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화
마력.
마나, 마력, 동부의 어떤 부족에서는 ‘기(氣)’, 폼 잡기 좋아하는 학자는 에테르, 고집 센 사제들은 신성력이라고 부르는 별명 많은 이 힘은 마법사들의 근원이었다.
세계를 바꾸기 위한 힘!
마법을 쓸 때마다 자기 안의 마력을 끌어내서 소모해야 하는 만큼, 요령 없고 실력 없는 어린 마법사들이 마력 부족에 시달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7차까지 시도했는데 멀쩡하게 서있다니.
“학생 이름이?”
“이한입니다.”
트롤 교수, 가르시아는 작게 웃었다.
가문의 이름 대신 자신의 이름을 말한 모습에 호감이 갔던 것이다.
귀족. 그것도 대귀족 출신 중에 가문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 이는 드물었다.
학교의 이념 중 하나인 ‘평등’과 잘 어울리는 사람인 것이다.
“이리 와보세요.”
“어...”
이한은 불안해하며 다가섰다.
‘그냥 비틀거렸어야 했나?’
남들 다 마력 써서 비틀거리는데, 혼자 멀쩡히 서있는 만큼 좀 의아한 건 사실이었다.
자기가 마법을 제대로 쓰지 않았나 싶었던 것이다.
“흠. 흠. 그렇군요.”
가르시아가 이한의 손목을 잡고 고개를 끄덕거리자, 뒤에 있던 가이난도가 요네르에게 속삭였다.
“야.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저러다 삼키면 어떡해??”
“...교수님 귀에 다 들릴 테니까 좀 조용히 해 멍청아.”
“!?”
가르시아는 손목을 놓고 말했다.
“끝나고 이한 학생은 잠시 남으세요.”
“아. 예.”
* * *
그 뒤로 <기초 마법의 이해>는 별다른 마법 훈련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가르시아 교수는 마법사로서의 마음가짐을 엄하게 설교했다.
“마력을 다 썼을 때는 무조건적으로 쉬어야 해요. 아직 실력이 부족할 때는 더더욱! 마력이 부족하다고 초조해하지 마세요. 훈련을 하면 마력의 양도 늘어날 것이고, 요령이 생기면 마력의 소모도 줄어들 테니까요. 언제나 신입생들 중에는 의욕이 넘쳐서 몰래 마법 연습을 하다가 쓰러져서 오는 경우가 있어요. 운이 나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 절대 그러면 안 된답니다. 그리고 학생. 난 학생을 삼키지 않아요.”
“죄... 죄송합니다.”
가이난도는 벌벌 떨며 사과했다.
“자.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필수 강의 말고 다른 선택 강의들이 학교 이곳저곳에서 진행되고 있으니, 가서 한 번씩 들어보고 무엇을 배울지 고민해보세요. 잘 모르겠으면 내 방으로 찾아와서 물어봐도 된답니다.”
“......”
“......”
학생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너 트롤 혼혈 교수의 사무실로 가서 1:1로 상담할 수 있냐?
-미쳤냐?
...같은 시선 교환이었다.
“워다나즈. 조심해.”
“맞아. 트롤의 약점은 불과 산성이야.”
“여긴 둘 다 없잖아?”
“...워다나즈. 조심해.”
다른 학생들의 응원을 들으며,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 앞에 섰다.
“사실 이한 학생에 대해 먼저 듣기는 했어요.”
“??”
의외의 말에 이한은 멈칫했다.
뭐지?
“교장 선생님에게 들었다고 하면 이야기가 빠를까요?”
“...!”
미친 리치 교장한테 들었다고 하자 이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르시아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교장 선생님이 좀 정신 나간 개새끼처럼 보일 때가 있긴 하지만 근본은 선한 사람이거든요.”
“...예??”
그게 말이 되나?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매년 초마다 신입생들을 훑어보시고 간단하게 교수들한테 말을 전해주시죠.”
학생들은 몰랐지만, 리치 교장은 매우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었다.
이 학교에 들어오는 신입생들은 제국에서 갓 성인이 된 가지각색의 소년소녀들.
사고가 터지는 것을 막으려면 예리한 안목이 필요한 것이다.
