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9화. 탈취
비행기에서 내리며 기지개를 켰다.
중국에서 못해도 한 달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출발 전엔 예상하지 못한 엔딩으로 생각보다 빨리 끝이 나고 말았다.
뭔가 일하고 왔다기보단 짧은 해외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기지개 그만 켜고 빨리 내려와.”
걸어오는 은갈치 정장에 묘한 데자뷰가 느껴졌다.
분명 얼마 전에도 비슷한 장면을 봤던 거 같은데.
여기에 순대국밥과 수육까지 먹으면 더 완벽한 데자뷰가 완성될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비광 님.”
“새삼스럽게 인사는. 오늘은 나밖에 없다.”
비광이 턱짓으로 빨간색 스포츠카를 가리켰다.
세단 무리 속에 뜬금없이 웬 스포츠카가 섞여 있나 했더니 비광의 차였다.
“비광 님 오늘도….”
“순대국밥 안 먹을 거야. 지금 바로 헌터청 가야 하거든.”
시무룩한 얼굴로 조수석으로 올라탔다.
“어! 백운 님! 안녕히 가세요!”
“또 봐요! 백운 님!”
손을 흔드는 대산 사람들에 나도 팔을 휙휙 크게 저어주었다.
“조심히 가세요! 또 놀러 갈게요!”
“쟤는 뭐, 뭐야. 그림자랑 왜 따로 놀아.”
대산 쪽을 바라보던 비광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우미희를 쳐다봤다.
별생각 없이 보고 있다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그림자에 인격이 존재한다고 하더라고요. 좀 무서운 그림자예요. 광기가 장난이 아니야.”
“쟤도 이상한 능력 개방해서 힘들겠네. 맨날 시달릴 거 같은데.”
“그거라면 잘못 보셨습니다. 쟤도 보통이 아니에요. 찰떡궁합이랄까요.”
“그래?”
턱을 문지르던 비광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세상엔 참 별의별 능력자가 많다는 말과 함께였다.
“출발한다. 꽉 잡아.”
안전벨트를 메기도 전.
비광의 차에서 부아아아아앙! 하는 엄청난 배기음이 들려왔다.
“어어…!”
소리만 들었을 땐 거의 날아가려는 것 같았다.
강태황 장관에 이어 또 한 번 멀미 지옥이 펼쳐지는 건가 쫄리는 순간이었다.
두 손으로 손잡이를 꼬옥 붙잡고 닥쳐올 멀미에 대비했다.
스르르륵.
그리고 미끄러지는 차에 눈을 찡그린 채 비광을 쳐다봤다.
“뭐죠?”
“뭐가?”
“왜 스르륵 부드럽게 미끄러져 가요. 차가.”
“부드럽게 가면 좋은 거 아니야?”
“아니 아까는 부아아아앙! 하면서 날아갈 것처럼 하더니 좀 안 맞는 거 같아서요.”
“스포츠카잖아. 사람들이 보고 있고. 서비스 차원에서 이런 소리는 내주는 게 맞는 거야. 네가 뭘 알겠냐.”
“모, 모르긴 하죠.”
가드 불가능한 말로 맞받아치는 비광에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허세는 가득하나 성격에 안 어울리게 운전만큼은 평화로운 비광이었다.
“이거나 봐.”
뒷좌석에서 무언가 뒤적거린 비광이 서류 몇 장을 건넸다.
옥시나의 신변 인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이라 안 될 줄 알았는데. 역시 헌터청의 파워는 엄청나군요.”
“영감님이 힘 좀 썼을 걸. 원래는 정부에서 안 된다고 게거품을 물었었거든. 그걸 영감님이 직접 청와대까지 가서 말로 뭉개놓은 거지. 애초에 옥시나 넘겨줄 때도 헌터청에 우선권이 있다고 분명히 말했었고 러시아에서 잡아온 것도 헌터청이다. 정부에서 이런 식으로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앞으로 헌터청에 요청하는 모든 사안을 하나하나 면밀히 검토할 거다! 라고 했대.”
“협박하셨군요.”
“협박이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는 곳이 헌터청이니까. 그만큼 정부가 제일 많이 찾는 기관이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바로 깨갱하면서 놔줬다네.”
