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화
가이난도는 순간 이한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사람이 어떻게 딱딱한 검은 빵과 식은 주먹밥만 먹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거칠고 허름한 망토를 두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한은 딱히 농담을 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워다나즈 가문... 무서운 가문 같으니...!’
가이난도는 경악했다.
제국의 귀족 가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각자 고유의 풍습과 가풍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한의 가문인 워다나즈 가문은 제국 귀족 가문들 중에서도 알려진 정보가 적은 편이었다.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마법 연구에만 몰두한 탓이었지만...
덕분에 가이난도는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워다나즈 가문은 가문의 핏줄들을 저렇게 키우나봐!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예도 저렇게 대접하지는 않을 텐데... 워다나즈 가주가 그렇게 잔인한 인물일 줄이야...’
가이난도는 이한을 동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언제 한 번 저택에 찾아와. 내가 꼭 제대로 대접해 줄 테니.”
“어... 고맙다?”
가이난도가 왜 이러는지는 몰랐지만,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해골 교장의 폭풍 같은 연설이 끝나고 학생들이 흩어져서 나가는 동안 요네르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다.
이한은 아까 궁금했던 걸 물었다.
“왜 가이난도와 함께하는 거지? 아무리 사촌이라도 메이킨 가문 정도면 일개 황족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을 텐데.”
“아. 가이난도의 어머니 때문에.”
요네르는 선선히 말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가이난도의 어머니한테 신세를 진 적이 있는 건가?”
이한은 순간 상상을 했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요네르가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했는데 커다란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다들 요네르를 경멸하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요네르는 겁먹어서 울먹이는데, 황비 중 한 명인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나타나서 이렇게 따뜻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괜찮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그런 경험이라면 감동 받을 법도 했다.
가이난도가 별 볼일 없는 황족이라지만 그에게 황족 대접을 제대로 해줄 수도...
“응? 아니.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어마어마한 부자시거든. 가이난도와 친하게 지내면 돈을 많이 주셨어.”
“...!!”
이한은 경악했다.
그런 비밀이 있었단 말인가?
‘나도 친하게 지내야겠군!’
* * *
마법학교 에인로가드에는 황족부터 노예까지, 재능만 있으면 어떤 이들이든 받아들였다.
물론 마법사들도 한창 성질 예민하고 날카로운 소년소녀들을 그냥 한곳에 모아놓으면 사고가 나기 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에인로가드의 기숙사는 출신에 따라 4곳으로 나뉘었다.
오만한 푸른 용의 탑.
황족과 명성 높은 귀족 가문 출신들이 여기에 들어갔다.
이한도 워다나즈 가문인 만큼 자동적으로 여기에 속했다.
“윽. 사제들이잖아. 괜히 설교나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
“쉿. 괜히 시비 걸지 마.”
옆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 소속인 신입생들을 보고 불평하는 소리였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사조의 탑.
제국의 여러 교단들에서 온 사제들은 여기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제국의 사제들은 마법을 쓰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그들은 마력을 신이 내려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만큼 여러 교단에서 제국의 가장 뛰어난 마법 학교인 에인로가드에 사제들을 보내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눈에 띄긴 하는군.’
황족이나 귀족들은 아직 교복으로 갈아입지 않아서 옷차림이 제각각이었지만, 사제들은 전부 다 검소한 사제복 차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에 찾아온 사제들한테 설교 좀 들으면서 자라 온 귀족 소년소녀들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철커덕, 철커덕-
그러나 그 뒤에 들어오는 이들을 보자 소년소녀들의 인상은 더더욱 찌푸려졌다.
벼락을 물어뜯는 흰 호랑이의 탑.
제국의 기사 가문 출신 소년소녀들은 이 탑에 들어갔다.
기사 가문이 마법학교에 오는 게 얼핏 보면 신기하게 들렸지만, 기사들 중에서도 마법은 필요했다.
당장 텔레파시부터 시작해서 치료까지 마법이 안 쓰이는 곳은 없는 것이다.
이들은 기사로서, 마법사로서 두 개의 길을 같이 걸을 각오를 한 이들이었다.
가이난도는 그게 영 못마땅했는지 투덜거렸다.
“영광스럽고 순수한 마법의 길을 저런 식으로 모욕하는 놈들을 굳이 여기서 받아줘야 해? 그냥 길거리 마법사를 가정교사로 들여도 충분할 텐데.”
옆에서 듣고 있던 이한은 살짝 찔렸다.
다른 이들이야 마법으로 순수한 진리를 탐구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몰라도, 이한은 그냥 마법으로 출세하려고 들어왔던 것이다.
“기왕 배울 거면 최고에서 배우고 싶었겠지.”
“뭐야... 왜 쟤네 편을 들어?”
“가이난도.”
이한은 가이난도에게 한층 더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가이난도의 어머니가 돈이 많다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존귀한 존재는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경멸하지 않아.”
“...그거 너무 조건이 까다로운 거 같은데...”
그래도 존귀하고는 싶었는지 가이난도는 입을 다물었다.
기사 가문의 소년소녀들이 지나가고 자, 마지막 기숙사 학생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가장 다양하고 독특한 복장들을 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과거와 미래를 보는 검은 거북이의 탑.
이 기숙사는 가장 구성이 다양했다.
평민, 하인, 노예, 광대, 거지, 상인, 신흥 하급 귀족 등 다양한 이들이 전부 모여 있는 것이다.
가장 신분이 낮다는 걸 이들도 알고 있었는지 주눅 든 표정이 느껴졌다.
‘기회가 되면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다른 이들과 달리, 이한은 기회만 되면 친분을 쌓고 싶었다.
돈벌이에 가장 좋은 게 무엇인가.
