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화
황족. 황자. 황녀.
보통 ‘황’자 들어가는 것들은 고귀하고 존엄한 힘을 갖고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제국에서는 조금 달랐다.
황족이...
생각보다 많았던 것이다.
‘지금 황제 자식이 100명 넘어가지 않았나?’
아무리 끗발 날리는 게 황족이라고 해도 황제 직속 자식들만 세 자리 숫자면 문제가 좀 있다고 봐야 했다.
그쯤 되면 이한이 슬쩍 황궁에 들어가도 황제가 자기 자식인 줄 알 것 아닌가.
이한이 형제들보다 늦게 태어난 대가로 인생을 열심히 살아야 하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황제의 자식들도 똑같았다.
가장 먼저 태어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이한보다 더 가혹하다고 할 수 있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그래도 가주가 자식들 이름은 기억하고 챙겨줬으니까.
하지만 황족들은 그런 관심 없이 자기가 알아서 자기 인생을 꾸려야 했다.
물론 썩어도 준치라고, 평민들 앞에서는 황족의 혈통도 제법 위력이 있었지만...
하필 이 근처에 있는 것들은 제국에서도 쟁쟁한 대가문 출신의 자제들.
이들은 듣도 보도 못한 황자한테 굽신거릴 필요가 없었다.
당장 요네르 메이킨만 해도 대다수 황족들보다 처지가 나을 터.
그런데 요네르가 저렇게 나서서 황자와 같이 다니는 이유는?
‘...애가 좀 멍청한가?’
이한은 요네르가 들었으면 화를 냈을 생각을 했다.
실제로 주변을 보니 요네르를 비웃는 몇몇 소년소녀들이 있었다.
귀족의 체면이 있지, 황자의 시중을 왜 드느냐는 비웃음이었다.
제국 귀족의 자존심은 황족의 자존심 못지않았다.
실제로 대귀족쯤 되면 황제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래. 알겠어.”
그러나 이한은 메이킨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쁠 거 없지.’
비웃음 받고 있는 건 메이킨이었지, 제안을 받은 이한은 딱히 비웃음을 사지 않았다.
그리고 황자가 끗발 없다고 해서 굳이 처음 만남부터 시비를 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사 누구든 친해지면 나중에 도움이 되기 마련이었다.
“...고마워! 다행이야!”
메이킨은 밝은 햇살처럼 웃었다. 그렇게까지 기뻐하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내 제안을 벌써 세 명이나 거절했거든.”
“......”
이한은 메이킨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나 살짝 후회했다.
* * *
황자, 가이난도는 97번째 황자였다.
비슷한 시간대에 태어난 형제자매들이 여럿 있어 사실은 101번째 아니냐는 말이 있었지만 가이난도는 97번째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아마 세 자리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던 게 분명했다.
그걸 제외한다면 가이난도는 꽤 철이 없는 황족이었다.
15살이면 성인 취급이었지만 모두가 똑같이 성숙하지는 않는 법.
이 학교에서 황족의 가치가 그리 크지 않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게 분명했다.
“들었어? 이한?? 저 자식이 내 제안을 거절했다니까?”
“그래. 그래. 들었어.”
“어떻게 감히??”
“가이난도 네가 얼마나 존귀한지 모르는 거겠지.”
“존귀가 뭐냐?”
가이난도가 의아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가이난도를 빤히 쳐다보다가 상냥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이한 안에서 가이난도 평가가 한 단계 내려갔지만, 가이난도는 눈치 채지 못했다.
“존귀는 신분이 높고 귀하다는 뜻이지.”
“아. 나한테 어울리는 말이네.”
“그렇지.”
“어쨌든 내 제안은 거절해놓고 아덴아르트와 이야기하고 있잖아! 정말 모욕적이야...!”
아덴아르트.
가이난도가 가리킨 학생, 아덴아르트도 황족이었다. 아마 43번째였나 44번째 황녀쯤 됐을 것이다.
‘분위기 자체가 다르군.’
길고 찰랑거리는 은발에 선명한 푸른 눈. 지적이고 단아한 얼굴.
황녀는 가만히 침묵한 채로 서있는 것만으로도 주변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저런 품위 있는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뿜어내는 황녀는 귀족 출신 학생들에게 존중받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덴아르트는 아마...
