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8화. 역발산기개세
공간이 언제 있었냐는 듯 빠르게 흩어졌다.
지금까지 만난 무기의 흔적 중 가장 짧은 공명이 아닐까 싶었다.
그만큼 무언가 뚜렷한 단서라고 할 만한 건 발견하지 못했다.
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사방이 무너져 시야가 제한되기도 했었고 말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붉은 머리의 남자가 읊은 말은 똑똑히 들었었다.
역발산기개세.
그리고 이걸 듣는 순간 떠오른 인물은 단 한 명뿐이었다.
중국 역사상 최강의 무력이라 불리는 패왕, 항우.
역발산기개세를 읊었다고 해서 무조건 항우란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왠지 모르게 강한 확신이 들었다.
붉은 머리 남자에게서 느껴졌던 기운이 엄청났었기 때문이다.
무조건 항우였으면 좋겠다.
사심 가득한 마음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최강을 말할 땐 빠지지 않고 화자되는 항우.
아직도 더 올라가고 싶은 나에게 있어 항우는 절로 눈을 반짝이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원래도 항우는 강함의 낭만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말이다.
“콜록!”
기침을 하자 입에서 모래가 섞여 나왔다.
공명 안에서 숨 몇 번 쉬었을 뿐인데 코안에 모래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아.
얼굴로 불어오는 새벽 바람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항우를 만났다는 설렘에 잠시 잊고 있었다.
오늘 처음 만난 서른 정도의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개를 휙 돌리자 그대로 굳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가린 방독면 때문에 안 보이지만 입을 벌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볼일은 끝났습… 콜록! 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내리니 깔끔했던 옷도 황토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들 입장에선 내가 자학적인 마술이라도 부린 줄 알 것 같았다.
왜에에에에에엥!
이제 책임자로 보이는 여자에게 무언가를 더 물으려는 순간.
진시황릉 쪽 도로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거리가 꽤 있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까지 도달할 것 같았다.
벙쪄 있던 무리가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견갑이 든 유물의 케이스를 챙기고 널브러져 있던 덩치를 주워갔다.
나도 일단 가야겠네.
오토바이를 세워 놓은 곳으로 몸을 돌렸다.
여자에게 묻고 싶은 건 많지만 자리를 뜨는 게 우선일 것 같았다.
이런 난장판이 된 현장에서 중국 쪽과 마주치는 건 절대 사절이었다.
“넌 누구지? 시안 그룹과는 무슨 사이야? 적인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역시라는 생각이 들어 미소가 지어졌다.
나만 저들의 정체가 궁금한 게 아니었다.
내가 뜬금없이 나타나 보여 준 모습들 때문인지 저들도 내가 누군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여자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적은 아니고요. 아마도 적이 될 것 같은 사람?”
“적이 될 거 같은 사람… 이라.”
내 대답을 곱씹은 여자가 핸드폰 하나를 던졌다.
투박한 생김새를 가진 폴더폰이었다.
“연락하지.”
짧은 말을 마지막으로 여자가 몸을 돌렸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무리는 어느새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터널 끝에 세워진 오토바이로 올라탔다.
방독면 무리가 먼저 출발하는 걸 확인한 후 나도 악셀을 당겼다.
“아니다.”
그렇게 얼마 가지 않은 상태에서 몸을 일으켰다.
앞으로 가면 길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르는 상황.
괜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방독면 무리는 아직 충분히 멀어지지 않았기에.
날개를 꺼내는 대신 오토바이를 번쩍 들어 가드레일을 휙 넘어갔다.
* * *
오늘도 너무 수고했고.
샤워를 마치고 노곤한 몸을 침대로 눕혔다.
어젠 숙취 상태로, 오늘은 오토바이를 등에 짊어진 채로 산을 탔더니 몸 여기저기가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하아.”
몸을 빙글 돌리며 대자로 팔다리를 쭉 뻗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내가 공명에서 본 것과 원래 알고 있던 지식을 조합해보았다.
견갑이 발견된 장소로 미루어봤을 때 공명 속의 배경은 진시황릉일 가능성이 높았다.
“급하게 매장한 게 아니라 일부러 무너뜨린 거였나.”
마지막에 항우는 남은 힘을 다해 이곳을 지켜낼 거라고 말했었다.
“어째서?”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머리를 굴렸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다.
역사적으로 항우와 진시황 사이엔 딱히 접점이라 할만한 게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연관성을 찾자면 진나라 멸망 이후 등장한 항우가 진시황릉을 도굴하고 불 질렀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완벽하게 검증된 이야기는 아니라 사실무근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알려진 이야기만 봤을 때 항우가 진시황릉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흐음.”
아까 여자가 건네줬던 핸드폰을 떠올렸다.
핸드폰은 그야말로 빈 깡통이었다.
통화 기록이나 문자는 물론 저장된 연락처조차 하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기업을 상대로 유물을 훔치는 도둑 무리라니.
심지어 놈들이 훔쳐 간 거라곤 그 견갑 딱 하나였다.
생각할수록 기묘한 녀석들이었다.
“뭐 하는 놈들이냐.”
어제오늘 바쁘게 돌아다녀서일까.
머리가 잘 안 돌아가는가 싶더니 정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했다.
눈꺼풀도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밀려오는 졸음에 정신을 맡기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꿀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어둠이 시야를 집어삼킨 순간.
똑똑똑!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체감상 눈을 감은지 1초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백운 님! 점심 먹으러 가요!”
점심요?
전수희의 목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보았다.
체감은 1초지만 눈을 감고 이미 몇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뻗친 머리를 꾹꾹 눌러 준 후 문을 열었다.
