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화. 백귀
“응?”
다시 한번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멈춰버린 공간에 고개를 들었다.
칼린과 검에 몰입하느라 시간이 멈췄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나는군.”
들려오는 목소리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긴 백발과 옷을 흩날리고 있는 사사키 코지로가 서 있었다.
여전히 진한 눈썹과 날카로운 콧대였다.
사사키 코지로는 특유의 장난스러운 눈동자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사키 코지로 님!”
고개를 꾸벅 숙이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빨갛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더니 즐기는 건가?”
“하하… 그런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그래도 두 번째 만났을 땐 안 그랬었잖아요. 오늘은 제 피기도 하고요.”
깊은 부상은 없어도 몸 여기저기에선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다쳐본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흐음.”
날 이리저리 뜯어보던 사사키 코지로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많이 달라졌구나.”
“넵? 몸이 좀 좋아지긴 했습니다.”
멋쩍은 얼굴로 어깨를 만지자 사사키 코지로가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한 게 아니다. 이제야 검을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한 말이다. 직접 보니 더 확실히 느껴지는구나.”
“아.”
사사키 코지로를 마지막으로 만난 건 이집트에서 아포피스를 잡으며 이동 발도를 습득했을 때였다.
척준경을 만나 제대로 검을 배운 건 그 이후의 일이었고 말이다.
역시 검을 배우기 전의 난 별로였구만.
그럼에도 사사키 코지로가 별말 없이 스이카를 건네줘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검을 누구한테 배운 건지는 알고 있다. 더할 나위 없는 스승이란 것도 알고 있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면…. 넌 거기에 멈춰있었다.”
멈춰있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더니 말을 이어가는 사사키 코지로.
“검을 배운 이후의 전투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다. 아마 한 번도 없었을 거다. 배웠던 검술을 극한으로 끌어내야 하는 적을 만난 적이.”
“아.”
사사키 코지로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랬었다.
검을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비중을 따지자면 몹시 적었다.
사용했을 때도 합을 겨루기보단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입장이었고 말이다.
척준경에게 배운 이후 이렇게까지 검을 극한까지 사용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땠지?”
눈을 감고 칼린과 이어온 전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전투하며 느꼈던 것들을 천천히 말로 옮기기 시작했다.
“좋구나.”
말이 끝나자마자 사사키 코지로가 웃음을 터뜨렸다.
짧고 간단한 한 마디였지만 뭐가 좋은지는 나도 알 것 같았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뿐인 칼린과의 전투에서 내 검이 점점 강해져 가고 있단 사실을 말이다.
“이젠 사용할 수 있겠구나.”
어느새 사사키 코지로의 손엔 어느새 스이카가 들려있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발도와 원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검에 대한 깊은 몰입과 이해가 필요하지.”
“몰입과 이해요.”
혹시나 잊어버릴까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노력할 필요는 없다. 네가 방금 싸우며 했던 것들이니까.”
스이카를 바라보던 사사키 코지로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알려주는 입장에서 이런 말하면 뭐하지만, 사실 난 지금 알려주려는 검을 온전히 사용하지 못했었다. 몸이 버텨내질 못했었거든. 기껏 사용해봐야 한두 번이고 그 이후엔 한동안 드러누웠어야 했지. 하지만 너라면 괜찮겠구나. 몸이 말도 안 되게 튼튼한 거 같으니까.”
“튼튼한 거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사사키 코지로가 내 이마로 손을 뻗었다.
이마에 닿은 사사키 코지로의 시원한 손끝.
손끝을 타고 일렁이는 하얀 기운이 내게 흘러들기 시작했다.
“내가 하얀 귀신이라 불리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검이다. 이젠 네 것이니.”
사사키 코지로의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마음껏 휘둘러보거라.”
* * *
[사사키 코지로 - 동기화]
호흡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백귀.”
스이카에서 흰색 기운이 솟아올랐다.
천천히 몸을 감싸며 올라가던 기운이 주변으로 반투명한 형체를 만들어냈다.
보자마자 귀신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생김새였다.
조용히 귀신의 검 스이카를 내려다봤다.
귀로 선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스이카가 내뿜는 호흡이 말이다.
“가만히 서서 뭘 하는 거냐.”
가만히 지켜보는가 싶던 칼린이 다시 덮쳐왔다.
날아오는 검을 조용히 바라보다 천천히 발을 굴렀다.
“싸움을 포기한…!?”
등 뒤에서 당황한 칼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린의 검이 도착한 곳에 있는 건 내가 아니었다.
나였던 것의 백색 기운.
칼린의 검에 닿은 백색 기운이 허공으로 흩어져 갔다.
[1검, 귀신 밟이]
순간이동에 가까운 초고속 이동.
칼데아를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저 스이카의 호흡에 맞춰 빠르게 움직였을 뿐이었다.
움직이는 순간 내 몸이 투명해져 칼린의 입장에선 사라진 것처럼 보였겠지만 말이다.
“무슨…!”
칼린이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둘러왔다.
나 역시 그런 칼린 방향으로 자세를 낮추며 발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빠르게 발을 내디딤과 동시에 횡으로 스이카를 휘둘렀다.
[2검, 귀신 베기]
끼아아아아아아악-----!
훨씬 더 커진 스이카의 비명과 함께 내 몸이 칼린을 스치고 지나갔다.
“…?”
잠시 머뭇거리던 칼린의 몸에서.
