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443화 (443/473)

443화. 종점

“여기까지입니다.”

긴 이야기를 마치며 미소를 그렸다.

메이와 타랑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제가 너무 뜬금없이 찾아와서 한 거 같네요.”

멋쩍게 웃자 타랑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어떻게 안 믿을 수 있겠습니까. 진시황이 진나라를 떠나기 전의 이야기는 가문에만 구전되어온 것과 완전히 일치합니다. 단지, 너무 엄청난 이야기라 잠시 멍할 뿐입니다.”

타랑이 몇 번 심호흡하더니 의자로 몸을 기댔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귀에 딱지가 앉도록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반신반의했었죠.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어쨌든 쉽게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니까요. 가짜 진시황이라니 역사 어디에도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의구심을 안은 채로 살아왔습니다. 머리로는 믿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론 그러지 못했던 거죠. 메이에게 전해주면서도 확신을 가지지 못했었고요.”

“진시황은 계속 마음에 걸려 했어요. 큰 책임을 떠맡은 분들께 감사와 사과를 전하지 못한 걸요.”

“당치도 않습니다. 세계를 위해 희생하신 건데 그 누가 황제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영광입니다.”

날 바라보던 타랑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이야기를 해주시기 위해 여기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평생 절 힘들게 했던 것들이 한 번에 사라지는 기분입니다.”

“저도요. 정말 감사합니다. 백운 님.”

덩달아 꾸벅이는 메이에 호다닥 손사래를 쳤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리고.”

가방에서 조각상 가루가 든 검은색 단지를 꺼냈다.

“유해라거나 그런 엄청난 건 아니지만. 수백 년 동안 진시황을 가두고 있었던 조각상의 가루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이거라도 가장 좋아했던 장소로 돌려 보내드리고 싶었거든요.”

멍하니 단지를 바라보던 타랑이 몸을 일으켰다.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림에 그려진 장소로요.”

밖으로 나가는 타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뒤따라온 메이가 나란히 걸으며 입을 열었다.

“가문은 대대로 이 지역을 관리하며 살아왔어요.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이라 가세는 점점 기울어갔고요. 그럼에도 아버지는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하셨어요. 선조들이 지켜온 걸 차마 버리지 못하신 거죠. 그러면서도 제겐 떠나라고 하셨어요. 허구일지도 모르는 이야기 때문에 저까지 이곳에 있을 필요는 없다고요.”

타랑을 바라보는 메이의 입가로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오늘 다짐했어요. 아버지 다음에는 제가 이곳을 관리하기로요. 어떻게 먹고 살지는 모색을 좀 해봐야겠지만요.”

메이의 말이 끝날 무렵.

걸음을 멈춘 타랑이 날 돌아봤다.

“이곳입니다. 역사에서 지워지며 완전히 잊혀져버린 진나라의 성입니다.”

도착한 곳은 굳게 잠긴 커다란 성문 앞이었다.

타랑이 열쇠를 돌리자 오래된 경첩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관리한다고 말씀드렸었는데 조금 창피한 모습이네요.”

성 내부가 워낙 넓으니 전체를 다 관리하는 건 불가능한 게 당연했다.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전투가 있었던 건지 성 내부 건물은 여기저기 부서져 있었다.

벽면엔 넝쿨과 이끼가 생긴 상태였고 말이다.

이런 것들 덕분에 도시가 더 유적지스럽게 보이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엄청나네요.”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이곳만큼은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공명에서 봤던 구조와 분위기 그대로였다.

“이런 곳이 어떻게 문화재가 아닐 수 있는 거죠?”

“오래전에 신청한 적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반려 당했죠. 오래된 성이긴 하지만 진시황이 머물렀다는 증거가 없다고요. 기록되어 있는 역사와도 다르고요.”

어느 정도 이해가 가긴 했다.

이곳을 인정하는 건 지금까지 기록된 역사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땐 좀 좌절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이곳은 원래의 모습과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멈춰 있게 되었으니까요.”

타랑이 후련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까지 해온 게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게 돼서 정말 기분이 좋습니다. 아, 그림에 그려졌던 장소는 저곳입니다.”

타랑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성의 중심에 꽤 높은 층의 마천루가 위치해 있었다.

많이 낡아 걸어 올라가거나 하기엔 위험해 보였다.

“단지는 백운 님께 맡기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백운 님이 원하시는 곳에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다녀올게요.”

[이카로스 - 칼데아 윙]

날개를 펼치고 마천루 위로 뛰어올랐다.

여기저기 기와가 부서져 위태로워 보이는 지붕.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곳으로 가 조심스럽게 내려앉았다.

마침 진시황과 대화를 나누었던 위치였다.

안 무너지겠지.

힘을 최대한 빼고 공명 속에서 진시황과 똑같은 자세로 몸을 앉혔다.

이거구만.

두 팔로 지붕을 짚으며 도시를 내려다봤다.

그때와 달리 은은한 불빛이나 분주하게 움직이는 백성은 없었다.

그럼에도 도시에선 그때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밝은 달빛과 그 사이로 별이 빼곡한 밤하늘은 그때나 지금이나 아름다웠고 말이다.

어디 보자.

감상을 멈추고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밤하늘과 도시를 한 번에 잘 감상할 수 있는 위치에 단지를 놓고 싶었다.

“오.”

눈길이 지붕의 정중앙에서 멈춰 섰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섯 마리의 용이 하늘로 솟아있었고 그 중심으로 작은 원형 공간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곳에서 제일가는 야경 스팟은 저곳이었다.

천천히 다가가 그곳으로 조심스럽게 단지를 내려놓았다.

달빛을 받은 단지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졌다.

“돌아왔으니까 마음껏 보시라구요.”