‘가이난도처럼 사람 시켜서 안 불렀겠지.’
귀족 자제들이 자존심 강하다 하더라도, 황족이 직접 말을 걸어주는데 무시할 정도로 무례하진 않았다.
가이난도도 그냥 자기가 직접 가서 말 걸고 친한 척 했으면 사람 여럿 모였을 것이다.
“네가 나중에 손봐주겠어?”
가이난도는 이한을 보며 말했다.
동년배에 비해 이한은 키가 크고 몸이 다부졌다.
계속 검술을 배웠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법사가 되기 위해 모였다지만 마법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한 소년소녀들 사이에서는 주먹이 더 센 법.
물론 이한은 가이난도의 자존심을 위해 남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가이난도.”
“응?”
“존귀한 존재는 남을 시켜서 괴롭히지 않아.”
“괴롭힌 게 아니라 응징...”
“어쨌든. 존귀한 존재는 그러지 않아. 잘 생각해봐.”
“으음.”
이한의 말에 가이난도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듣고 보니 좀 품위 없어 보이긴 했던 것이다.
“그러면 이한. 네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 같은데?”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거지.”
“...그거 말고는?”
“직접 결투를 신청하는 것도 방법이긴 해.”
“흥. 너그럽게 용서해줘야겠다.”
직접 결투하기는 싫었는지 가이난도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이한은 그 모습에 가이난도의 장점을 발견했다.
바로 생각보다 단순하다는 점이었다.
“와. 너 대단하다. 가이난도의 고집도 꺾고.”
요네르는 놀란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이한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가이난도와 같이 움직이는 거지?”
“친척이야. 사촌.”
“그렇다고 저런 말을 일일이 들어줄 건 없지 않나? 메이킨 가문 정도면...”
더 물어보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홀에 터지듯이 울려 퍼졌다.
-잘 떠들었나, 무쇠대가리들아! 이제 그만 떠들어도 좋다. 앞으로 몇 년 동안 떠들 수 있을 테니까.
“!”
아까 정문에서 들렸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들리고, 홀 가운데에 거대한 해골이 떠올랐다.
어마어마한 마력을 흩뿌리는, 타오르는 안광을 가진 해골.
‘리치!’
위대한 마법사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언데드가 된 존재.
그게 바로 리치였다.
이한도 소문만 들었지 리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신기한지 웅성거렸다.
-한 가지 문제를 내지. 내가 왜 너희를 무쇠대가리라고 부를까?
아덴아르트가 손을 들었다. 가이난도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노려봤다.
-말해라.
“...저희 새로 들어온 신입생들의 상징이 강철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하다. 네 기숙사에 10점을 주마!
“그런 게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 마법사가 되려면 거짓말을 간파하는 법부터 배워라.
속았다는 걸 깨달은 아덴아르트가 좋아하다가 말고 흰 얼굴을 붉혔다.
-그래. 너희 1학년의 상징은 강철이다. 2학년의 상징이 청동인 것처럼 말이야. 강철은 단단하고,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품질이 달라지며, 쓰임새도 다양한 유용한 물건이지. 실로 너희 1학년에게 어울리는 금속이다.
“오오...”
“과연.”
자리에 모인 소년소녀들은 해골 교장의 말에 감탄했다.
-또 속는구나! 멍청한 놈들. 너희 상징이 강철인 건 너희가 대가리에 든 게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쇠대가리인 거고! 못 믿겠으면 두드려 봐라. 아주 좋은 소리가 날 거다.
“......”
“......”
좌중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저런 모욕을 받아본 적도 없는 신분의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아무도 따지지 못했다.
그만큼 해골 교장의 존재감은 어마어마했던 것이다.
‘대단하군.’
이한은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해골 교장이 나타난 다음부터 이 주변의 마력 밀도가 미친듯이 올라가서 움직이기도 쉽지 않았다.
마치 깊고 깊은 심해로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어떻게든 움직여지는군.’
이한이 몸을 꿈틀거리자, 해골 교장은 눈빛을 돌려 이한을 쳐다보았다.
-...?
신기한 것을 보는 눈빛.
이한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고 똑바로 섰다.
졸업장과 인맥을 갖고 나오기 위해 들어왔는데 1학년 때부터 교장에게 찍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먼 길을 걸어 온 제국의 미래들에게 너무 가혹한 말만 한 것 같군.