-저 드워프 놈은 조심해라. 보아하니 기숙사 방을 세 번은 태워 먹을 놈이다.
-하! 저건 악마 혼혈이군. 신성 마법을 쓰는 교수들은 주의해라. 괜히 다치는 일이 없도록.
-저건 <흰 까마귀> 길드 소속 소매치기잖아?? 교수들, 조심하도록. 설마 학생한테 소매치기 당해서 하소연하러 오는 사람은 없겠지? 그런 작자는 지하감옥에 처넣을 테니까.
물론 교장의 말을 무시하는 교수들도 여럿 있었다.
리치 교장은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미치광이 같은 성격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저 오크 녀석... 왠지 창을 잘 쓸 거 같군.
-대대로 검술 명가 출신입니다만?
-닥치도록! 창을 쓰라고 전해라.
-......
그런 교장은 이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 놈은 대우(大愚)의 자질이 있군.
-...??
대우(大愚).
매우 어리석다라는 뜻이었다.
물론 교수들이 저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제국 동부의 격언 중에 유명한 격언이 있었던 것이다.
-대우(大愚)는 곧 대지(大智)다.
매우 어리석어 보이는 모습은, 매우 지혜로운 모습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겉모습에 현혹되지 말고 진정한 지혜를 찾아야 한다는 오래된 격언이었다.
그렇다면 교장의 말은 이런 뜻이 됐다.
-지금 봐서는 알기 힘들지만 나중에 대성할 자질이 엿보이는군.
자리에 있던 교수들의 반응은 반으로 나뉘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무언가 재능이 있나보다’거나 ‘혹시 어제 워다나즈 가문 사람한테 술 한 잔 거하게 얻어 먹으셨나’로.
그리고 가르시아 교수는 교장의 말뜻이 뭐였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런 뜻이었군.’
“어... 교장 선생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한은 살짝 불길해졌다.
교수에게 총애를 받는 건 장점과 단점이 있었다.
총애를 받으면 좋은 성적과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다.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인 것이다.
하지만...
일정 이상의 총애를 받으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녀석. 네 재능은 이렇게 썩히기 아깝구나.
-감사합니다!
-그래. 넌 대학원에 와야 해!
-예? 생각해본 적 없는...
-지금 밖에 나가서 취직해봤자 경쟁률이 얼마나 심한지 아니? 대학원에 가서 학위도 따고 하면 더 좋은 조건에 취직도 되고, 무엇보다 네가 좋아하는 학문을 더 깊게 팔 수 있단다. 얼마나 좋니?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성격 좋은 교수를 만나면 차라리 나았다.
만약 사악한 미치광이 교수를 만나면 지옥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리치 교장은...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은 인물이지.’
이한은 안정적으로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인맥을 쌓아 졸업하고 싶었지 해골 교장과 친해져서 수상쩍은 마법의 길을 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 미안해요. 교장 선생님께서 한 말씀을 그대로 이야기해줄 수는 없고... 대신, 학생의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해줄게요. 교장 선생님이 전한 말도 이것과 비슷한 이야기에요.”
“!”
이한은 트롤 교수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이한의 재능이라니.
‘내 재능이... 이렇게 따로 말할 정도였나?’
워다나즈 가문에 있을 때 이한은 딱히 재능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마법 능력이 있다는 확인을 받았다.
이한의 아버지,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도 이렇게 말했으니까.
-제 재능은 어떻습니까?
-음. 네 마법 재능은 꽤 괜찮은 편이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게 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재능에 관한 이야기를 해준다니까 좀 당황스러웠다.
‘나쁜 이야기 아니야 이거?’
이한은 진지하게 요네르와 같이 투자 받아서 연금술 공방 차려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한 학생의 마력량은 매우 많아요.”
“...예? 그게 다입니까?”
이한은 황당해했다.
‘마법을 시전하는데 문제가 있다’ ‘빛 속성 마법이 체질적으로 안 맞아서 빛 속성 마법은 앞으로 못 쓴다’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냥 마력량이 많다니.
일단 나쁜 게 아니라서 다행이긴 한데...
이렇게 따로 말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사람마다 타고난 마력량은 다르고, 훈련과 요령으로 극복 가능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따로 말할 정도로 중요한가?’