세간에선 대통령보다 강태황의 입김이 더 센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정작 강태황 본인은 그란 권력에 대해 별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긴 하네요. 단순한 힘 겨루기였을 수도 있지만. 정부에서 왜 그렇게까지 옥시나의 신변을 안 넘기려고 했을까요? 미리 말해둔 게 있으니 헌터청에서 반발할 게 분명했을 텐데요.”
“영감님도 이상하다고 말씀하시긴 했지. 평소답지 않게 고집부린다고.”
“이거 이거.”
팔짱을 낀 채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정부가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진 않았을 터.
묘한 구린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뭐 결과적으론 넘겨받았으니 이제 러시아에 던져주고 오면 끝이지만 말이다.
띠리리리리.
울리는 전화벨에 비광이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그렇게 전화를 받고 잠시 후.
끼이이이익!
“갸아악!”
비광이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멈춰 세웠다.
“비, 비광 님?!”
조수석 박스에 처박힌 이마를 문지르며 옆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려 했지만 일단 입을 다물었다.
통화 중인 비광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다. 바로 현장으로 갈 테니까 끊어.”
통화를 마친 비광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날 돌아봤다.
“습격당했다는데.”
“네? 무슨 습격요? 설마…?”
고개를 끄덕인 비광이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옥시나 잃어버렸대.”
“허어.”
“일단 가보자. 무슨 일인지.”
이제 휙 가서 옥시나만 러시아에 던져주면 끝나겠지 싶었는데.
아무래도 일이 쉽게 풀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차를 돌린 비광이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 * *
차에서 내리며 현장을 둘러봤다.
현장의 첫인상은 뭐랄까.
난장판 혹은 아수라장이란 표현이 잘 어울리는 상태였다.
보통 습격이 아니었는지 곳곳에 움푹 패고 폭발한 흔적이 가득했으며 아직까지도 짙은 화약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오셨어요. 비광 선배.”
현장을 지휘 중이던 헌터, 류슬아가 다가왔다.
비광을 잘 따르는 3급 헌터로 오며 가며 종종 마주치곤 했었다.
내게도 고개를 꾸벅인 류슬아가 현장을 바라보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10키로 떨어진 지점에서 저희가 옥시나를 인계받기로 했었어요. 그때까지는 정부가 호송 작전을 맡았고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연락이 안 되길래 직접 와봤더니 이 꼴이 나 있었어요.”
“너네 있던 곳에선 아무것도 안 들렸어? 이 정도 흔적이면 폭발이 꽤 컸을 거 같은데.”
“그게 좀 이상해요. 저흰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했거든요. 딴짓을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신경질적으로 갈색 머리를 아무렇게나 넘긴 류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볼 때마다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오늘은 머리끈을 깜빡한 모양이었다.
“관련된 능력자가 있을 수도 있지. 정부 호송대 중에서 살아남은 건?”
“호송대 인원은 총 열 명이었어요. 살아남은 건 세 명이고요. 이야기는 좀 들어봤는데 도움될 만한 게 딱히 없어요. 갑자기 미사일이 날아와 차를 날렸고, 그다음엔 두건을 쓴 능력자들이 급습해서 옥시나를 빼갔다는 게 전부예요. 여기저기서 폭발이 일어나고 공격이 쏟아져서 무언가 살필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요.”
“쯧.”
혀를 차며 주위를 둘러보는 비광.
비광을 따라 나도 천천히 주변 지형을 살펴보았다.
인적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후미진 산골이었다.
우연히 적이 수송 차량을 발견하고 덮쳤을 리는 없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을까요?”
“일단 옥시나를 놓친 건 정부지만 이번 호송 작전에 관련된 정보는 헌터청도 알고 있었어.”
비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당장 어느 쪽에서 정보가 새나갔는지부터 갑론을박이 이어질 게 분명했다.
“죄송해요. 선배. 제가 너무 방심했어요. 한국이기도 하고 정부랑 헌터청의 일대일 호송이라 마음 놓고 있었어요.”
“아니야. 우리가 데리러 간다고 했는데도 굳이 호송하겠다고 고집부린 건 저쪽이니까.”
“구리네요. 구려.”
