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불사의 검
스아아아악!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칼린의 검.
날 지나치고도 한참 더 가서 멈춘 칼린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축 처진 눈매에 음울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내 검을 피한 건.”
평소라면 허세 부리지 말라고 비웃어 줬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에 솔직히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확신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저놈이 셀베스가 말했던 불사의 검이었다.
“무기는 들지 않는 건가?”
“걱정할 필요 없어. 이제 들 참이었으니까.”
[유탈라스 - 동기화]
[전신 갑주]
몸 전체로 비늘을 둘러냈다.
칼린이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진지는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검술이 뛰어나다는 것.
일단은 베일 리 없는 비늘을 두르고 더 살펴볼 생각이었다.
“신기한 기운의 갑옷이구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한번 칼린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가볍게 발을 움직였을 뿐인데도 이런 속도에 이동 거리라니.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몸인지 궁금해지고 있었다.
콰앙!!
날아오는 검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대로 부딪히며 울려 퍼지는 엄청난 굉음.
칼린이 들고 있던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칼린의 옆구리로 주먹을 뻗었다.
검을 휘두르느라 자세가 무너져서인지 칼린은 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쩌어어엉!
“…!”
분명히 주먹은 닿았다.
동시에 타격음도 들렸고 말이다.
하지만 칼린에게 대미지는 없었다.
주먹 너머로 느껴졌던 단단한 감각.
최대한도로 압축된 강철을 때리는 기분이었다.
“뭐냐 너.”
“그런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
물러서며 거리를 벌린 칼린이 새로운 검을 집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자세를 잡은 칼린이 내게 쏘아졌다.
쾅! 쾅! 쾅!
이후에도 내 주먹은 칼린에게 명중했지만 대미지는 없었다.
칼린의 검도 마찬가지였다.
비늘에 닿을 때마다 부서지며 새로운 검으로 대체되고 있었다.
“내 공격도 통하지 않는구나.”
칼린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무덤덤하게 말하며 다음 검을 집어 다시 공격해올 뿐이었다.
다가온 칼린의 공격을 막아내며 다음 무기를 떠올렸다.
만약 칼린의 몸이 철로 되어있다면 무엇으로 뚫어낼 수 있을까.
일단 뭉개볼까.
다시 한번 칼린을 쳐내고 비늘을 거둬들였다.
[아이작 뉴턴 - 데모닉]
당장 확신이 서서 꺼낸 건 아니었다.
강철이라 단단하다는 것 외에도 칼린에겐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라비티 디바이스]
중력으로 칼린을 찍어 눌렀다.
다시 한번 쏘아지려다 그대로 땅에 처박히는 칼린.
드드드드드…!
최대의 중력을 칼린에게 집중했다.
지반이 부서지며 꽂혀 있던 검들이 바스러졌다.
하.
여전히 중력은 강해지고 있었지만 알 것 같았다.
중력으론 칼린을 잡을 수 없었다.
칼린을 공격하며 느꼈던 정체불명의 감각.
중력으로 누르며 전해지는 감각에 어느 정도 느낌이 왔다.
칼린은 단순히 단단해서 대미지를 안 받는 게 아니었다.
뭔지 모를 힘이 칼린에게 적용되는 공격 자체를 무효화하고 있었다.
“쯧.”
혀를 차며 데모닉을 해제했다.
아직 중력은 더 쏟아낼 수 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어째서 멈추는 거지?”
파묻혔던 칼린이 부서진 지면을 해치며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멀쩡한 모습이었다.
“안 통하는 거 같아서.”
천천히 칼린의 몸을 살폈다.
강한 파워를 가진 유탈라스와 중력마저 무효화 해버리는 괴물 같은 몸.
그런 힘을 가진 것치곤 녀석의 몸은 흉터 투성이었다.
… 설마.
그리고 그 흉터들은 모두 무언가에 베인 듯한 자상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칼린을 응시했다.
“너 검에만 상처를 입는구나.”
“… 정답이다.”
대답과 동시에 거리를 좁힌 칼린에 옆에 있던 검 한 자루를 집어 휘둘렀다.
콰앙!
맞부딪힌 검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렇게 서로 마주하게 된 순간 칼린이 말을 이었다.
“그걸 알게 되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다. 네 검은 내게 닿지 않는다.”
“그래?”
[이카로스 - 칼데아 윙]
힘은 내가 우위지만 스피드는 아래인 상황.
스피드를 맞춰주기 위해 날개를 꺼냈다.
“진짜 그럴지 한 번 해보자고.”
[사사키 코지로 - 스이카]
들고 있던 검으로 칼린을 밀어내며 스이카로 손을 올렸다.
끼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원을 그리며 뿜어지는 백색 검기.
맞붙고 처음으로 칼린이 움찔하며 고개를 틀었다.
짧은 정적이 한차례 지나가고.
칼린의 왼쪽 뺨으로 얇은 줄기의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피를 닦아낸 칼린이 조용히 손을 내려다봤다.
“이것 또한 오랜만이구나.”
“안 닿는다더니 벌써 닿아버렸네.”
칼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널 얕봤다는 걸 인정한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본 검 중에 가장 빠르다는 것도 인정하마. 그러니 이제부터.”
말을 마친 칼린이 빈손으로 칼 한 자루를 더 집었다.
양손에 든 칼을 교차하며 자세를 숙이는 칼린.
“최선을 다하마.”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몸에서 날카로운 살기를 뿜으며 칼린이 날아들었다.
