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화
다시는 대학원에 가지 않겠다.
이제는 나를 위해 살겠다!
...힘들었던 대학원을 졸업하며 한국인 이한은 그렇게 다짐했다.
‘학’자 들어가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그러나 세상일은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한이 불운한 사고로 죽은 뒤 다시 태어난 곳이 하필이면 다른 세계의 마법사 가문인 워다나즈 가문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15년.
오늘은 이한이 제국 최고의 마법학교인 에인로가드에 입학하는 날이었다.
* * *
워다나즈 가문에 다시 태어난 이한.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 다음에는 신기해했고, 그 다음에는 받아들였다.
다행히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에서도 매우 권세 있는 마법사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한의 아버지인 가문의 가주는 황제와도 친분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고, 가문의 저택은 누가 봐도 부유함 그 자체였다.
이쯤 되면 이한도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생에 대학원을 다녀서 보상을 받는 건가?
아무런 고생 하지 않아도 평생 편안하게 놀고먹을 수 있는 삶.
...은 물론 착각이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이한 워다나즈.
-예. 가주님.
-너는 무엇을 목표로 하는가?
-......
‘평생 놀고먹는 삶이라고 대답해도 되나?’
이한은 살짝 고민했다.
이게 별로 좋은 대답 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괜한 질문을 했는가? 하긴, 답은 정해져 있겠지.
-예?
-너도 스스로 네 재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예?
-워다나즈 가문의 규칙은 너도 알고 있겠지. 첫째가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 받는다.
-예?????
마지막 말은 좀 많이 충격적이었다.
모든 것을 이어 받는다고?
그러면 둘째 이하는 한 푼도 받지 못하는 것인가??
-가주님. 저는 그러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다. 이한 워다나즈.
‘다행이군.’
-가문은 네게 모든 기회를 줄 것이다. 네가 기사가 되고 싶다면 최고의 기사를 구해다 줄 것이고, 네가 관료가 되고 싶다면 제국의 재상에게 배울 기회를 줄 것이다. 상인이 되고 싶다면 제국 최고의 상단주 밑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지. 네가 가문 안에 있는 동안, 원하는 모든 기회를 주겠다!
‘...그냥 그걸 돈으로 주시면 안 됩니까?’
지금 말한 것만 돈으로 환산해도 어마어마한 가치가 나올 텐데...
가문의 규칙은 매우 불합리했다.
‘젠장. 좀 더 먼저 태어났으면 날로 먹고 살 수 있었을 텐데.’
이한은 가문의 셋째로 태어난 자신의 게으름을 후회했다.
가문의 모든 것을 이어 받는 것은 첫째.
그 이하는 알아서 자기 자신이 먹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덕분에 이한은 어린 나이부터 무엇을 해야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지 깊게 고민해야 했다.
관료, 상인, 기사, 모험가...
그나마 다행인 건 가문에서 재산만 물려주지 않을 뿐 지원은 다 해준다는 점이었다.
가주의 자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배우고 얻을 기회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이한이 진로로 고른 건 마법사였다.
-그럴 줄 알았다.
이한의 아버지, 가주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네 재능을 너도 느끼고 있었겠지?
-...??
‘마법사가 가장 안정적이어서 고른 건데...?’
실제로 마법사는 정말 안전한 직업이었다.
제국에서는 모두에게 존경 받고, 귀족이 가져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직업.
거기에 실력만 있으면 정말 어디든 안 불리는 곳이 없는 직업이었다.
기사단에서도 마법사가 필요했고 모험가 길드에서도 마법사를 필요로 했고 황제의 관료들도 마법사를 필요로 했고...
-에인로가드로 가라. 거기서 수많은 마법사의 씨앗과 부딪히며 성장해라. 그 경험이 널 완성시킬 것이다.
에인로가드는 제국 마법 학교 중에서도 최고의 마법 학교.
가장 전통 있고 가장 강력한 마법 학교인 만큼 그 이름이 가지는 힘은 대단했다.
에인로가드에 들어가서 무사히 졸업하기만 해도 최소한의 명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었다.
학교에서 뛰어난 업적을 세우거나, 교수의 눈에 들어 추천서를 받거나, 아니면 다른 학생들과 인맥을 쌓거나...
에인로가드는 제국 최고의 마법 학교인 만큼, 제국 최고의 인맥 양성소였다.
다시는 대학원 비스무리한 곳에는 가지 않겠다고 치를 떤 이한도 얌전히 들어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래. 그냥 참고 졸업하면...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자.’
* * *
늙은 기사, 알라르롱이 깍듯하게 이한에게 경례를 올렸다.
“이한 워다나즈 님.”
“여기까지 날 호위하느라 고생 많았어.”
“별 일 아니었습니다.”
알라르롱은 워다나즈 가문의 기사였다.
원래라면 이한의 호위 같은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됐지만, 그는 수도를 떠나 에인로가드까지 가는 이한을 직접 호위하겠다고 자청했다.
