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화. 후손을 찾아서
무기왕 열차 성능 어떻게 된 거야 이거.
두 손을 모으고 얼굴을 파묻었다.
아무래도 고장 난 열차인 것 같았다.
아직 제대로 출발한 적도 없는데 벌써 난관에 봉착하다니.
“여기도 아닌 거죠?”
옆에 앉은 전수희가 태블릿을 건넸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성 사진이었다.
“아닌 거 같아요. 구조가 좀 다른 느낌…?”
“큰일이네요. 마지막인데.”
전수희가 시무룩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비행기에 오르자마자 전수희와 함께 장소 탐색을 시작했었다.
찾고자 하는 장소는 공명에서 진시황과 대화를 나눈 성이었다.
진나라의 수도를 뒤져보면 금방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역시 마가 낀 건가.
뭐 하나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각 수도를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도저히 공명에서 봤던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나간 시간 동안의 변화를 고려하더라도 지형 자체가 너무나 달랐다.
거기다 전수희의 말에 따르면 진나라의 각 수도는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원형이 꽤 잘 보존된 편이었다.
그럼에도 이렇다는 건 내가 본 장소가 아닐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였다.
# 이제 곧 공항에 착륙하겠습니다. 중국 정부에서 마중을 나올 예정이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수희 님. 일단 이거 하나 드세요. 당 떨어진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건네준 초콜릿을 한입에 욱여넣는 전수희.
팔짱을 낀 전수희가 입을 오물거리며 고개를 좌우로 왔다갔다 거렸다.
“이상하다. 왜 없지.”
“너무 죄송한데요. 저 때문에 수희 님 쉬지도 못하고.”
“에이 아니에요. 제가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같이 찾자고 한 건데요. 일단 내려서 마중 나온 분들에게도 물어보면 좋을 거 같아요. 마중 나오는 인원 중에 오래전부터 같이 일한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
“그래야겠네요. 그런데 수희 님. 그림 좀 그리시네요.”
한쪽 손엔 내 이야기를 토대로 전수희가 그려준 그림이 들려있었다.
진시황과 나란히 앉아 내려다봤던 풍경의 몽타주.
그림으로 그려준다길래 별 기대 안 했었는데 전수희의 그림 실력은 깜짝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
“후훗. 이래 봬도 취미가 그림 그리기거든요. 퇴근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리고 있다 보면 쌓였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라 좋아해요.”
딱한 표정으로 전수희를 쳐다봤다.
역시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었다.
“수희 님. 화이팅.”
조용히 화이팅 포즈를 취하자 전수희가 슬쩍 건너편의 눈치를 살폈다.
실장 최리아가 앉아 있는 자리였다.
최리아가 자고 있는 걸 확인한 전수희도 목소리를 낮추며 화이팅 포즈를 취했다.
“나 자신 화이팅…!”
고도를 낮추기 시작한 비행기가 부드럽게 활주로로 미끄러졌다.
“저 차들인가 봐요.”
전수희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봤다.
그곳엔 여러 대의 중형 세단과 SUV가 서 있었다.
잠시 후 착륙했다는 방송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아래로 쭉 뻗어 내려가는 계단과 그 주위로 다가오는 중국 정부 사람들.
앞에서 내려가던 전수희가 어딘가로 슬쩍 손을 흔들었다.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흔들고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친구분인가 봐요.”
“맞아요. 중국이랑 협업할 때마다 항상 제 파트너였거든요.”
먼저 내려간 김정윤과 최리아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전수희가 뽈뽈뽈 달려가 친구를 껴안았다.
“메이! 오랜만이야!”
“찹쌀떡도 오랜만!”
“!?”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전수희의 친구 메이를 바라봤다.
역시 나만 전수희를 찹쌀떡 같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메이. 여기는 백운 님이야.”
무언가 더 말하려던 전수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동공 지진이 난 걸 보니 무기왕이라 소개하려다 급브레이크를 밟아 고장 난 것 같았다.
“수희 님이랑 같이 일하는 동료예요. 반갑습니다.”
“반가워요. 수희 친구 메이라고 해요.”
긴 흑발을 포니테일로 허리까지 묶은 메이.
커다란 흑색 눈동자를 포함해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또렷한 사람이었다.
“이동하겠습니다!”
먼저 움직이는 선두를 따라 두 사람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고장 났던 게 복구된 건지 전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메이. 혹시 이런 곳 본 적 있어?”
메이에게 들고 있던 그림을 보여줬다.
진나라와 관련된 곳이란 설명도 덧붙였다.
“진나라요.”
혼잣말을 하며 메이가 그림을 자세히 살폈다.
응?
함께 그림을 보는 척하며 메이의 표정을 살폈다.
찰나였지만 메이의 눈이 놀란 것처럼 커졌다가 작아졌었다.
한동안 그림을 살피던 메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당장 기억나는 곳은 없네요. 여기는 어떤 이유로 찾으시는 거예요?”
“옛날에 진시황이 머물렀던 장소로 알고 있는데 한 번 가보고 싶어서요.”
“그렇군요.”
메이가 오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종종걸음으로 달려가기 시작한 전수희.
건너편을 보니 최리아가 전수희에게 오라며 손짓하는 중이었다.
“저 먼저 앞으로 가볼게요!”
바람 같이 사라진 전수희에 약간의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 몇 마디를 나눈 게 전부라 그림 이야기가 끝난 지금 딱히 꺼낼만한 주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저, 백운 님.”
천천히 행렬을 따르다 걸음을 멈춘 메이가 날 돌아봤다.
