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옥시나 던지기
“알겠다. 일단 병원으로 갈게.”
전화를 끊은 비광이 옷에 튄 피를 툭툭 털어냈다.
예상치 못한 데몬까지 출몰해 생각보다 처리가 오래 걸리고 말았다.
“고생하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비광 님!”
함께 싸운 헌터들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비광이 등장했을 때부터 싸움이 끝난 지금까지도 헌터들의 눈은 계속 반짝이고 있었다.
헌터계의 전설 중 한 명인 비광과 함께 싸운다는 건 몹시 영광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헌터들에게 비광이 손을 휘휘 흔들어 주었다.
“죽지 말고 나중에 또 보자고.”
“예! 감사합니다!”
우렁찬 인사 소리에 비광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운한테도 이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말이야.’
물론 눈 하나 깜짝 안 할 가능성이 컸다.
백운의 건방짐은 10급 헌터일 때부터 꾸준했으니까.
‘얘는 허구한 날 다 부수고 다니냐.’
비광이 지끈거리는 느낌에 이마를 짚었다.
방금 걸려온 건 병원에 있던 류슬아였다.
백운이 와서 정부 요원 세 명을 나란히 벽에 박아놓고 떠났다는 것이었다.
금이 간 걸 보니 통째로 갈아줘야 할 것 같고 말이다.
‘그래도 용케 안 죽이고 살려놨네. 캐물을게 많다는 걸 알아서겠지.’
어떻게 보면 무대뽀스럽지만 백운의 움직임엔 항상 디테일이 담겨있었다.
당장 옥시나만 봐도 그랬다.
평소의 백운이라면 당장 죽이고도 남았을 텐데 과거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살려 돌아왔었다.
‘그나저나 병원에서 어디로 갔으려나. 뭔가 알아낸 거 같은데.’
잠시 멈춰선 비광이 주머니에서 막대 사탕을 꺼냈다.
열심히 싸웠더니 당이 떨어지고 있었다.
한창 껍데기를 벗기고 있을 때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이거 무기왕 아니야?”
“무기왕이 왜 저기에 있어?”
“어어어! 지금 뭘 드는 거야!”
모두가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무언가 중계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탕을 문 비광이 스리슬쩍 사람들 옆으로 다가갔다.
툭.
화면이 눈에 들어오기 무섭게.
비광이 물고 있던 사탕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백운에게 디테일이 있다고 했던 건 지금 이 시간부로 취소였다.
‘이 미, 미친….’
한강대로 한복판.
트레이드 마크인 날개를 꺼낸 백운이 대놓고 차량 한 대를 납치하고 있었다.
* * *
납치한 차를 들고 도로변에선 벗어나 한강 한가운데로 이동했다.
그리고 하늘 위를 향해 열심히 날갯짓을 했다.
차가 덜컹거리는 걸 보니 안에서 난리가 난 거 같긴 한데.
딱히 이렇다 할 액션을 취하고 있진 않았다.
충분한 높이까지 올라간 후 주먹을 휘둘러 앞과 뒤의 창문을 부숴냈다.
“안녕. 옥시나. 다시는 안 만날 줄 알았지?”
“무, 무기왕!!”
“넌 좀 기다려봐. 거기 운전하는 새끼. 너 뭐 하는 새끼냐?”
앞좌석엔 검은 정장을 쫙 빼입고 선글라스를 쓴 놈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좀 벗지 그래? 한밤중인데 뭐 보이긴 하냐. 그래 가지고.”
“무기왕. 이 차 내려놔라.”
“뭐?”
잘못 들은 거 같아 창문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안 늦었으니 우릴 못 본 척하고 차량을 내려놔라. 그럼 너나 헌터청에도 별일 없을 테니까.”
“이거 미친놈이네.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냐?”
“너와 헌터청을 벼르고 있는 분들이 계시다. 망나니짓도 적당히 해야 용서가 되는 거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놓으라 했지.”
“지금 무슨….”
놈이 뭔가 더 말하기 전에 그대로 차를 놔버렸다.
빠르게 한강으로 추락하는 차량.
차 안에서 옥시나와 선글라스의 거친 비명이 들려왔다.
선글라스가 어떤 능력을 개방했는지는 몰라도 추락에서 살아남진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느 정도 떨어졌을 때쯤 연기를 터뜨려 아래로 향했다.
