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화
각자에게 주어지는 개인 방은 의외로 넓고 쾌적했다.
해골 교장이 다른 건 하나도 주지 않아도 개인 방까지 뺏어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이건 이한 기준의 생각이었고, 지금쯤 다른 귀족들은 아무것도 없는 살풍경한 방의 모습을 보고 경악하고 있었다.
-거... 거지들이 사는 곳인가?
-혹시 누가 방 안을 도둑질한 거 아닌가요?
털썩-
책상, 의자, 침대를 빼면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지 더 넓게 느껴지는 방.
이한은 일단 받은 옷을 정리하고 짐을 간단하게 구석에 놓은 다음 책을 꺼냈다.
<에인로가드에 대하여>.
들어오기 전에 각자 받는, 학교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적혀 있는 얇은 책이었다.
‘필수 과목은 무조건 들어야 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선택. 처음 한 달에는 돌아다니면서 어떤 강의가 좋을지 들어보고 결정할 수 있다...’
이 학교는 엄격한 듯하면서도 이런 부분에서는 자유로웠다.
일단 들어온 이상 학생이 무슨 공부를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마법사란 세계의 진리를 탐구하는 자. 선배와 스승이 도와준다 하더라도 자신의 길은 자신이 정해서 나아가야 한다. 오수 고나달테스.
‘교장 이름이 오수 고나달테스였군.’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정보를 얻은 이한은 대충 일을 마무리 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신입생 휴게실은 갈 수 있다고 하니,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눠 볼 생각이었다.
* * *
“나는 연금술을 배워보고 싶어.”
요네르는 먼저 내려와 있었다. 이한이 도착한 걸 발견한 요네르는 반갑게 손을 흔들어줬다.
“연금술?”
“응. 가문에 있었을 때부터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거든. 내 공방을 차려서 황실에 납품하는 게 꿈이야.”
“돈 좀 되겠는데.”
“같이 하겠어?”
“으음. 생각 좀 해보고. 연금술 사업이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잖아.”
이한은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요네르가 가문에 있었을 때부터 연금술에 관심이 많았던 것처럼, 이한은 가문에 있었을 때부터 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연금술이라고 하면 그럴듯하게 들렸지만 제국의 연금술 사업도 경쟁이 치열했다.
뛰어난 연금술사들이 만든 길드들이 서로 시장 점유율을 뺏기 위해 살벌하게 다투고 있었던 것이다.
모험가 길드에 포션 공짜로 뿌리기, 상대 연금술 길드가 만든 포션 나쁜 소문 퍼뜨리기, 포션 원료로 쓰는 약초 전부 독점해서 견제하기 등등.
소문 하나하나가 흉흉한 만큼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역시 안정적인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이한의 1차 목표는 황실 관리, 즉 공무원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 해서 나쁠 건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넌 어디에 관심이 있는데?”
“나?”
이한은 질문을 받자 살짝 당황했다.
왜냐하면...
‘경쟁 적고 학점 받기 좋은 과목 들을 생각이었는데.’
학문이고 뭐고, 여기서 받은 성적도 외부에 나갔을 때는 스펙이 됐다.
당연히 이한이 신경 안 쓸 리 없었다.
“한 달 동안 시간이 있으니 둘러보면서 결정할 생각이었지. 뭐든지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와... 대단한걸.”
“??”
이한은 뭐가 대단한지 이해하지 못해서 요네르를 쳐다보았다.
대단할 게 있나?
“보통 자기가 익히려는 마법은 생각해서 오거든. 자기 취향에 맞는 걸로. 하지만 그게 꼭 좋은 방법인 건 아니니까...”
자기가 어떤 마법에 적성이 맞는지는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알기 힘들었다.
그리고 적성에 맞지 않는 마법을 억지로 배우는 건 생각보다 효율이 좋지 않은 일.
진리를 추구하는 마법사라면 고집을 꺾고 더 좋은 길을 선택할 줄 알아야 했다.
하지만 사람인 이상 욕심이 있고, 욕심이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고 싶은 법.
그런 욕심을 버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역시 워다나즈 가문의 규칙이야?”
‘무슨 말만 하면 다 워다나즈 가문이 나와?’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가문 안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밖으로 나오니 가문의 이름이 가진 힘을 더 실감하게 되었다.