오늘은 전수희 혼자뿐이었다.
“백운 님. 엄청 피곤해 보이네요. 잠 못 주무셨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최악의 꿈을 꿨어요. 눈을 감은지 1초 만에 깨어나는 꿈.”
“으.”
전수희가 몸서리치며 콧등을 일그러뜨렸다.
“메이는 회사 호출받고 갔어요. 오늘 새벽에 난리가 났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한 후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지이이이 하는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도로에서 총을 쐈대요!”
“그, 그래요?”
“수류탄도 터지고요!”
“오, 오우.”
점점 다가오는 전수희에 스리슬쩍 고개를 돌렸다.
“부스스한 머리와 피곤해 보이는 얼굴! 범인은 백운 님이군요.”
전수희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그렸다.
점심부터 명탐정 역할에 몰두한 모습이었다.
“아시죠? 전 총이랑 수류탄 안 갈기는 거. 아주 앞뒤 안 가리는 놈들이었다니까요.”
천천히 걸으며 현장부터 도로까지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네에…? 유물을 빼돌렸다고요?”
깜짝 놀란 전수희가 목소리를 낮췄다.
눈은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한 상태였다.
“네. 목적이 뭔지는 아직 모르겠어요. 어제 나타났던 방독면 놈들이 누군지도 모르겠고요.”
“그러게요. 후보군이 워낙 많긴 하네요.”
“후보군이 많다고요?”
“아 네.”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휙휙 둘러본 전수희가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가진 힘이 워낙 막강해서 다들 쉬쉬하지만 시안 그룹은 적이 많기로 유명하거든요. 문어발식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데 그중엔 드러나선 안 되는 불법적인 것도 많다고 해요. 유물 관련된 의심점도 꽤 있었어요. 국립 박물관으로 전달되었어야 하는 유물을 중간에 가로챈다든지 하는? 물론 기소된 재판에선 무죄를 받았지만요.”
“그런 혐의점이 있는 기업인데도 어떻게 진시황릉 발굴의 리드를 맡게 됐네요.”
전수희가 검지와 엄지를 이용해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다.
“다 이거의 힘이죠. 그룹의 오너 일가인 시안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해요. 무슨 왕족 출신이랬나 뭐랬나. 어쨌든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돈이 엄청 많았대요. 오랫동안 쌓아온 인맥도 엄청나고요.”
“오호. 흑막의 모든 조건을 갖춘 놈들이군요.”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진시황릉 발굴 건을 따낸 건 물론 그 보안까지 다 꿀꺽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중국 내에서 시안 그룹이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어마 무시한 지 말이다.
“아 참. 새벽에 있었던 일의 수습 때문에 오늘 발굴 일정은 취소됐어요. 혹시 방금 말씀해주신 거 실장님께 보고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방긋 웃으며 식당으로 들어선 전수희가 말을 이었다.
“오늘 일정도 사라졌는데 백운 님은 뭐 하실 거예요?”
“저요? 오늘은 낚시 좀 해보려고요.”
“갑자기 낚시요?”
의아해하는 전수희에 미소를 그리며.
어제 받아왔던 핸드폰을 떠올렸다.
부디 오늘처럼 일정이 비었을 때 바늘을 물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 * *
진시황릉에서 멀지 않은 건물의 상황실.
첨단 장비로 꾸며진 방 안에서 유하랑이 의자로 몸을 기댔다.
날렵한 몸과 흑발 숏컷에 무미건조한 표정을 가진 유하랑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장. 아가씨 전화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유하랑이 전화를 들었다.
“예. 아가씨. 유하랑입니다.”
# 하랑!
너머에서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제 꽤 소란이 났었다고 들었는데. 다친 곳은 없지?
“괜찮습니다. 시안 측 총에 맞은 인원들은 데려와서 치료 중이고요. 생명에는 지장 없습니다. 기절했던 구든도 지금은 깨어나 있습니다.”
# 다행이네. 그 검은 모자에 관한 건 아직 아무것도 없는 거지?
“예. 그런데 곧 뭐라도 나올 겁니다. 미끼를 던져놨으니까요.”
# 네가 보기엔 어떤 거 같아? 느낌 같은 거.
작은 한숨을 내쉰 유하랑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묘한 남자였어요. 한 가지 분명한 게 있다면 자신감이 엄청나다는 거였습니다.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이 인원을 상대로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요.”
# 하랑이 그렇게 말할 정도라니 나도 한 번 보고 싶네. 구든도 한 방에 눕혔다면서?
“예. 저희한테 딱히 적개심을 가진 거 같진 않았지만 방심할 순 없습니다. 무엇 때문에 유물을 봤던 건지 아직 목적도 불분명하니까요.”
# 그래?
목소리 톤만 들어도 유하랑은 알 수 있었다.
너머의 아가씨는 어제 유하랑이 만났던 남자에게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 그럼 내가 거기로….
삐빅! 삐빅!
아가씨가 유하랑에게 무언가를 더 말하려는 순간.
신호음이 울리며 상황실의 모니터로 빨간색 점이 나타났다.
“대장! 핸드폰 켜졌습니다!”
“!!”
소리 지르는 구든에 유하랑이 몸을 일으켰다.
줄곧 꺼져 있던 핸드폰이 켜진 것이었다.
# 바쁜 모양이네. 나중에 전화하자.
“예. 아가씨. 돌아와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유하랑이 대원들에게 고갯짓했다.
장비와 복장을 챙긴 유하랑이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미끼를 문 물고기를 낚으러 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