떨어지던 차를 붙잡자 안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 새끼가! 당장 안 그만둬!”
“어허.”
차를 한강에 퐁당 담갔다가 1분이 지났을 쯤 끄집어냈다.
“허억! 허억! 이 개자….”
퐁당. 퐁당. 퐁당. 퐁당.
그렇게 몇 번 반복하자 안에선 더 이상 욕이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거친 숨소리와 기침 소리만이 들려왔다.
물을 많이 삼킨 건지 두 사람은 열심히 콜록대는 중이었다.
“시원하지? 또 들어가고 싶으면 말해. 바로 담가 줄게. 이제 말할 준비 된 거지?”
한동안 대답이 없는 남자에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남자는 귀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너 누구랑 통화하냐?”
그대로 손을 넣어 끄집어내려는 순간.
까득!
무언가 깨무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의 입에서 거품이 솟구쳤다.
쓴웃음을 지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사실 네가 차를 놔줬든 그러지 않았든 달라지는 건 없다. 너와 헌터청은 결국 몰락할 운명이니까. 그 순간을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으마.”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고개가 고꾸라졌다.
미리 입안에 무언가를 넣어놨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 바로 자결할 수 있게끔 말이다.
이 새끼들 봐라.
남자가 자기 의지로 깨문 게 아니었다.
누군가 자결을 지시한 것이었다.
내게서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아.”
한숨을 쉬며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에 있던 동아줄이 죽어버린 탓인지 옥시나는 사시나무 떨듯 벌벌거리고 있었다.
“어쩌냐 이제. 너 살려 줄만 한 사람이 안 남은 거 같은데.”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나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세상에 수많은 미친 것들이 존재한다지만 얘는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때문에 국가로부터 버림까지 받았어! 이 정도면 충분히 했잖아. 이 새끼야!”
“러시아랑 한국이랑 충분이랑 단어 사용처가 다른가?”
창문으로 손을 넣어 옥시나를 끄집어냈다.
“야 이 병신아. 잘 들어.”
옥시나에 눈을 마주치고 말을 이었다.
“너한텐 무슨 짓을 해도 부족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그러니까 혹시나 내가 널 봐주거나 할 거란 생각은 하지 마.”
“나, 날 어떻게 하려는 거야?”
“러시아에 던질 거야.”
찡그려졌던 옥시나의 눈이 커졌다.
확실히 옥시나에겐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이었다.
“잘 생각해! 내가 한 짓은 과거 일일 뿐이야! 내가 도왔을 때 네 조국이 얻게 될 걸 생각하라고!”
“또 주댕이 터네. 너 쥐뿔도 안 남았잖아. 넌 모르겠지만 대산에서 널 평가했거든. 위험 평가지만 대충 얼마나 가치가 있나 평가한 건데 네 등급 뭐 나왔게?”
지딴엔 또 궁금한지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날 쳐다보는 옥시나.
“A,B,C,D,E,F의 F등급이다. 이 새끼야.”
“뭐…?!”
“정부에서 호송해주고 누가 데려가 주려 하니까 크게 착각하는 모양인데. 넌 지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개똥만도 못한 존재야.”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옥시나의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엿 드시고 함부로 주댕이 털지 마. 입 한 번만 더 열면 진짜 바닥 한가운데서 상어 밥으로 던져 줄 거니까. 아 맞다. 일단 한 대 치긴 해야겠다. 러시아 도착할 때까진 자고 있어라 좀.”
“자, 잠….”
빠악!
옥시나의 목으로 당수 한 방을 갈겼다.
“어!”
순간 너무 세게 때렸나 싶어 옥시나의 코앞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숨은 잘 붙어있었다.
그런 옥시나의 머리채를 잡고 러시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제 옥시나에게서 들어야 할 건 다 들었으니 누가 가로챌 기회따윈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옥시나와의 악연은 여기서 마무리였다.
* * *
한국과 가장 가까운 블라디보스톡 공항.
한강에서 출발하며 여기저기에 전화를 돌렸었다.
가장 먼저 직속 상관인 강태황에게 옥시나를 러시아로 바로 데려가도 되는지 물었었다.
강태황은 원래 그렇게 할 예정이었으니 문제없다고 말해줬고 말이다.
그 다음엔 시라크였다.
옥시나만 던지기 하고 오면 끝나는 일.