푸화아아악!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졌다.
콰가가가가가가!
동시에 지나온 범위에 꽂혀 있던 검들이 반으로 베여 허공을 날았다.
검의 무덤 근처에 있던 바위들도 마찬가지였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져 땅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칼린의 왼쪽 옆구리부터 어깨까지 베어낸 검.
검을 쥐고 있던 칼린의 팔 하나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커헉…!”
입에서 피를 뿜으며 날 바라보는 칼린.
칼린의 얼굴은 의구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눈을 마주치다 입을 열었다.
“싸워보니 확실히 알겠어. 네가 불사의 검이라 불린 이유.”
말도 안 되는 신체 능력과 괴물 같은 검술을 가진 데몬, 칼린.
어찌어찌 몇 번의 검을 견뎌내며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상대하는 입장에선 막막할 수밖에 없었다.
검으로 죽여야 한다는 걸 알아도 상대는 수백 수천의 검사를 베어버린 검의 괴물이었다.
그런 상대를 검으로 잡으라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불사라고 불린 것이고 말이다.
“크…!!”
칼린이 한쪽 손에 있던 검을 입으로 가져갔다.
입에 검 한 자루를 문 칼린이 남은 팔로 또 다른 검을 집었다.
이미 승부는 났지만 칼린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밖으로 나가게 내버려 뒀다간 재앙에 가까운 파괴를 불러올 녀석이었다.
가진 특성 때문에 대처 역시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놈을 살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마지막이다.
기존의 발도 자세를 취한 뒤.
검집이 지면과 수평을 이룰 때까지 몸을 깊숙이 숙였다.
오른손을 천천히 옮겨 스이카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난 불사의 검… 칼린이다. 난 절대….”
칼린이 힘겹게 말을 이으며.
마지막 검을 휘두르기 위해 땅을 박찼다.
“죽지 않는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칼린이 느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기분이었다.
“스으으.”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뱉어내며 스이카와 호흡을 맞췄다.
호흡이 완전히 일치된 후 다가오는 칼린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불사의 검 칼린. 고맙다. 네놈 덕분에 난.”
스이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또 한 계단 올라갈 수 있게 됐다.”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뽑아냈다.
[백귀 3검 - 하늘 베기]
휘둘러지는 검을 타고 검집에 쌓여 있던 검기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땅에서 하늘까지 그어지는 백색의 검기.
검기가 하늘에 닿은 순간 달려오던 칼린이 걸음을 멈췄다.
“이런….”
무미건조하던 칼린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올라가고.
“괴물 자식이….”
푸화아아아아아악!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피가 솟구치며 칼린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베어진 건 칼린 뿐만이 아니었다.
검을 휘두른 일직선 상에 있던 모든 게 갈라졌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각!!
지면은 물론이고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던 달빛과 구름까지 가르며 시야가 닿는 먼 곳까지 나아가는 귀신의 검기.
백색의 검기가 희미해질 때쯤 검로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내 몸을 감쌌던 백귀의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이게 내가 휘두를 수 있는 최대인 것 같았다.
“하아.”
몸을 덮고 있던 칼데아의 연기까지 완전히 사라진 후.
고개를 들어 담겨있던 숨을 전부 뱉어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여전히 내가 선 곳은 데몬의 세계였다.
그럼에도 코로 들어오는 건 오랜만에 마셔보는 상쾌한 공기였다.
선선한 밤바람이 불어와 땀과 피로 얼룩진 몸을 훑었다.
땀이 식으며 느껴지는 기분 좋은 시원함.
백귀를 사용해서인지 팔에서 근육통이 느껴졌지만 이마저도 기분 좋게 느껴졌다.
“좀 이상해진 건가. 싸우는 거….”
눈을 감은 채 미소를 머금었다.
“왜 이렇게 즐겁냐.”
한동안 그 감각을 즐기다 발아래를 울리는 진동에 눈을 떴다.
칼린의 시체가 재로 흩어지는가 싶더니 검의 무덤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저건가.
검의 무덤은 무언가의 결계였던 모양이다.
검의 무덤이 사라지고 조금 전까진 볼 수 없었던 계단이 나타났다.
반투명한 계단은 지상부터 하늘섬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잘됐네. 마침 칼데아도 없었는데.
수리검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
천천히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거냐.”
하늘섬에서 오만하게 앉아있을 신 자식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네놈을 지키던 불사의 검은 죽었는데.”
미소를 그리며.
“이젠 뭘로 날 막을 거냐. 신 새끼야.”
첫 번째 계단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
왕좌에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눈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커다랗게 변해있었다.
“뭐냐… 이건.”
남자의 눈이 하늘섬 아래를 향했다.
검의 무덤이 사라져 있었다.
무덤이 사라지는 조건은 단 하나.
불사의 검 칼린이 죽는 것뿐이었다.
“어떻게 된 거냐.”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셀베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주 오랜 시간 하늘섬과 자신을 지켜왔던 불사이자 무적의 검, 칼린.
정체를 알 수 없는 진시황의 힘에 길을 내준 적은 있으나 그때도 칼린은 부상이라고 할 만한 걸 입진 않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칼린은 패배할 수 없는 능력과 조건을 타고난 괴물이었다.
으득.
분명 그랬을 터인데.
그런 괴물이 죽은 것이었다.
남자가 하늘로 뻗어진 계단을 바라봤다.
“뭐가… 오고 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