뭔가 복잡 오묘함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초면에 실례일 수도 있는데요.”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손을 든 메이가 내가 들고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이 그림에 그려진 풍경, 어디서 보신 건가요?”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나도 걸음을 멈추고 메이를 마주 봤다.
“알고 계시는군요. 이 그림에 그려진 장소가 어디인지.”
여전히 복잡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메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운 님! 메이!”
조금 떨어진 행렬에서 얼른 오라며 손을 흔드는 전수희에.
몸을 돌린 메이가 입을 열었다.
“조금 있다 계신 곳으로 가겠습니다.”
나지막한 말을 남긴 메이가 고개를 꾸벅이곤 멀어져 갔다.
* * *
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잽싸게 문을 열었다.
거기엔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메이가 서 있었다.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업무가 늦게 끝나서요.”
“괜찮습니다!”
“아까 일하다 수희한테 들었어요. 백운 님이 진시황의 후손도 만나고 싶어하신다고요.”
“네 맞아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메이가 문에서 한 발자국 비켜섰다.
“그림으로 보여주신 장소요. 구석지고 좀 멀긴 하지만 이곳 병마용에서 갈 수 있는 거리예요. 그리고 그곳에 가시면 만날 수 있어요. 말씀하신 진시황의 후손요. 알고 계신 거랑은…. 다를 수도 있지만요.”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이자 메이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혹시 먼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곳을 가야 하는 진짜 이유와 후손을 왜 만나려는지요.”
“후손은 이미 만난 거 같긴 하지만요.”
“…!”
눈이 커지는 메이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건넸다.
“의도하고 검색한 건 아닌데 우연히 보게 됐어요.”
화면엔 사진이 첨부된 옛날 기사가 띄워져 있었다.
현대에 남은 진시황의 후손을 취재한 것이었다.
사진엔 마지막 후손이라 알려진 부부와 어린 딸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너무 닮아서 못 알아볼 수가 없겠더라고요.”
사진을 보던 메이가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그런 메이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허락도 없이 메이 님의 비밀을 알아버렸으니 저도 제 비밀을 말씀드릴게요.”
“비밀요…?”
“제 이름은 백운. 대한민국 소속 1급 헌터예요. 또 다른 이름으론 무기왕이라고 불리는 중이고요.”
“!!!”
메이의 입이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벌어졌다.
놀랄 걸 알면서도 알려준 이유는 간단했다.
메이가 진시황의 후손이란 걸 안 이상 계속 신분을 속이고 거짓말하며 그림에 그려진 장소를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까 하신 질문에 답하자면, 전 진시황의 후손분들께 전할 말이 있어요.”
메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진시황이 직접 남긴 말씀이에요. 지금 당장 잘 이해는 안 되겠지만 저한테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요.”
한동안 굳어 있던 메이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빙글 돌렸다.
“먼저 안내해 드릴게요. 나머지 이야기는 그곳에서 부탁드려요.”
“좋습니다.”
“그럼 가시죠.”
가볍게 옷을 챙긴 뒤.
앞서가는 메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메이 님. 괜찮으시죠?”
“소, 속이 좀 안 좋긴 한데 참을만해요!”
괜찮으시고.
“다 왔어요. 저기예요!”
메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천천히 날갯짓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가려는 메이에게 조금 더 빨리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었다.
흔쾌히 수락하길래 곧장 구석진 곳으로 와 날개를 꺼냈고 말이다.
“착지 완료.”
“우욱!”
발이 닿자마자 메이가 입으로 손을 올렸다.
잠시 후 다시 내린 걸로 보아 고비를 간신히 넘긴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메이를 따라 산 깊숙한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병마용에서 거리 자체는 멀지 않지만 인적이 아예 끊긴 곳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문을 노크하는 메이.
“메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집 안에서 아버지로 보이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초지종을 설명한 건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는 메이의 아버지.
고개를 가볍게 꾸벅이자 다가온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타랑이라고 합니다.”
“백운 입니다.”
긴장된 얼굴로 바라보던 타랑이 날 집으로 안내했다.
문을 닫자 어디선가 오래된 액자를 가지고 나온 타랑.
“…!”
아주 오래된 그림 속엔 진시황과 함께 봤던 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대대로 내려온 가보입니다. 높은 곳에서 성을 보며 진시황이 직접 그린 것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죠.”
공항에서 메이가 그림을 보고 놀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릴 때부터 물려내려 온 그림을 보고 자랐을 메이였다.
한국에서 온 정체 모를 놈이 비슷한 걸 들고 있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복잡한 얼굴이던 타랑에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흰 백운 님이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시황의 진짜 후손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백운 님께서 전하러 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저희에겐 없습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메이도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좀 헷갈리죠? 아까 찾아보신 취재에선 진짜 후손이라고 얘기했었으니까요.”
“이야기하자면 길지만 그건….”
메이의 말에 씁쓸하게 웃어 보인 타랑이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그래야만 했으니까. 맞죠?”
놀란 얼굴의 두 사람한테 진시황에게 들었던 과거를 이야기해주었다.
떠나야만 하는 영정을 대신해 새로운 진시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그 사실이 역사에 남지 않도록 죽을 때까지 숨길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두 사람은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당시의 이야기는 기록에 남지 않는 형태로 이들에게도 구전된 모양이었다.
“제가 찾던 건 타랑 님과 메이 님이 맞아요. 제대로 찾아온 거죠. 그러니 두 분께서는.”
밝게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충분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