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화. 하늘섬
숨도 고를 겸 천천히 걸어 올라온 계단.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디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오씨.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길 것 같은 높이였다.
내가 조금 전 발을 딛고 있었던 땅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신 새하얀 구름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여기가 하늘섬이구만.
허리를 쭉 펴며 주위를 둘러봤다.
오면서도 느꼈지만 정말 데몬의 세계라고 믿기 힘든 장소였다.
삭막함이나 황폐함 같은 건 이곳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섬에 존재하는 건 딱 하나, 화려함이었다.
섬 전체를 가득 채운 건 금과 크리스탈 등 다양한 보석이었다.
그마저도 각종 조각으로 만들어진 상태.
제일 먼저 모습을 드러낸 금 조각상으로 손을 뻗었다.
처음 보는 생김새라 무슨 종족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보고 있는 조각상들은 모두 겁에 질린 얼굴로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차후아의 부엉이 정령 실리카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실리카와는 달랐다.
이들에겐 실리카의 조각상에서 느껴졌던 온기가 없었다.
위로 좀 가볼까.
눈에 보이는 것 중 제일 높은 조각상 위로 올라섰다.
“전시회 같은 느낌이네.”
높은 곳에서 둘러본 소감이었다.
하늘섬은 아무렇게나 보석을 섞어서 만든 게 아니었다.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여러 섹터로 나뉘어 있으며 섹터별로 사용한 보석이나 표현하고자 한 대상이 달랐다.
섹터 자체는 도시나 지역별로 나눈 거 같았는데 모습이 온전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모두가 파괴되거나 무너지고 있는 형상이었다.
“이 새끼 진짜 악취미네.”
이쯤되니 얼추 알 것 같았다.
이것들은 신이라 불리는 자식의 트로피였다.
자신이 생각했을 때 가장 기쁘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다양한 모습으로 기록해둔 것이었다.
“초대한 적 없는 손님이군.”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섬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뭐 하는 녀석이길래 감히 짐의 공간을 침범하는 것이냐.”
“짐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짝퉁 가짜 새끼가.”
“뭐…?”
“너 맞잖아. 비샤카인 척 사람들 속여서 꼬신 거.”
“풉…!”
정신이 나가기라도 한 건지 녀석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기지?”
“어찌 안 웃을 수 있겠느냐. 비샤카? 그건 그저 작은 여흥일 뿐이었다. 난 수많은 세계를 지나오며 황제이자 신으로 군림했던 존재다. 그딴 신 같지도 않은 새끼의 이름이 탐나서 뺏은 줄 아느냐?”
다시 한번 주위로 늘어선 조각상을 내려다봤다.
“황제로 군림했다는 게 다 박살내고 죽이면서 다녔다는 말이지?”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면서 뭘 또 묻는 거지?”
“아니 여기 세계는 개나 소나 황제로 불러 주는구나 싶어서 물어본 거야. 네 말대로라면 나도 황제 할 수 있겠다 싶기도 하고. 내가 사는 세계에서 너 같은 건 그냥 정신 나간 살인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거든. 이 자격 없는 새끼야.”
끊임없이 말하던 녀석이 잠시 말을 멈췄다.
얼굴은 당장 안 보여서 모르겠지만 내 말이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고요한 밤이라 기분이 참 좋았는데. 지금은 짐의 기분이 아주 더럽구나.”
방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디서 굴러들어 왔는지도 모르는 벌레가 짐과 동등하다고 짖어대다니. 여기까지 올라온 노력이 가상해 찰나의 알현이라도 허락하려 했으나… 생각이 바뀌었다.”
발아래로 진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주변에 있던 조각상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합쳐지며 새로운 형태의 조각이 만들어졌다.
오래전 삼국시대 병사를 떠올리게 만드는 생김새였다.
“애써 만들어놓은 건데 나 때문에 무리하는 거 아니야?”
“헛소리.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모든 게 내가 정한 법칙을 따르지. 손 한 번 까딱이면 조금 전과 같은 상태로 돌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네놈도 손짓 한 번에 죽일 수 있다만 함부로 말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조각 병사들이 날 올려다봄과 동시에 녀석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살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쳐보거라. 혹시 아느냐? 그렇게 추하게 춤추다 보면 내가 있는 곳까지 닿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래?”
[앤 보니&메리 리드 - 리볼버]
“그럼 조금만 기다려. 발도장 찍으러 가 줄 테니까.”
서 있던 조각상에서 몸을 날렸다.
방향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정면에 보이는 가장 높은 꼭대기 마천루.
안 봐도 저 위에 있을 것 같았다.
쐐에에에엑!
바람 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금으로 된 화살 세례가 쏟아졌다.
아마 맞는다면 역사상 가장 비싼 화살을 맞은 사람이 될 거 같았다.
[빛의 구원]
조각상들의 머리를 밟고 이동하며 사방으로 탄을 뿌렸다.
맞자마자 부서지는 녀석도 있었지만 단단한 재질 때문에 그렇지 않은 놈도 꽤 많았다.
그리고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드드득…!
부서졌던 놈도 언제 그랬냐는 듯 되살아난다는 것이었다.
생명 자체가 없어 보여서 되살아난다는 표현은 안 맞아 보이지만, 어쨌든.
부수는 게 딱히 보람이 없는 상태였다.
[도윤 - 비전 수리검]
리볼버를 집어넣고 수리검을 꺼내 들었다.
하나하나 없애면서 가기엔 한세월일 것 같아 최대한 뚫으며 지나쳐 볼 생각이었다.
화살비와 함께 등장한 조각용들로 하늘에도 딱히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게 안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잭 더 리퍼 - 면도칼]
면도칼을 입에 물고 수리검을 집어던졌다.
어느 정도 날아가다 조각 용에 부딪히며 전진을 멈춘 수리검.
