어.”
의아해하는 토토에 입꼬리를 올리며 엄지를 거꾸로 세워 보였다.
“하늘에 있던 오만한 놈이 추락하는 걸 보여 줄 테니까.”
* * *
차후아를 나와 얼마나 걸었을까.
해가 저물어서인지 시도 때도 없이 데몬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크… 크륵…!”
그중에 어눌하지만 말을 할 줄 아는 녀석을 만난 건 처음이었다.
놈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너네 낮엔 어디에 처박혀 있다가 밤에만 기어 나오는 거야? 햇살 알러지라도 있냐?”
“하, 하늘섬의 명령이다. 낮엔 신이 섬 아래를 내려다볼 수도 있으니까.”
“허어.”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데몬이라도 절대적인 강자 앞에선 무릎 꿇기도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혹시나 불똥이 튈까 이 정도로 벌벌 떠는 건 또 처음이었다.
“뷁도 없는 새끼들이네.”
우둑!
데몬의 목을 꺾어버리고 하늘섬 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계속 때려죽이고 있다 보니 이놈들 때문에 못 나오던 정령들이 떠올랐다.
정령들은 혹시나 소리가 새어 나갈까 도시 안에 있을 때조차 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역시 하는 김에 대청소가 낫겠지.”
가는 길에 보이는 봉우리로 몸을 날렸다.
하늘섬보단 낮지만 어느 곳에서 봐도 눈에 잘 띄는 곳이었다.
[잔다르크 - 생카트나]
생카트나를 꺼내 봉우리의 중심에 꽂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찬란한 황금빛이 퍼져 나갔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예상했던 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져 있던 데몬들이 말이다.
“바글바글하구만.”
많이 굶주린 모양이었다.
모이기 무섭게 봉우리를 타고 올라오는 엄청난 수의 데몬.
놈들을 바라보다 하늘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방진 신 새끼야. 부디 보고 있길 바란다.”
[라 - 불꽃의 문양]
몸에서 불꽃을 터뜨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전쟁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