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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왕이 헌터로 회귀했다-455화 (455/473)

455화. 새로운 전장으로

진시황이 떠나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어느 동떨어져 있는 고산 지형의 한가운데.

거대한 입구에서 나온 항우가 한숨을 내쉬며 땀을 닦았다.

“거의 다 됐군.”

뒤를 돌아본 항우가 미소를 그렸다.

정면엔 아주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진시황릉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진시황이 떠난 후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이에게 요청하여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사이 자리를 이어받았던 이는 늙어 죽고 진나라 역시 무너지고 말았다.

‘나라는 멸망하였는데 무덤이나 만들고 있다니. 황제께서 알게 되면 뭐라 하실지 겁나는군.’

항우의 얼굴로 씁쓸한 빛이 번졌다.

자리를 이어받은 진시황이 죽은 이후.

진나라는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했었다.

동시에 각지에서 군사가 일어났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거대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항우 역시 진나라를 지키기 위해 진시황릉에서 나와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었다.

그러던 중 진나라의 멸망을 전해 들으며 싸움을 멈췄었고 말이다.

‘황제시여. 절 용서하십시오.’

눈을 감은 항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전투 중 진나라의 멸망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항우는 비통해하거나 울부짖지 않았었다.

오래전부터 내부가 썩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진나라는 더 이상 자신이 사랑하던 진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용히 전장을 떠나 진시황릉으로 돌아왔었다.

당시 몇 번이고 맞부딪혔던 유방과 한신 역시 떠나는 항우를 붙잡지 않았었다.

그들은 항우가 다시는 전장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진시황릉을 건들지 않는다고 약속했었다.

“오늘 일은 다 끝나신 겁니까?”

들려오는 목소리에 항우가 고개를 돌렸다.

삭막한 무덤에 어울리지 않는 긴 생머리와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사마천.”

사마천은 어느 날 갑자기 항우의 앞에 나타났었다.

빈 페이지가 가득한 두툼한 책과 붓 하나를 든 채였다.

사마천은 항우의 앞에서도 전혀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유방이나 한신 등 영웅호걸이라 불렸던 이들조차 항우 앞에선 기가 눌리기 마련이었는데 말이다.

어쨌든 첫 만남 때 사마천은 맑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자라고.

“넌 오늘도 예전과 그대로인 모습이구나.”

항우가 사마천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둘이 만난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마천은 항우와 마찬가지로 늙지 않고 있었다.

“글쎄요. 그렇게 보이도록 속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죠.”

장난스러운 사마천의 말투에 항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존댓말이 필요한 나이라면 빨리 말해라. 날 예의 없는 자로 만들지 말고.”

“농담입니다. 항우 님과 만날 때는 항상 진짜 제 모습이니까요.”

지금까지 수많은 얼굴과 이름으로 존재하며 역사를 기록해온 사마천.

어느 순간부터 사마천은 떠나지 않고 항우의 곁에 머무르고 있었다.

누구보다 강한 무력을 가졌지만 오래전에 모셨던 이를 위하여 산속에서 무덤을 만드는 영웅이라니.

항우는 사마천이 잠시도 기록을 멈추지 못하게 만드는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어젯밤. 유방에 의한 새로운 통일 왕조가 만들어졌습니다. 한신과 장량이 그 곁을 지켰고요.”

“나라의 이름은 무엇이냐?”

“한나라입니다.”

“그런가. 결국 그렇게 되었군.”

고개를 끄덕이던 항우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저들은 한나라의 군사겠군.”

“!?”

사마천이 놀란 얼굴로 항우의 눈을 따라갔다.

저 멀리서 엄청난 양의 흙먼지가 일고 있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선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진시황릉과 항우 님은 건들지 않기로 협정을…!”

“말장난이었을 뿐이다.”

항우가 조용히 다가오는 군대를 바라봤다.

애초에 알고 있었다.

저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란 사실쯤은 말이다.

그럼에도 믿는 척하며 무덤으로 돌아왔었다.

진나라가 멸망한 이상 고집을 부리며 전투를 이어 가는 건 무의미했다.

무의미한 전투 대신 진시황을 기리기 위한 작은 무덤을 완성하고 싶었다.