역시 사업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업을 같이 하기 좋은 건 옆에 있는 가이난도 같은 사람이 아닌, 저렇게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아니겠는가.
“이쪽을 쳐다보는데?”
“눈 마주치지 마. 마주쳐서 좋을 거 없어.”
“재수 없는 자식들...”
푸른 용의 탑 소속 학생들이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걸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여기서 다퉈서 좋을 게 없었으니 그들은 시선을 피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런 천박한 자들까지 받아줘야 하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소곤거리던 목소리 중 유독 하나가 선명하게 들렸다.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도 들었는지 인상이 험악해졌다.
‘오.’
이한은 순간 이게 기회라는 걸 깨달았다.
저쪽 탑 학생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
‘지금 나서야겠군.’
* * *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은 위축되지 않으려고 해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제법 기가 드센 학생들도 이 낯선 분위기와 수군거림에는 쉽게 나서지 못했다.
그 때 나선 건 푸른 용의 탑 출신의 소년, 이한이었다.
선이 굵은, 위엄 있는 조각 같은 외모를 갖고 있는 소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박한 건 그쪽이겠지. 에인로가드에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가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지 않았나? 그런 것도 잊어버리고 하찮은 자존심이나 내세우다니.”
소년에게서는 위압감과 함께 강렬한 존재감이 풍겨 나왔다.
타고난 혈통을 갖고서,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진 대귀족만이 보여줄 수 있는 고귀한 모습.
그 모습에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도 공감한 모양이었다.
“맞는 말이야.”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지? 역시 워다나즈 가문 출신다워.”
아까 조롱한 사람은 부끄러웠는지 나서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도 반응을 보였다.
“워다나즈 가문??”
“그 마법가문...?!”
“눈 마주치지 마, 멍청아! 위험한 가문이라고!”
“가주가 드래곤인 가문이잖아? 드래곤의 핏줄인가?”
“드래곤이 아니라 고대 정령의 핏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 * *
처음에 이한은 잘 되었다 싶었다.
학생들 모두 이한의 말에 설득된 것이다.
‘괜찮은데?’
이제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이 이한에게 감사 인사만 하면...
“워다나즈 가문??”
“그 마법가문...?!”
“눈 마주치지 마, 멍청아! 위험한 가문이라고!”
“가주가 드래곤인 가문이잖아? 드래곤의 핏줄인가?”
“드래곤이 아니라 고대 정령의 핏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
그러나 이한의 예상과는 좀 다른 반응이 나왔다.
친분을 쌓기보다는 두려움에 찬 시선을 던지는 학생들!
학생들의 반응에 이한은 뭔가 일이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고맙다고 인사가 돌아올 줄 알았는데...?
옆에서 요네르가 감탄하며 말했다.
“방금 보여준 모습, 정말 훌륭했어. 맞아. 에인로가드에 들어온 귀족이라면 무릇 그래야지.”
“...요네르. 내가 무섭게 생겼나?”
“응? 아니? 귀족답게, 위엄 있는데?”
요네르는 이한이 왜 고민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한의 외모는 말 그대로 ‘귀족답게’ 잘 생긴 편이었다.
선이 굵고, 각진 턱에, 꾹 다문 입술. 거기에 날카로운 눈빛까지.
평민들이 접근 못할 정도로 위엄 넘치는 모습은 귀족들 사이에서 장점으로 뽑혔다.
실제로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다들 좋게 봐주고 있었다.
그 반응에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야 어울리는 건 무리겠군.’
* * *
각 기숙사들은 본관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방향을 따라 각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한과 다른 학생들은 길을 따라 저 멀리 보이는 푸른 탑으로 향했다.
‘정말 넓군.’
안에서 보니 새삼스럽게 놀라웠다.
말이 학교였지 호수와 숲, 강과 산이 안에 있는 학교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걸 보자 갑자기 해골 교장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알아서 구하라고 했지?’
이 학교는 원한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고, 해골 교장은 그렇게 말했었다.
확실히 이런 모습을 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에 가서 짐승을 잡거나 아니면 호수에 가서 낚시를 하거나...
“너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나보구나.”
“응?”
“이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위대한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아니. 숲에 잡을 수 있는 짐승 뭐 있을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워다나즈 가문에서 혹시 그런 훈련도 시켜??”
* * *
오만한 푸른 용의 탑은 푸른색 돌로 길쭉하게 솟아 있는 탑이었다.
겉모습만 보면 그렇게 크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에인로가드의 마법사들이 확장해 놓은, 무한에 가까운 넓은 공간이 있었다.
“!”
탑의 문을 통과하자 방금까지 같이 있던 여러 명의 학생들이 전부 사라졌다.
정신을 차리자 이한은 혼자 어두컴컴한 공간에 남아 있었다.
[어디로 가겠는가?]
“??”
[어디로 가겠는가?]
‘아.’
이한은 지금 자신한테 말을 거는 게 탑 그 자체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습니까?”
[너는 적응이 빠르구나.]
탑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한은 탑이 빙그레 미소지은 것 같았다.
[지금 네가 갈 수 있는 곳은 네 개인 방과, 일학년 전용 강철 휴게실이다.]
“다른 곳도 갈 수 있습니까?”
[그래. 어떤 곳은 이름만 알면 갈 수 있고, 어떤 곳은 다른 것들을 알아야 갈 수 있지만.]
푸른용의탑기숙사
불사조탑기숙사
호랑이탑기숙사
거북이탑기숙사
“이학년들의 휴게실이나 공용 휴게실에 갈 수 있습니까?”
[그래. 하지만 지금은 안 된다.]
“어째서입니까?”
[교장께서 금지했으니까.]
“......”
이한은 교장의 철저함을 욕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철저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개인 방에 보내주십시오.”
[그래. 입학을 환영한다. 어린 마법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