이한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내가 경한테 배웠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와줄 줄은 몰랐는데...”
“이한 님께서 제게 검술을 배워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이 워다나즈 가문의 이름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제가 나선 겁니다.”
“그래. 이유야 뭐든.”
알라르롱은 엄격하게 말했지만 이한은 웃었다. 알라르롱의 성격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엄격하고 진지했지만 속이 깊은 알라르롱이었다. 직접 자처한 것도 이한을 걱정해서리라.
이한이 웃자 알라르롱은 겸연쩍은 듯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크흠. 솔직히 말해서, 이한 님께서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하셨을 때 기쁘긴 했습니다.”
워다나즈 가문은 마법사 가문.
굳이 검술을 배우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한이 배운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뭐든 간에 배워 놓으면 나중에 쓸 일이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특히 검술 같은 건 호신에 꼭 필요하지 않겠는가.
두 번째는...
미친듯이 심심해서였다.
놀랍게도 워다나즈 가문에서는 마법을 조금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열다섯 살 전에는 위험하므로 마법을 배울 수 없다!
이 세계는 15살쯤 되면 대충 성인 취급을 해줬다.
마법은 학문 중에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위험한 학문.
성인이 되기 전에는 다룰 수 없다는 것도 이해는 갔다.
물론 정신적으로 나이가 많은 이한 입장에서는 꽤나 억울한 일이었지만...
“보십시오. 다른 귀족 자제 분들도 가문에 부끄럽지 않게 호위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저건... 좀 과한 거 같은데?”
이한은 제국 대로를 채운 마차 행렬들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아무리 그래도 마차 열 대와 기병 수십 명을 데리고 오는 건 좀 과했던 것이다.
귀족의 체면이라는 건 ‘누가 누가 더 사치 잘 하나’여서 그냥 나들이를 갈 때도 어마어마하게 화려하게 간다지만, 학교 입학하는 꼬마 하나 데려다 놓으려고 저렇게 할 줄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호위, 시종, 하인, 노예, 다 못 데리고 들어가지 않나?”
“예.”
에인로가드는 오래된 전통의 마법 학교.
그 전통 중 하나는 ‘평등’이었다.
황족이든 노예든 들어올 수 있지만, 들어올 때는 맨몸 하나만으로 들어와야 한다는 것.
당연히 저렇게 많이 데리고 와봤자 들어갈 때는 혼자 들어가야 했다.
“아마 몇 명은 주변의 마을에서 계속 기다리겠지요.”
“...그렇게까지 한다고?”
이한은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서 환생한지 15년이 됐지만 아직도 귀족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저 거대한 마법학교에 들어가면 한 달에 한 번이나 나올까 말까일 텐데 그걸 대비해서 주변의 마을에서 자리를 잡고 기다린다니.
“아까 물어봤습니다만 벌써 몇몇 건물들을 구매했다더군요. 근처 마을에는 대대로 그렇게 팔리는 건물들이 따로 있을 정도랍니다.”
“난 그 정도까진 됐어. 경.”
“이미 저희도 조촐한 저택 하나를 구매했습니다만...?”
“......”
이한은 속으로 욕했다.
그럴 돈이 있으면 그냥 저금해놨다가 나중에 줄 것이지...!
그렇게 쓸데없이 사치할 돈은 OK인데 이한에게 따로 돈을 주는 건 안 된다니.
가문의 법도는 불합리했다.
“수도는 멉니다. 이한 님. 귀족이라면 만약을 대비해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 든든하군.”
이한은 말 위에 탔다.
마차를 끌고 들어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한은 그냥 말을 타고 정문으로 들어가는 게 속편할 것 같았다.
‘마차들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해가 지겠군.’
“그러면 경. 다시 한 번 데려다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이한 님. 모시게 되어 영광이었습니다.”
알라르롱은 진심이었다.
가문의 핏줄들 중에서 알라르롱이 가장 좋아하는 건 이한이었던 것이다.
진지함과 겸손함을 아는 이.
“가주님께서도 이한 님의 재능을 칭찬하셨습니다.”
“없는 말을 지어내서 기분 좋게 해줄 건 없는데. 어쨌든 고맙군.”
“아니, 정말인데...”
* * *
마법학교 에인로가드는 황궁이 있는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땅에 마력이 충만한 곳을 찾다 보니 이렇게 정해졌다고 했다.
과연 그런 소문에 맞게 주변 풍경은 대자연이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학교 뒤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옆으로는 드넓고 긴 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으니...
눈을 감자 무한한 자연의 마나가 공기와 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 이건 잘못됐어.”
“??”
이한은 옆의 소년이 말을 걸어오자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여기는 옷만 봐도 신분을 알 수 있었다.
비단과 금실로 화려하게 자수가 놓아진 겉옷. 굳은 살 없는 손과 얼굴.
귀족 가문 출신이 분명했다.
‘사람을 불러야 하나?’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서 벌벌 떠는 모습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마법 관련된 문제가 있는 건가?