당장 아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보낸 눈빛도 그렇고...
혹시 워다나즈 가문의 이미지가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강한 걸지도 몰랐다.
“큰일났어!”
“??”
뒤늦게 도착한 가이난도가 허겁지겁 외쳤다.
“무슨 일이지?”
“내 방에 도둑이 들었나봐! 아무것도 없어!”
“......”
* * *
기초 마법의 이해.
에인로가드에 들어온 일학년이라면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이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만 듣는 과목인지 다른 탑 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들 표정이 이상한데?”
“배가 고프고, 제대로 잠을 못 자서 졸립고, 옷이 거칠어서 움직일 때 신경이 쓰여.”
요네르의 말에 가이난도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 일찍 일어났을 때, 가이난도는 어제 일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갓 만든 버터를 바른 따끈따끈한 흰 빵과 닭고기와 향신료를 넣어 끓인 후끈한 수프가 당연히 제공되리라고 기대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꿈이 아니었고, 침대에서 일어난 가이난도를 맞이한 건 딱딱한 검은 빵과 딱딱한 주먹밥, 그리고 찬 물 한 컵이었다.
‘난 먹을 만했는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워다나즈 가문에 태어나고 나서는 호의호식하긴 했지만, 원래 이한은 매우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어... 내가 잘못 봤나? 선배님.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을 하면 식사는 언제 하죠?
-자. 여기. 에너지 바. 아침점심저녁이니까 아껴 먹어라.
-...개소리죠?
-나한테 그러지 마. 나도 에너지 바로 때워야 하니까. 그래도 끝나면 진수성찬이 기다리고 있어.
-컵라면이라고 하면 죽여 버릴 겁니다.
-...미안. 컵라면이야.
-......
-그래도 삼각김밥도 있...
‘음. 지금이 좀 더 나은 것 같은데.’
하지만 이한 빼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모두 다 진이 빠진 표정이었다.
학교에 들어온 하루만에 이렇게 된 것이다.
끼익-
<기초 마법의 이해> 강의실은 에인로가드 본관 1층에 위치해 있었다.
신입생들을 배려하는 학교의 친절이었다.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신입생들은 길을 잃을 확률이 높아질 테니까.
“...어...?”
“잘, 잘못 들어왔나?”
“제대로 들어왔어요. 자. 다들 앉아요.”
문 앞에 학생들이 멈춰서 수군대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왜 저러지?
그 답은 곧바로 나왔다.
강의실 안에 트롤이 있었던 것이다.
“......”
“......”
“빨리 들어오라니까요!”
“어... 음...”
학생들은 공포와 두려움이 섞인 표정으로 주저하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트롤.
평생 가문 안에서 살아온 학생들도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로 사납고 포악한 몬스터였다.
그런 트롤이 마치 교수처럼 차려입고 기다리고 있었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게 강의실인지 트롤의 뷔페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자. 내 소개부터 해야겠네요. 난 가르시아 킴이에요. 트롤 혼혈이고요. 모두 겁을 먹은 건 알겠지만, 겁을 먹을 필요는 없어요. 나는 아주 배가 고프지 않는 한 사람을 먹지 않거든요.”
“......”
“농담이었는데 괜히 했나보군요.”
분위기가 더 썰렁해지자 가르시아는 매우 미안해했다.
“자! 우리의 교장께서 매번 하는 말이 있어요. 시간은 가장 큰 보물이라고요. 강의를 시작해볼까요?”
가르시아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어중간하게 서있던 학생들이 밀려나듯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여러분들은 강철의 칭호를 받고 들어온 마법사의 씨앗이지요. 이 중에서 오만하거나 멍청한 몇 명은 몰래 마법을 써봤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마법을 써보지 않았을 거예요. 이 강의는, 여러분들에게 마법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여러분들에게 잘 맞는 마법을 찾아주는 강의랍니다. 마법의 길은 험난하고 좁은 길이고 그 길은 혼자서 걸어가야 하지만, 나는 그 길을 걷기 전의 나침반이 되어주고 싶어요.”
온화한 트롤 교수의 말에 안에 있던 학생들의 표정도 부드러워졌다.
‘해골 교장보다 몇 배는 나은 사람 같은데?’
