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화. 후손에 관하여
몇 번 인가 수화음이 울리고.
# 여보세요?
너머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시모시. 들리십니까.”
# 어! 백운 님이다!
“잘 지내셨죠. 수희 님. 제 번호가 아닌데도 바로 알아차리시는군요.”
# 그럼요! 이런 엉뚱한 곳에서 전화하는 건 백운 님 밖에 없거든요.
“그, 그런가요.”
# 핸드폰 또 해먹으셨구나!
“또 해먹다뇨. 누가 들으면 맨날 부수는 줄 알겠네요.”
땀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정곡이었다.
너머의 세계로 갔다 왔더니 먹통이 되어버렸던 핸드폰.
지난번처럼 가루 엔딩이 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또 하나를 보내버리고 말았다.
이쯤이면 안 사는 게 맞지 않나 싶은 수준이었다.
# 에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염치 불구하고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약간의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혹시 대산에서 진시황릉 가는 거요. 저도 좀 갈 수 있을까요?”
# 오, 마음이 바뀌신 건가요? 안 가신다더니!
“하하…. 그렇게 됐네요.”
# 잠시만요. 당연히 되겠지만 제가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보고 드리고 제가 다시 전화드릴게요. 이 번호로 하면 될까요?
“옙! 부탁드리겠습니다!”
# 네! 그럼 조금 있다 봬요.
공손하게 전화를 끊고 한숨을 내쉬었다.
대산에서 먼저 가자고 할 땐 일말의 고민조차 안 하고 괜찮다고 했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엄청난 태세전환이었다.
“고마워요. 아시나 님.”
“별말씀을요. 조금 있다 여기로 다시 전화 오는 거죠?”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지고 계셔도 돼요. 전 어차피 당장 쓸 일도 없으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아시나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내가 아무리 염치가 없어도 그럴 순 없었다.
“그러지 말고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아직 점심 안 드셨잖아요.”
“아 그럴까요?”
“네. 제일 맛있으면서도 제일 비싼 거로 드시죠! 제가 쏘겠습니다.”
“우와. 제가 사드려야 맞는 건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가시죠!”
앞장서는 아시나를 따라 도시를 걸었다.
묘하게 며칠 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밝아진 것 같은 비샤카파트남이었다.
“다들 말은 못했지만 싸이비 신도들을 무서워했다고 하더라고요. 신도들이 깨끗하게 사라지고 나니 여러모로 자유로워진 거고요.”
“역시 백해무익한 녀석들이었군요.”
“이제라도 제대로 된 방향을 찾아서 다행이에요. 백운 님이 아니었으면 아마 평생 모르고 살았겠죠. 무고한 생명만 희생되면서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도착한 식당.
지방 도시라 할 수 있는 비샤카파트남에선 가장 큰 곳이었다.
식당의 입구에 놓인 커다란 조각상을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수라 신이죠?”
“네. 맞아요. 아마 다른 도시로 가면 더 많이 볼 수 있을 거예요.”
비샤카파트남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건 당연히 비샤카 신이지만.
도시를 돌아다니는 중에 심심치 않게 저 두 개의 조각상을 볼 수 있었다.
“옆에는요?”
아수라 조각상과 항상 같이 놓인 신이 있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아수라와 대치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데바 신이에요. 정말 많은 인도 사람이 숭배하는 신이죠. 인도 밖에선 천신 혹은 천족이라고 불리는 선한 신의 역할이고요.”
“그럼 대치하고 있는 아수라는 악신이겠네요.”
“다양한 신화와 해석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그래요.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악신 아수라와 그걸 막아서는 천신 데바. 권선징악의 의미가 있다 보니 언제나 승리하는 건 데바예요.”
“오호.”
“백운 님은 신화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잘 알진 못하지만 이것저것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하하….”
유물관에 일할 때도 관심이 있긴 했지만 회귀 후엔 그야말로 진심 모드였다.