턱을 슥슥 문지르며 멀리서 치료 중인 세 명의 정부 요원을 바라봤다.
호송 작전은 양쪽이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여러 정황을 놓고 봤을 땐 정부 쪽이 몹시 의심스러웠다.
직접 데려가겠다는데도 굳이 호송 작전이란 귀찮은 걸 준비한 것이었다.
강태황과 헌터청에게 옥시나를 뺏겨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상태였을 테고 말이다.
“제가 가서 좀 보고 올게요. 비광 님은 너무 유명 인사니까요.”
정부 요원들이 치료받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좀 괜찮으세요?”
“아 예… 괜찮습니다.”
명찰엔 김영권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까 문서에서 본 바로 이번 호송 작전의 책임자이기도 했다.
다른 차량으로 고개를 돌리니 천이 덮인 시체들이 보였다.
아마 이번 습격으로 목숨을 잃은 요원들 같았다.
“다 저 때문입니다. 제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
김영권이 얼굴을 파묻고 몸을 들썩였다.
다행스럽게도 살아남은 세 명의 부상은 그리 크지 않은 듯했다.
여기저기서 피가 흐르긴 했지만 가볍게 스치거나 깔끔하게 관통된 상처였다.
김영권, 하일주, 은성아.
살아남은 세 명의 명찰을 확인하니 살짝 의아함이 들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이번 호송 작전에서 가장 높은 경력을 가진 세 명이 살아남은 것이었다.
나머지 죽은 인원은 아까 확인했을 때 대부분이 신입 요원이었다.
“옥시나 자체도 직접적인 전투 능력을 가지진 않았다 보니 신입들 경험도 쌓아 줄 겸 선발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녀석들의 유가족을 볼 면목이 없습니다.”
김영권의 말에 나머지 두 명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얼른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조용히 인사를 건네고 빙글 몸을 돌렸다.
지금 무언가를 더 알아내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백운!”
천천히 걸어가고 있을 때 비광이 빨리 오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도착하자마자 날 데리고 어딘가로 향하는 비광과 류슬아.
어느 정도 무리와 멀어진 후 앞서가던 비광이 입을 열었다.
“산 아래에서 시체가 발견됐대.”
“네? 설마…?”
“그 설마다. 옥시나의 시체로 보인다는구만.”
머리가 약간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걸어 도착한 곳엔 미리 와있던 헌터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옆으론 새카맣게 타버린 시체가 함께였고 말이다.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어 뒤지다가 발견했습니다. 인상착의는 정부가 보내온 옥시나와 일치합니다.”
혀를 차며 시체를 확인했다.
대부분 타버리긴 했지만 몇 가닥 안 남은 머리카락이나 체형으로 봤을 땐 옥시나와 몹시 비슷해 보였다.
“일단 옮겨서 진짜 옥시나인지 확인해 봐. 정부로 넘어갈 때 치아나 지문 같은 거 기록한 게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류슬아와 헌터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후.
비광이 날 돌아봤다.
“이거 옥시나면 어떻게 할 거야?”
“음. 사실 어떻게 하고 자시고 할 게 없긴 해요. 애초에 옥시나를 돌려보내려던 건 배신자로 낙인찍힌 상태로 러시아에 가서 지옥 좀 맛봐라 하는 이유였으니까요.”
고통 없는 죽음은 축복이라고.
이렇게 쉽게 죽기엔 너무 나쁜 년이긴 했지만, 이미 죽어버렸다면 내가 어찌할 도리는 없었다.
“죽은 거까진 오케이. 괜찮아요. 더 문제될 것도 없고요.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뜨며 아까 대원들이 있던 방향을 돌아봤다.
“만약 살아 있다면 그건 문제예요.”
러시아의 비밀 연구소장이었던 옥시나.
누군가 옥시나를 빼돌렸다면 이유는 명확했다.
그 머릿속에 든 걸로 무언가를 하려는 것이었다.
옥시나가 주도한 실험의 시작이자 결과물인 액체 데몬을 내가 죽여버린 탓에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결과를 기다려보죠. 살아 있으면.”
작은 한숨과 함께 입가로 미소를 그렸다.
“후회하게 해줘야죠. 기회가 있을 때 빨리 죽을 걸,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