눈을 감고 단지를 향해 잠시 침묵한 후.

미소를 그리며 빙글 몸을 돌렸다.

뭐랄까.

이제야 제대로 마무리된 기분이었다.

비샤카파트남에서 시작된 진시황을 향한 여정이 말이다.

* * *

“고생 많으셨어요. 메이 님. 벌써 새벽이네요. 그런데 괜찮으신 거죠?”

“우욱… 네. 괘, 괜찮아요!”

얼굴이 허옇게 질린 메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인데도 적응이 안 되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백운 님. 내일 봬요.”

“저도 감사했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메이가 숙소로 들어갈 때까지 열심히 손을 흔들어 준 후.

몸을 돌려 밤거리를 거닐었다.

“중국이구만.”

사실 밤거리라고 할만한 건 없었다.

산으로 둘러싸여 온 사방이 새카맸다.

최대 유적지인 병마용 근처라 개발 같은 게 이루어지지 않아서였다.

“오 그래도 있을 건 있네.”

걸어가다 보이는 희미한 불빛에 방향을 바꿨다.

규모가 작긴 하지만 이 시간까지 운영 중인 편의점이 있었다.

하도 산에 둘러싸인 탓에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ATM도 있네.”

당장 뭘 사려고 온 건 아니었다.

작동 중인 ATM으로 가 지문을 가져다 댔다.

몇 초 지나자 출력되는 나의 계좌 현황.

집을 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17억이었던 계좌 잔액은 어느새 22억을 넘어가고 있었다.

볼 때마다 입가로 미소가 그려지는 액수가 아닐 수 없었다.

“조금만 더 보자.”

온 신경을 집중해 20억이란 금액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부자가 된 기분을 충분히 느낀 후 버튼으로 손을 옮겼다.

주머니에서 아까 챙겨놨던 명함을 꺼냈다.

타랑 몰래 식탁 위에 있던 걸 집어온 것이었다.

유적지 유지 보수를 위한 후원 계좌가 적혀 있는 명함.

ATM으로 계좌번호를 입력한 후 금액란에 20억을 적어 넣었다.

지금 바로 보내면 내일 만났을 때 뻘쭘할 테니까.

예약 송금으로 한 달 뒤를 설정하고.

망설임 없이 이체 요청 버튼을 눌렀다.

원형의 아이콘이 빙글빙글 돌아가더니 화면으로 이체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 잔액: 2억.

“원래부터 0 하나가 없었던 거야. 아깐 잘못 봤던 거지. 암 그렇고말고.”

몇 번인가 고개를 끄덕이곤 편의점 안으로 향했다.

2억이나 있으니 먹고 싶은 건 고민 없이 다 집을 수 있었다.

냉동 안주와 맥주가 놓인 코너로 걸어갔다.

난 2억이나 있는 부자였기에.

오늘 야식은 아주 푸짐하고 호화롭게 먹을 생각이었다.

* * *

여기서 마실까.

주변의 산 중에 제일 높아 보이는 곳의 정상.

꼭대기에 있는 평평한 바위 위로 자리를 잡았다.

양손엔 방금 털어온 편의점 음식이 한가득 있었다.

바로 먹으려고 돌려온 뜨끈뜨끈한 족발과 만두를 늘어놨다.

비광이 군대에서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고 극찬했던 슈넬 치킨도 뜯어 옆에 놓았다.

맨날 먹어봐야지 했는데 이제야 먹게 되었다.

“중국 고량주라. 강력해 보이는 친구군.”

두툼한 사각형 병에 그려진 문양부터가 압도적이었다.

용과 호랑이가 서로에게 발톱을 세우며 싸우는 형상.

먹자마자 힘이 불끈불끈 솟을 듯한 녀석이었다.

사은품으로 받아온 잔에 고량주를 따랐다.

꼴꼴꼴꼴 소리를 내며 한가득 채워지는 잔.

코 아래로 가져가 향을 음미한 후 한 번에 들이켰다.

도수가 꽤나 높은 모양이었다.

고량주가 식도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지더니 속이 뜨거워졌다.

“크으으으!”

입으로 고량주의 뜨듯한 향이 뿜어졌다.

크으 소리가 안 나올 수 없는 맛이었다.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슈넬 치킨을 하나 집었다.

모양만 봤을 땐 평범한 냉동 닭고기였다.

“또 속은 거 아닌가 몰라.”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슈넬 치킨을 입으로 옮겼다.

그리고 몇 번 씹기 무섭게 눈이 번쩍 뜨였다.

“왜 맛있냐.”

씹자마자 입안으로 기름진 육즙이 퍼져 나갔다.

그냥 쌩기름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게 정녕 냉동 치킨이 맞나 싶은 담백한 맛이었다.

“의외로 진실한 사람일지도.”

실낱같은 가능성을 떠올리며 손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족발 한 점, 슈넬치킨 한 점, 소시지 한 점 후 고량주 한 잔까지.

오늘따라 술이 아주 그냥 입에 쫙쫙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번 술잔을 가득 채우며 고개를 들었다.

“달빛 좋고.”

보름달이라 그런지 하늘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달빛.

공명 속에서 봤던 것과 완전 판박이었다.

“바람 좋고.”

두 눈을 감고 뺨을 스치는 새벽 공기를 느꼈다.

귓가론 고요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감은 채 천천히 잔을 기울여 술을 음미했다.

“술맛 좋고.”

입가로 미소가 그려졌다.

요 근래 먹은 술 중에 감히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주변 환경이 한몫하긴 했지만 말이다.

“하아.”

눈을 뜨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진짜 좋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분을 입 밖으로 내보내며 봉다리에서 새로운 고량주를 꺼냈다.

기분 좋고 여유 가득한 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취하고 싶은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