언제 어떤 신화가 무기와 연관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수라와 데바라.
가만히 두 조각상을 바라보다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왜 눈에 띈 건지는 모르겠지만 자세히 파보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지금은 아니었기에.
“아시나 님. 들어가시죠!”
“네!”
아시나와 함께 식당 안으로 향했다.
* * *
“네 백운 님. 그럼 인천공항에서 봬요!”
인사를 건넨 전수희가 전화를 끊었다.
백운은 먹방을 찍고 있는 중인지 쉴 새 없이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었다.
잔뜩 시킨 건지 끝도 없이 음식이 나왔고 말이다.
“인천공항으로 오신다고 하나요?”
“아, 네! 내일 아침까지 인천공항으로 오신대요.”
건너편에 있던 탐사 실장 김정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산의 옥상에선 곧 있을 진시황릉 탐사를 위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중앙에 앉아 전수희와 김정윤의 대화를 듣던 소피아가 미소를 지었다.
“알아서 오신다는 거 보면 또 무단입국 하시려나 보네요.”
“그런 거 같아요. 혼자 가는 게 빠르다고 하시더라고요.”
“항상 아무것도 없이 오시니 옷가지도 몇 개 준비해주세요. 바닷물에 폭삭 젖어서 오실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소피아의 말에 전수희가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백운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등장이 심상치 않은 사람이었다.
“그럼 다시 회의로 돌아와서. 최리아 실장, 고생 많았어요. 원래 업무도 아닌데.”
“아닙니다.”
최리아가 소피아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비밀리에 대산으로 잡아온 옥시나의 심문.
최리아는 정부와 함께 작성한 질문 리스트를 토대로 며칠 간 능력을 사용해 옥시나에게 정보를 얻었었다.
작은 한숨을 쉰 소피아가 의자로 몸을 기댔다.
“이럴 때마다 약간 막막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간은 자기가 원하는 걸 위해 대체 어디까지 끔찍해질 수 있나 하고요.”
“동감입니다. 옥시나가 실토하기 전까지 짐작하고 있었던 건 빙산의 일각이더군요.”
김정윤도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옥시나는 비밀리에 행해지던 생체 실험 연구소의 소장이었다.
듣기만 해도 귀를 의심케 하는 끔찍한 연구가 수도 없이 진행된 연구소.
한국 연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김정윤은 자기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었다.
정부에선 실험에 희생된 연구원들을 위해 추모식을 열 예정이었다.
“최리아 실장. 저번에 말씀하셨던 옥시나의 신병 처리는 어떻게 되고 있나요?”
모든 걸 실토한 옥시나는 대산과 한국 정부 측에 망명과 보호 요청을 했었다.
이미 다 불어버린 이상 러시아로 돌아가면 죽은 목숨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선 아직까지도 송환 요청이 없습니다. 들려오는 정보에 의하면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하고요. 군대와 정부 측 몇몇 유력인사가 대치하며 무력행사의 가능성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옥시나에게 쓸 신경이 없는 듯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추가로.”
최리아가 문서 한 장을 소피아에게 건넸다.
“헌터청에서 정부로 옥시나의 신병을 요청했어요.”
“헌터청이요?”
뜻밖의 이야기에 소피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이후 옥시나에게 딱히 관심이 없던 헌터청이었다.
이제 와서 신병 요청을 하는 게 의아했다.
“네. 강태황 장관이 직접 요청했습니다. 아주 강력하게요.”
“장관님이 그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뭔가 백운 님이랑 연관이 있을 거 같네요.”
“그러고 보니 백운 님이 이를 갈며 한 말이 있긴 합니다.”
김정윤이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사가 끝나면 사자 우리로 다시 던져버릴 거라고요.”
회의실로 약간의 정적이 흘렀다.
묘한 미소를 머금으며 찻잔을 홀짝이는 소피아.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저마다의 미소를 지었다.