“떠나라. 사마천. 이제 곧 피바다가 될 거다.”

“알면서도 어째서 떠나지 않으신 겁니까?”

“이곳은 내가 지켜야 하는 유일한 장소다.”

잠시 망설이던 사마천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돌아올 이도… 없는 무덤입니다.”

“네 말대로다. 이 무덤에 묻힐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지만, 그 사람은 돌아올 수 없다. 하지만.”

항우가 옆에 있던 초천검을 집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격이 없는 자가 이곳에 들어와도 되는 건 아니다.”

고개를 내린 사마천이 항우의 손을 바라봤다.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초천검을 집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몸이 무너진 것이었다.

사마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항우가 지금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위해 진시황릉을 버리고 떠났으면 했지만.

전혀 움츠러듦 없이 밝게 웃고 있는 저 얼굴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항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곳을 떠나지 않을 거란 확신이었다.

“주인 없는 무덤을 지키기 위해 죽는다니.”

“바보 같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그렇게 적도록 해라. 넌 사실만을 적어야 하는 자니까.”

잠시 항우를 바라보던 사마천이 떠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세간에선 그런 사람을 바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더 잘 어울리는 단어가 있습니다.”

“잘 어울리는 단어?”

한차례 고개를 끄덕인 사마천이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낭만이라고 부릅니다.”

“낭만이라.”

한 번 읊조린 항우가 밝게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 단어다.”

죽음 직전까지도 저렇게 웃을 수 있다니.

슬픈 미소를 지은 사마천이 항우를 조용히 바라보다.

“영웅이시여. 그럼 안녕히.”

하고 싶은 수많은 말을 집어삼키며 간단한 인사를 남긴 뒤 진시황릉을 떠났다.

웃으며 사마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항우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당도한 대군을 응시했다.

“그대는 유방이 아닌가. 새로운 왕조를 세워 한참 바쁠 텐데 이런 누추한 곳까진 어쩐 일로?”

군대를 멈춘 유방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어찌 등 뒤에 진나라의 망령을 남겨둘 수 있겠느냐. 그대를 죽여야만 내 왕조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유방이 항우 너머에 있는 진시황릉을 바라봤다.

“참으로 멋진 무덤이지 않은가? 새로운 왕조를 세운 내게 정말 잘 어울리는 곳이다.”

한동안 진시황릉을 살피며 눈을 반짝인 유방이 말을 이었다.

“항우여. 무덤과 진시황이란 이름은 이곳에 두고 떠나거라. 그렇다면 내 그 정성을 봐서라도 병든 호랑이 한 마리 정도는 살려주도록 할 테니.”

유방의 제안에 항우가 조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말세긴 말세구나. 너 따위가 새로운 황제라니.”

“뭐?”

“온갖 야비한 짓으로 진나라를 내부부터 썩게 만들었던 자여.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수많은 이를 이간질시켜 분열하게 만든 자여. 약하고 죄 없는 이를 핍박하고 약탈하며 따르게 한 자여. 세상은 이런 방식으로 황제 자리에 오른 너를 영원히 인정하지 않을 거다.”

“전장에서 꼬리를 말고 도망친 자가 할 말인가?”

“나와 싸우는 것이 무서워 거짓 협정으로 통일까지의 시간을 번 자가 할 말인가?”

“…!!”

놀라는 유방에 항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다 알고 있지만 그저 이해관계가 일치해 순순히 응해 준 것뿐이었다.

유방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

“대화는 여기까지구나.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다. 널 죽이고 전부 가져갈 뿐이다.”

천천히 손을 올리자 대기 중이던 군대가 무기를 들며 항우를 노려봤다.

모두가 긴장한 채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병사라면 적어도 한 번씩은 봤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기개로 적을 움츠러들게 하고 말도 안 되는 힘으로 산과 함께 적을 부숴버리는 괴물의 모습을 말이다.

“이만 죽어라. 과거 왕조의 망령이여.”

올려졌던 유방의 손이 내려지고.

“와아아아아아아!”

군대가 커다란 함성과 함께 앞으로 쏘아졌다.

꽤 높은 지대에서 내려보고 있음에도 끝이 안 보이는 엄청난 숫자였다.