“왜 그래. 괜찮나?”
“나... 나는...”
“그래. 뭐가 문제지?”
“하인이 없으면... 잠을 못 잔다고...”
“......”
이한은 한 대 치려다가 말았다.
‘이 새끼가...’
방금까지 걱정한 게 미안할 정도로 하찮은 이유였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매우 진지한 문제 같았다.
“하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니 말도 안 돼. 하인은 내 손과 발 같은 거잖아. 내 손과 발을 자르고 들어오라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야?”
“그렇군. 논리적이야.”
이한은 대충 듣고 대충 흘렸다.
그러나 소년은 이한이 대충 한 말에 용기를 얻은 것 같았다.
“그렇지? 가서 항의해야겠어.”
“...뭐라고 항의할 생각이지?”
“하인을 데리고 올 수 있게 해야 한다고!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건 부당한 일이야!”
“그래. 열심히 해봐.”
몇 천 년 넘게 지켜온 전통이 웬 소년 하나 때문에 깨질 것 같지 않았지만, 이한은 응원했다.
첫 번째로 자기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고, 두 번째로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은 이 일에 어떻게 대응할까?
소년은 쪼르르 달려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
“나는, 반성한다, 나는, 반성한다, 나는, 반성한다...”
“...!!!”
이한은 경악했다.
‘정신계 마법!’
소년이 맛이 가서 중얼거리는 걸 보니 매혹이나 지배 같은 마법에 당한 게 분명했다.
마법 자체는 놀랍지 않았다. 이한도 들어본 마법이었으니까.
놀라운 건 귀족 가문의 자제한테 아무렇지도 않게 저런 걸 쓰는 이 학교의 마법사들이었다.
‘...사람 하나 죽어도 뒷산에 묻는다는 게 설마 진짜는 아니겠지.’
오기 전에 들었던 소문 때문에 이한은 찜찜해지는 걸 느꼈다.
-모두들 에인로가드에 온 것을 환영한다.
커다란 목소리가 아닌, 모두의 뇌에 직접적으로 쏘아 보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쾅!
그리고 동시에 에인로가드의 정문이 열렸다.
-들어와라. 무쇠대가리들아!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은 모두 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목소리의 폭언 때문이 아니었다.
다들 마법 재능이 있는 만큼, 에인로가드에 걸린 마법 때문에 어마어마한 마력의 압박을 느낀 것이다.
맨눈으로 태양을 보려고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맨손으로 거인을 이기려고 하면 이런 기분이 들까?
히히힝!
말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까지 마차를 끌고 온 이들 중에 마차를 타고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맨몸으로 오라고 했는데....
목소리와 함께 그 마차가 갑자기 사라졌다.
마차 안에 앉아 있던 귀족 가문의 소녀는 비명과 함께 낙하했다.
열 대가 넘는 마차들이 사라지고 소년소녀들의 비명이 들렸다.
-괜찮다. 무쇠대가리들아! 어차피 규칙을 안 지키려고 해도 이 학교가 지키게 만들어 줄 테니까.
“......”
이한처럼 눈치 빠른 몇몇 이들은 이 학교가 소문처럼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표정이 굳어 있었다.
-궁둥짝 움직여라! 입장! 입장!! 입장!!!!
“......”
“......”
* * *
이한은 원래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 버릇은 이세계로 오면서 한층 더 심해졌다.
무얼 보든 새롭고 신기했으니 관찰이 재밌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는 백 명이 가볍게 넘어가는 소년소녀들이 모여 있었다.
황족, 귀족, 기사, 사제, 상인, 모험가, 거지 등 그 복색도 다양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소녀들은 벌써부터 삼삼오오 모여 그룹을 만들고 있었다.
앞으로 긴 학교생활을 보냄에 있어 인맥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맞아. 가문의 문장도 없을 텐데 용케 알아봤군.”
평등이란 전통에 걸맞게, 옷에 가문의 문장을 달고 오는 건 금지였다.
물론 그래도 알아볼 방법은 있었다.
당장 이한도 예전에 본 적 있는 황족과 귀족 몇 명을 알아봤으니까.
“나는 요네르. 요네르 메이킨이야.”
살짝 곱슬거리는, 어깨까지 오는 선명한 붉은 머리칼. 거기에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가진 소녀가 앞에 서있었다.
메이킨 가문.
메이킨 가문도 제국에서 꽤 유명한 마법사 가문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메이킨 가문은 좀 더 제국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것 정도?
그에 비해 워다나즈 가문은 좀 따로 노는 편에 가까웠다.
당장 가문의 가주부터가 황제의 요청에도 나오지 않고 마법 연구를 위해 칩거하는 경우가 잦았으니...
“반가워. 요네르. 무슨 일이지?”
“황자 전하께서 널 보고 싶어해.”
메이킨은 뒤를 가리켰다.
여기 있는 이들 중 가장 화려하게 차려 입은 소년이 이한을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