콰앙!!
* * *
검을 주고받은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리고 몇 번의 합을 주고받았을까.
조금 전까지는 어렴풋이 가늠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걸 세고 있을 수도, 다음에 무얼 할지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눈앞으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칼린의 검.
단순히 빠르고 무겁기만 한 게 아니었다.
왼쪽이다 싶으면 오른쪽에서, 아래다 싶으면 위에서 검이 날아들었기에.
지금은 그저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피부로 느껴지는 살기, 눈으로 보이는 궤적을 보며 반사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스가악!
그래야만 간신히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검이었다.
콰앙!
칼린이 보인 틈에 들고 있던 검을 가로로 그어냈다.
그 검을 피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칼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왼손으로 스이카를 뿌려냈다.
서걱!
칼린의 가슴팍에서 피가 흩뿌려졌다.
얕다.
긴장을 풀지 않고 스이카를 도로 집어넣으며 오른손으로 새로운 검을 집어냈다.
예상했던 대로 칼린은 뿌려진 피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이미 내 앞에 도달해 있었다.
스팟.
칼린의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내 몸에도 상처가 쌓여 갔다.
당장 깊은 상처는 없지만 여기저기에 자상이 생기며 몸이 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드드드득!
다시 한번 얼굴을 마주하자 칼린이 입을 열었다.
“왜 날개는 사용하지 않는 거냐? 그걸로도 내 검은 막을 수 있을 텐데.”
칼린의 말대로 난 날개를 이동 외엔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글쎄.”
칼린을 밀어내며 가빠진 호흡을 골랐다.
날아드는 공격 하나하나가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칼린의 검은 빠르고 강력했다.
그럼에도 난 날개로 몸을 감싸지 않았다.
나도 내가 그러는 이유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러고 싶었다.
검을 부딪힐 때마다 손을 타고 올라온 떨림이 몸으로 퍼져 나갔다.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할 땐 알 수 없는 전율이 뇌를 울렸다.
그리고 이것들은 점점 더 내 움직임과 검을 빠르고 정교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웃고 있는 건가?”
“뭐?”
칼린의 말에 눈을 내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입가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 미친 건가.
스스로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 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계속하자고.”
연기를 터뜨리며 거리를 좁혔다.
마찬가지로 칼린도 땅을 박차며 내게 달려들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검의 마찰음과 스파크가 눈과 귀를 어지럽혔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점점 선명해지고 있었다.
눈과 귀로 구분하고 있는 검의 궤적이 말이다.
스아아악!
눈으론 볼 수 없는 사각에서 검이 날아들었다.
조금 전 같았으면 늦게 반응해 상처를 피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얼굴을 최소한도로 움직여 검을 피해냈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목을 비켜 지나가는 살기 가득한 검날이 느껴졌다.
곧장 오른손에 든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푸화아악!
“…!!”
칼린의 얼굴은 더 이상 무미건조하지 않았다.
커진 눈동자로 솟구친 핏방울을 바라보는 칼린.
칼린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더 휘두르고 싶었기에.
연기를 터뜨리며 물러난 칼린에게 따라붙었다.
* * *
‘어째서지.’
칼린이 검을 휘두르며 눈앞의 백운을 응시했다.
처음 백운을 봤을 때 칼린은 확신했었다.
백운을 절대 자신을 죽일 수 없으며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눈앞에 서 있는 건 아까 처음 만났던 백운이 아니었다.
‘어째서 벨 수 없는 거냐.’
이번에 휘두른 검은 분명히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백운은 아주 찰나의 차이로 검을 피해내고 있었다.
검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움직임이었다.
칼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당황하고 있었다.
처음이었다.
많은 검사를 만나봤지만 이렇게까지 베지 못했던 적을 만난 것은.
‘어째서 더 멀어지는 거냐.’
몸을 죄어오는 위화감에 칼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낯선 감각이었다.
검을 부딪힐수록 자신의 검이 점점 백운에게서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반대로 멀었던 백운의 검은 점점 더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건 마치….’
사실 칼린은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백운은 싸우는 이 순간에도 계속 강해지고 있었다.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던 검술 역시 계속해서 보완되며 완벽해지는 중이었다.
‘불가능하다.’
입술을 깨문 칼린이 검에 힘을 실었다.
전투가 끝나고 싸움에 대한 피드백으로 한층 더 강해지는 건 흔히 볼 수 있는 케이스였다.
허나 이건 아니었다.
검의 휘두름 한 번 한 번에 목숨이 오가고 있었다.
찰나의 판단 미스가 목숨을 앗아 가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백운은 실시간으로 피드백을 흡수하며 강해지고 있는 것이었다.
‘불가능하단 말이다…!’
으드득.
‘검의 신이라도 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칼린이 힘을 실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
말도 안 되는 서늘함에 칼린이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고개를 든 칼린이 정면을 응시했다.
백운이 무언가를 한 건 아니었다.
‘뭐냐… 이건.’
쉴 새 없이 움직이던 백운은 어째서인지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기회였다.
당장 다가가 검을 휘둘러야 했다.
하지만 칼린은 그러지 못했다.
인지하지 못한 찰나의 순간에 뒤바뀌어버린 백운의 기운.
그 기운을 감지한 칼린의 본능이 백운에게 다가가길 거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칼린의 눈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
백운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서서히 형체를 갖춰나가는.
백색의 귀신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