그런 대군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항우의 얼굴에서 두려움이나 망설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너라.”

대신 그의 얼굴엔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에 밝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망령과 함께 마지막 칼춤을 춰보자꾸나.”

초천검을 든 항우가 군대를 향해 쏘아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이 끝이 났다.

* * *

기억이 끝나며 펼쳐진 곳은 어느 산속이었다.

연못 흐르는 소리와 새의 지저귐, 바람에 의한 나무의 흔들림만이 존재하는 고요한 장소.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장량이었구나.

시안 그룹 회장의 정체였다.

죽지 않고 살아왔다는 걸 알곤 당연히 유방일 거라 생각했는데 약간 의외였다.

거기다 린샤오 님이 사마천요?

“으.”

지끈거려 오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개방 시대 전부터 늙지 않았던 이는 적지 않게 봐왔었다.

하지만 동시대에 이렇게 많이 있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내가 모르고 있는 존재가 훨씬 많긴 하겠지만 말이다.

“평화롭지 않은가?”

“!?”

귀를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보면서도 느끼긴 했지만 정말이지 설명하기 힘든 힘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이런 걸 기개라고 부르는 건가.

고개를 돌리자 항우가 여전히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며 연못 근처에 앉아 있었다.

지금까지 봤던 갑옷 차림과는 달리 항우는 폭이 넓은 일상복을 입고 있었다.

이런 배경에 저렇게 앉아 있으니 덩치 좋은 신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평화로운 순간이자 장소다. 그러니 이곳에서 그렇게 머리 움켜쥐지 말고 와서 앉아라.”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힘차게 인사를 박은 후.

항우의 옆으로 스리슬쩍 다가가 몸을 앉혔다.

항우는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진시황의 기운을 느낀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날 발견한 곳의 무덤은 지금 무엇이라 불리고 있지?”

“진시황릉입니다.”

항우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미소를 그렸다.

“사마천 그 녀석이 끝까지 지켜 준 모양이군.”

약간 의아하긴 했었다.

견갑의 공명에서 본대로 항우는 결국 진시황릉 안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다.

산을 무너뜨려 그 누구도 파헤칠 수 없게끔 무덤을 봉인하긴 했지만, 바깥에서 살아남은 유방이 어떻게든 진시황릉의 이름을 바꿀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바꾸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구나.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과거의 사마천, 즉 지금의 린샤오가 어떻게든 손을 썼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전장의 냄새가 나와 비슷할 정도로 짙구나.”

묘한 말을 한 항우의 손엔 어느새 초천검이 들려있었다.

항우의 덩치에 어울리는 커다란 검이었다.

좌우 대칭이 완벽한 검으로 어떻게 보면 투박하게 보이기도 했다.

“엄청난 무게를 가져 자격이 없으면 들 수조차 없는 검이지.”

항우가 가볍게 초천검을 휘둘렀다.

콰가가각!!

검에 닿은 산봉우리 하나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났다.

무언가 기술을 사용한 건 아니었다.

그저 초천검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중량을 머금고 있었다.

날 바라보던 항우가 밝게 웃으며 초천검을 내밀었다.

“전장에서 살아온, 그리고 살아갈 네겐 자격이 있다.”

검을 잠시 쳐다보다 항우와 평화롭고 고요한 주변 경관을 번갈아 보았다.

“방금 말씀하셨다시피 전 앞으로 수많은 싸움을 해나가야 합니다. 저와 함께 가시면 이런 평화로움과는 다시 작별일 테고요. 괜찮으신 건가요?”

물어보면서도 심장이 약간 쪼이는 기분이 들었다.

만약 괜찮지 않다고 하면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빈손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방금 초천검으로 직접 부수지 않았느냐.”

벙찐 얼굴로 쳐다보자 항우가 말을 이었다.

“안 그래도 싸우지 못해 몸이 근질거리던 참이었다. 이젠 나가서.”

항우의 얼굴로 주체할 수 없는 즐거움이 깃들었다.

“다시 싸우고 싶구나.”

그런 항우를 보며 나 역시 얼굴 한가득 미소를 그리며.

“좋습니다!”

내밀어진 초천검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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