정보 수집 때문에 살려두긴 했지만 옥시나가 망명해 잘 먹고 잘 사는 걸 가만히 지켜볼 백운이 아니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였다.
“자… 그럼 다시 진시황릉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예!”
머릿속에서 백운을 떠올리던 사람들이 자세를 고쳐잡았다.
* * *
“습관이라니까 습관.”
고개를 흔들며 부둣가로 올라섰다.
중간에 해가 뜬 덕에 몸은 바닷물에 폭삭 절여진 상태였다.
날아오던 중 몇 번인가 별 구경한다고 게으름 피운 대가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 그 여유를.”
나름 합리화하며 전수희가 알려준 주차장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백운 님!”
활기찬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난 줄 어떻게 알았는지 전수희는 저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같이 손을 흔들며 다가가자 전수희와 김정윤의 대화가 들려왔다.
“역시 회장님이시네요.”
“그러게요. 내다보시는 안목이 남다르다니까요.”
“소피아 님이 뭔가 내다보셨나요?”
가까이 가서 묻자 전수희가 웃음을 터뜨렸다.
“백운 님이 물에 폭삭 젖어서 나타날 수도 있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짜잔.”
전수희가 차 안에서 쇼핑백 여러 개를 꺼냈다.
“백운 님 옷을 준비했습니다!”
“허억.”
“전부 갈아입으실 수 있게 풀세트입니다!”
쇼핑백을 받으며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조용히 대산 건물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갓피아…!!
생글생글 웃던 전수희가 갑자기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아 맞다. 집들이 한 다음날이요. 비광 님이 라면 끓여주셨어요.”
“오씨. 진짜요? 당연히 욕하면서 안 끓일 줄 알았는데 신기하네.”
순간 까먹고 있던 그 날이 떠올랐다.
“처음엔 그러셨는데 강태황 장관님이 끓이라고 하셨어요.”
옆머리로 땀이 흘렀다.
결국 더 강한 권력에 무릎을 꿇고만 비광이었다.
“어? 그런데 냄비 없는데 어떻게 끓이셨지.”
“뽀글이 해주셨어요. 군대에선 이렇게 먹는다고 하면서요. 엄청 맛있었어요! 군대 안 갔다 온 백운 님은 할 수 없는 거라고 덧붙이셨고요.”
“반박할 수 없는 논리군요.”
“다른 분들은 엄청 신기해하면서 드셨어요. 1급 헌터가 끓여주는 뽀글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고요.”
“에이 마지막이라뇨. 다음에도 비광 님이 또 끓여주실 거예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속으론 타의지만 라면 요리사가 되어 준 비광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백운 님이 물어보셨던 거요.”
전수희가 가방에서 주섬주섬 문서 꾸러미를 꺼내 내게 건넸다.
전화를 끊기 전 혹시 가능할까 싶어 물은 게 있었다.
혹시 대를 잇고 있는 진시황의 가문이 있는지였다.
“압도적 감사 그 자체입니다! 수희 님!”
“에이 조사하면 또 제 주특기니까요.”
전수희가 커다란 안경을 사삭 치켜 올렸다.
“대대로 진시황의 자손이라고 알려진 가문이 있어요. 오래전에 가세가 기울어서 지금은 평범한 집안과 다를 게 없지만요. 어디에 사는지 위치도 불명확하고요.”
“으음. 그렇군요.”
턱을 문지르며 문서를 살폈다.
난 공명에서 본 장소로 진시황을 데려다주고 싶었다.
여기에 가능하다면 그 후손이란 사람들도 만났으면 했다.
그들에게 사과와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하고 죽은 걸 진시황은 마음에 걸려 했었기 때문이다.
“고맙습니다. 수희 님.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밝게 웃으며 다시 한번 문서에 적힌 장소를 확인했다.
만날 수 없는 이들을 대신 연결해주는 무기왕 열차.
중국으로 출발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