곧바로 비전해 수리검을 챙긴 후 용을 디딤대로 다시 한번 뛰어올랐다.
“좀 비키시고.”
시야를 가리는 놈을 땅으로 처박아버린 후 마천루 방향으로 수리검을 날렸다.
쾅! 쾅! 쾅! 쾅!
반복하는 사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마천루에 미소를 그렸다.
“조금만 기다려라.”
콰앙!!
“얼마 안 걸린다.”
* * *
술잔을 기울인 남자가 조용히 아래를 응시했다.
조소가 절로 그려지는 광경이었다.
죽지 않는 불사의 군대를 상대로 발버둥치는 꼴이라니.
높은 곳에서 보고 있자니 벌레 한 마리의 처절한 춤사위 같았다.
‘너무 예민하게 굴었군.’
솔직히 불사의 검 칼린이 당했을 땐 조금 당황했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적이 튀어나올까 약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섬에 모습을 드러낸 백운을 보곤 안심하고 말았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그 증거로 백운은 조각 병사 하나도 어쩌지 못해 저렇게 고전하고 있었다.
‘저 벌레에겐 어떤 이름을 알려 주는 게 좋을까.’
수많은 세계에서 절대자로 군림했던 남자에겐 여러 가지 이름이 있었다.
저마다 시대에 맞는 최강의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자키도. 이 이름이 낫겠군.’
무적의 황제라 불리던 시절의 이름이었다.
이름을 정한 자키도가 옆에 놓인 진시황의 조각상을 쳐다봤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도전한 적은 진시황 단 한 명뿐이었다.
인간이란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두 번째 도전자가 또 인간이라니.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종족이라… 역시 옛날에 멸종시켰어야 했는데.’
자키도가 입맛을 다셨다.
진시황이 찾아오기 얼마 전.
자키도는 인간이 사는 세계를 발견하곤 나아갈 준비를 했었다.
지금까지 들렸던 세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곳이었다.
다양한 형태의 문명과 삶이 존재했고 위치에 따른 경관 역시 확연히 달랐다.
하나의 세계 속에 이렇게 다양한 삶이 존재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짓밟고 싶었었다.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 갖기엔 차고 넘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랬어야 하거늘.’
오랜 기다림 속에 지구로 향하는 문을 열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였다.
진시황이 나타난 것은 말이다.
그때도 자키도는 당황했었다.
진시황은 마치 자키도가 지구로 갈 걸 이미 아는 사람처럼 행동했었다.
마지막 순간 목숨을 바쳐 자키도가 하늘섬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봉인술을 펼친 게 그 증거였다.
오늘도 그때와 비슷했다.
마침내 진시황의 봉인이 다 하고 하늘섬을 벗어날 수 있게 되려는 참이었는데.
또다시 인간 이방인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허나 달라지는 건 없다.’
생각을 마친 자키도가 고개를 흔들었다.
과정은 어쨌든 결과는 단순했다.
진시황은 죽었지만 자신은 멀쩡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저딴 나약한 존재가 자신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으로.
이번에도 또다시 적은 죽고 자신은 살아남을 터였다.
‘열심히 발버둥 쳐보거라. 그래봤자 과거는 반복될 뿐이니.’
자키도가 발버둥 치고 있을 백운을 보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
한참 허공에서 고전하던 백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쾅!
마천루의 끄트머리로 수리검 하나가 날아들었다.
순간 황금빛을 뿜는가 싶더니 수리검 옆으로 생겨난 사람의 형체.
형체가 선명해질 때쯤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했지. 오래 안 걸린다고.”
* * *
술을 처먹고 있어?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화려한 왕좌에 앉아 거만함과 오만함을 뽐내는 모습.
여기까지 오며 예상했던 모습과 너무 똑같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름은 알려줘야겠지. 난 이곳의 신이자 황제인 자키도다.”
“백운.”
이름을 밝히며 마천루로 한 발자국 올라섰다.
“더러운 발자국이 생기는구나.”
자키도가 왕좌에 앉은 채 손을 한 번 휘둘렀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발자국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무슨 능력을 가진 건지 쉽게 가늠하기 힘든 녀석을 향해 오른손에 들고 있던 수리검을 냅다 집어던졌다.
콰직!
얼레.
자키도는 수리검을 피하거나 막지 않았다.
그대로 날아가 자키도의 얼굴에 박힌 수리검.
상처 부위에서 푸른색 피가 뿜어졌다.
“헛된 희망을 품기 전에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잠시 그 상태로 있던 자키도가 천천히 손을 올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뻗어 얼굴에 박힌 수리검을 뽑아내는 자키도.
약간 호러스럽다고 생각한 순간 바닥으로 쏟아졌던 푸른색 피가 솟아올랐다.
“…!”
피가 자신이 나왔던 곳을 기억하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피가 되돌아가나 싶더니 갈라졌던 자키도의 상처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여기는 나의 영역이다.”
수리검이 꽂혔던 부분을 만지며 자키도가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난 절대 죽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그러기로 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넌 죽을 것이다. 그 이유 역시 간단하다.”
자키도가 위로 들었던 손을 아래로 찍어 눌렀다.
“내가 그렇게 하고자 정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마천루의 천장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조각상 하나.
순간 몸을 빼며 피하자.
쿠웅!!
조각상이 커다란 굉음과 함께 나와 자키도 사이를 가로막았다.
단순한 염력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다른 종류의 힘이었다.
그건 그거고.
순간 생긴 여유에 슬쩍 눈을 돌려 왕좌 근처를 바라봤다.
자키도에게 티는 안 냈지만 마천루에 도착한 순간부터 내 신경은 왕좌 옆에 있는 조각상으로 쏠려 있었다.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 부르는 선명한 황금빛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