“자. 그러면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시작해야겠군요. 마법이란 뭘까요?”
황녀 아덴아르트가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법사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맞아요. 마법사의 의지로 세상을 뒤트는 일. 문제는 ‘어떻게’냐죠.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요?”
“마나의 힘으로요?”
“아주 좋아요. 마력, 마나... 이 근원적인 힘을 빌려 세상을 바꾸는 것이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다 마력을 느낄 줄 알고, 자신 안에 있는 마력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일 거예요.”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자질 있는 사람만 받는 곳이다 보니 다들 마력에 대한 각성은 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일 뿐이죠. 마법을 쓰려면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해요. 자신의 의지로 마력을 불러내서, 그 마력을 섬세하게 엮고, 결과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죠. 흔히들 마법에는 주문이나 동작, 시약이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의지에요. 마법사 자신의 의지. 그걸 잊으면 안 된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주문과 동작이 필요할 거예요. 아직 많이 미숙한 만큼. 자.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네요. 졸립죠? 한 번 직접 해보면서 하겠습니다. 각자 지팡이를 꺼내고, 마력을 모아보세요.”
우우우웅-
넓은 강의실 안에 마력의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린 마법사들이 제각각 자신 안의 마력을 짜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한 또한 집중하고 마력을 지팡이에 모으기 시작했다. 몸 안에 있던 마력들이 흘러나오며 지팡이에 고였다.
“이제 그 마력을 유지한 채로... 집중력을 잃으면 안 됩니다! 그 상태에서 빛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세요. 자기가 생각하는 빛의 이미지. 밝고, 따뜻하고, 번쩍이는. 뭐든 좋아요.”
이번에는 끙끙 앓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력을 컨트롤하는 건 사납게 날뛰는 말의 고삐를 붙잡고 당기는 일에 가까웠다.
조금만 집중을 놓으면 그냥 훅 하고 흩어지는 것이다.
“점점 더 강하게 떠올린 채... 외치는 겁니다. 뭐든 좋아요. 빛이여! 빛! 밝음! 밝은 빛! 자기 안에서 떠오르는 주문이면 뭐든 좋아요.”
“빛이여!”
“밝은 빛이여!”
“태양보다 눈부시고 내 영광처럼 아름다운 빛이여!”
“너무 긴 주문을 하지 마세요! 여러분 수준에 너무 긴 주문을 외우면 오히려 집중력이 흩어질 거예요.”
집중해서 마력을 모으고, 그 마력을 자신의 의지로 바꾸고, 마지막으로는 주문까지 외쳐서 확실하게 끝맺음한다.
이한은 마법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물론 그런다고 한 번에 되지는 않았지만.
펑! 퍼엉! 펑펑!
“윽!” “크흑!” “아오...!”
곳곳에서 마법에 실패한 어린 마법사들의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트롤 교수는 웃으면서 지팡이를 휘둘렀다.
마법 시전에 실패하면 모았던 마력이 주인을 잃고 날뛰면서 마법사를 다치게 할 수 있었다.
그걸 막아주는 게 교수의 역할이었다.
“자. 실패했다고 겁먹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에요. 몸 안에 마력이 남아 있는 한 다시!”
2차 시도.
다시 펑펑거리는 소리와 함께 학생들이 신음소리를 냈다.
트롤 교수는 속으로 웃었다.
원래 이 가장 간단한 ‘발광’이라는 마법을 익히는 데에만 해도 보통 한 달은 넘게 걸렸다.
마법이란 건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교수는 그걸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건 학생들이 직접 몸으로 겪어야 할 일이었으니.
“자! 다시!”
3차 시도.
이제 슬슬 학생들 중 마력을 다 써서 기진맥진한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법이란 게 생각보다 마력을 엄청나게 소모했던 것이다.
절반 넘는 학생들이 지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다시!”
4차 시도.
이번에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주저앉았다. 운이 좋거나, 컨트롤이 좋은 두셋만 서있었다.
“다시!”
5차 시도.
“다시!”
6차 시도.
“다시!”
7차 시도.
“어... 교수님. 말씀을 끊어서 정말 죄송합니다만, 계속 해야 합니까...?”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외치고 있던 트롤 교수는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보통 4차, 아무리 많아도 5차에서 끝나야 했는데 7차까지 한 명이 서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