괜히 러시아와 마찰을 일으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 문제 없어. 준비해놓을게.
역시나 시라크도 쿨하게 승낙했었다.
거리 때문에 직접 오진 못하지만 제일 적합한 사람들로 보내주겠다 말했었다.
누구려나. 적합한 사람이라니.
블라디보스톡 공항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을 때쯤.
활주로 근처에서 야광봉을 흔드는 게 보였다.
시라크가 준비해놓은 인원들인 것 같았다.
안내를 받아 착륙하니 건너편으로 여러 대의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꽤 지위가 높아 보이는 러시아인들도 한가득이었고 말이다.
아직까지 기절해 있는 옥시나를 질질 끌고 가자 무리에서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이 앞으로 나왔다.
“진짜 오다니.”
노인의 얼굴로 난처한 미소가 그려졌다.
시라크에게 듣긴 했지만 진짜 이렇게 데려올 거라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으….”
마침 옥시나도 깨어난 것 같았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옥시나.
옥시나의 눈이 앞에 나와 있는 노인에게서 멈췄다.
“으아…!”
옥시나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갔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엉덩방아를 찧은 옥시나는 노인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뒤로 기어가고 있었다.
“무, 무기왕! 날 여기서 당장 내보내 줘! 시키는 건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 뭐든지 다!!”
“추하구나. 옥시나 연구소장.”
“입 닥쳐! 애초에 너네가 시켜서 한 일이잖아!”
가장 적합한 사람들을 보내겠다더니.
옥시나가 한국에서 빠짐없이 실토했던 러시아 흑막인 듯했다.
흑막이라곤 하기엔 너무 대놓고 나와 있지만 어쨌든.
한국 정부에선 옥시나의 증언을 토대로 러시아에 책임을 물었으나 러시아는 현재 모르쇠로 일관 중이었다.
시라크는 놈들을 잡고자 밑에서부터 하나하나 박살내며 올라가는 중이었고 말이다.
“데려와라.”
노인의 말에 늘어서 있던 요원들이 내 쪽으로 걸어왔다.
“아니야. 내가 갈게.”
“제발!! 무기왕! 이렇게 빌 테니까 날 놓고 가지 마! 제발! 뭐든지 다하겠다고 했잖아!”
건방졌던 옥시나는 온데간데없었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옥시나.
“뭘 해 이 병신아. 할 줄 아는 거 하나도 없으면서.”
그러든가 말든가 옥시나를 질질 끌고 가 내게 다가온 러시아 요원들에게 휙 던졌다.
그 와중에도 안 가려고 발버둥치는 옥시나를 요원 두 명이 양쪽에서 붙잡아 세웠다.
“가면은 끝까지 벗지 않는 건가.”
옥시나를 던지고 잠시 쳐다보다.
내게 말을 건넨 노인에게 걸음을 옮겼다.
“멈춰라.”
요원들이 막아서려 하자 노인이 고개를 흔들었다.
길을 튼 요원들에 멈추지 않고 노인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당신도 이제 곧 사라질 예정 아닌가?”
“하! 검은 뱀 한 마리가 기어 올라오고 있긴 하지. 내 목을 물려고.”
“엄청 큰 뱀이던데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니야?”
노인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순진하군. 내가 그리 쉽게 당할 거라 생각하는가? 난 러시아의 역사와 함께해 온 사람이다. 고작 뱀 한 마리에 무너질 리가 없지. 무슨 일이 벌어지든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아마 나일 거다.”
“그래? 아마 그냥 물리는 게 나을 텐데.”
“뭐?”
“내가 지금 널 안 죽이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힘이 부족해서? 국가적 분쟁이 두려워서? 둘 다 아니야. 그저 검은 뱀이 널 향해 가고 있으니 내버려 두는 것뿐이야. 난 검은 뱀을 존중하니까. 그런데 만약 네가 야비한 수를 써서 물리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자세를 숙여 노인의 눈동자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 만나게 될 거야. 그리고 네가 조금 전에 말한 가면, 그때는 벗어 줄게.”
가면 안에서 미소를 그렸다.
“당사자인데 봐야 할 거 아니야. 뒤져 가는 널 보며 머금어지는 비웃음을. 안 그래? 그러니까.”
손을 뻗어 노인의 목을 톡톡 두드려주었다.
“미리미리 곱게 죽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