해골 교장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몇몇은 그 말에 살짝 안도했지만, 이한은 속지 않았다.
‘약간 좀 미친 놈이 분명해.’
리치가 되면 잃는 게 있다더니 해골 교장은 좀 여러 가지를 잃은 게 분명했다.
이한은 전생의 대학원 시절, 옆 연구실의 교수가 떠올랐다.
그 교수도 저 해골 교장처럼 눈빛이 광기에 가득찼던 것 같...
‘아니. 그 교수보단 저 리치가 나은 것 같기도.’
그렇게 생각하자 해골 교장도 의외로 상대할 만한 것 같았다.
-자! 너희들을 위해 이 학원에서 가장 뛰어난 요리사들이 하루 전부터 만찬을 준비했다. 부족하지만 이 만찬을 즐기고 여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어주길 바란다. 식사가 끝나고 나면 기숙사에 따뜻한 이불과 침대가 기다리고 있으니...
그 말에 살찐 소년 한둘이 침을 흘렸다.
과연 어떤 만찬일까? 제국 서부 풍으로, 잘 키운 닭에 밀가루를 두르고 기름과 버터, 양파, 소금, 후추 등을 넣고 포도주를 부어 자글자글하게 끓인 닭 요리나 베샤멜 소스를 듬뿍 부은 그라탕도 좋았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두툼한 치즈와 버터만 그냥 내줘도 흰 빵에 발라서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면 제국 동부 풍으로 싱싱한 생선에 고추장 양념을 발라 숯불에 구워서 내오는 것도 좋았다.
동부 음식 중에 국수는 싸구려 음식이라고 잘 안 먹었지만 오랜 여정 때문에 허기져서 그런지 지금 내오면 잘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딱히 홀에 있는 거대한 테이블에는 아무런 음식도 나오지 않았다.
“???”
-또 또 속는구나! 이 멍청한 놈들! 대체 언제쯤 되어야 정신을 차릴까? 대체 마법사는 어떻게 되려고?
‘미친 놈 아니야 저거?’
몇몇 심약한 신입생은 해골 교장의 폭언에 울먹거렸다.
-자. 이제 규칙을 말해주겠다. 이 학원은 마법사의 요람이다. 그리고 마법사를 키우는 가장 커다란 원동력은 바로 갈망이다!
말과 함께 허공에서 허름한 망토와 허름한 지팡이와 허름한 옷 꾸러미가 나타났다.
-이게 바로 너희가 입고 지낼 교복이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서 검고 딱딱한 빵과 다 식은 주먹밥이 나타났다.
-이게 바로 너희가 먹고 지낼 음식이다.
“너, 너무하잖아...!”
누군가 자신도 모르게 외치자 해골 교장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바로 그 반응을 원했다! 저 음식이 너무 맛이 없어 보인다고? 마법을 빨리 익혀서 네 손으로 음식을 구해라! 저 옷과 지팡이가 너무 쓰레기 같아 보인다고? 마법을 익혀서 네 손으로 새 옷과 지팡이를 구해라! 이 학원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
이한은 경악했다.
에인로가드가 혹독하다는 소문만 들었지 이 정도로 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 마디로 억울하면 빨리 마법 실력 키워라가 교칙인 학교!
‘이래도 되나?’
“흥. 밖에 말해서 물건을 들여오면 그만이지.”
건방진 자세를 한 학생 한 명이 울컥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해골 교장은 더더욱 신이 나서 외쳤다.
-그래! 그 반응도 원했다. 1학년은 외출 금지다! 상급생들한테 부탁해서 물건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마라! 한동안 상급생들은 만나지도 못할 테니까!
“......”
“......”
-해산! 무쇠대가리들아, 행운을 빈다! 좋은 마법사가 되려무나!
이한은 누군가가 분명 ‘개새끼’라고 중얼거리는 걸 들은 것 같았다.
해골 교장도 그것까지 뭐라고 하진 않았다.
황자, 가이난도는 해골 교장이 사라지자 발을 구르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이게 말이 돼?? 우리 같은 신분을 감히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거야? 이한! 너는 화가 나지 않니? 저 거지나 입을 법한 옷과 돼지나 먹을 음식을 갖고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어? 뭐 괜찮지 않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