“물론 그게 다가 아니죠.”
“아... 역시 그렇군요.”
“이한 학생의 마력량은 진짜 엄청나게 매우 많아요.”
“...???”
“정말, 진짜, 미친듯이, 엄청나게, 매우 많은 정도?”
“오.”
그제야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가 이렇게 따로 불러서 진지하게 말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 *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난 뒤 이한은 생각했다.
‘좋은 거 아닌가?’
마법을 쓰려면 마력이 필요했다.
마력이 부족하면 밖에 퍼져 있는 마력을 끌어오거나, 마법진으로 마력을 따로 모으거나, 마력이 담긴 마석을 쓰거나 하는 식으로 대체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력이 많으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로서는 매우 유용한 재능...
“안타깝게 됐어요.”
“???”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을 안쓰러움과 걱정 섞인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이한은 뭔가 잘못 굴러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력량이 많으면 좋은 거 아닙니까?”
“보통 많으면 좋죠. 그런데 이한 학생은 진짜 엄청나게 매우 많다니까요. 유리병 안에 담긴 물은 이렇게 다루기 쉽지만, 거대한 바다의 물을 통제하는 건 매우 힘들지 않겠어요?”
가르시아 교수의 말에 이한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니까 지금...?
‘마법 난이도가 미친듯이 올라간다고?’
당장 오늘 ‘발광’이라는 아주 간단한 마법을 배우는 데만 해도 성공한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마법은 어려운 학문이었다.
마력을 끌어내고, 집중하고, 의지로 묶고...
이 모든 게 초인적인 집중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력량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많아지면 안 그래도 높은 난이도가 더 올라갔다.
“자. 여기 이 팔찌를 받으세요.”
투박하고 묵직한 쇠 팔찌.
가르시아 교수는 이한의 양 손목에 팔찌를 하나씩 채워줬다.
“마력을 흡수하는 팔찌에요. 도움이 될 겁니다.”
“!”
그래도 마법학교라고 바로 해결책을 주는 모습에 이한은 감동을 받았다.
“이것만 차고 있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겠군요!”
“네? 아뇨. 이거 차고 있어도 더럽게 힘들 걸요?”
“......”
“너무 어마어마한 마력이라 뭘 해도 어쩔 수가 없어요. 안 하는 것보단 나으니까 하는 거지.”
가르시아 교수는 비교적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지만 마법사였다.
마법사는 이런 부분에서는 절대 돌려서 말하지 않는 것이다.
“...혹시 다른 조언이라도?”
“음... 엄청나게 마법을 많이 써서 마력을 소모시키면 그나마 좀 나을 것 같긴 하군요. 이한 학생은 기초적인 마법 훈련은 혼자서 연습해도 돼요. 절대 마력 고갈로 사고 나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어떻게 보면 특혜를 허락 받은 거였지만, 이한은 별로 기쁘지 않았다.
* * *
‘아. 이거 마법 안 쓰는 과목들을 들어야 하나?’
마법학교라고 했지만 꼭 마법을 쓰는 과목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연금술만 해도 마법을 쓰는 일이 적은 것이다.
교수의 방을 나온 이한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1학년 때부터 진로 잘 잡고 학점 관리를 잘 해둬야 나중에 졸업할 때 후회를 안 하는데...’
“살아나왔구나!”
계단 아래에서는 가이난도와 요네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난도는 진심으로 걱정했는지 이한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뭘 보는 거냐?”
“교수가 물어뜯은 흔적이 없나 보고 있는 거야.”
요네르의 말에 이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하긴 해골 교장 보면 교수를 의심 안 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무슨 말 들었어?”
요네르가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질문에 이한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마법 연습 많이 하라던데.”
“감히...!”
가이난도는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감히 대가문의 자제한테 마법 연습을 많이 하라고 하다니.
이 얼마나 무례한 소리란 말인가!
‘저 말 듣고 화낼 정도면 나중에 시험 못 봐서 재시험 보게 하면 교수한테 결투 신청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이 자식?’
“내 일은 됐고. 다음 필수 과목 전까지 선택 과목들 들어보고 싶은데. 생각해 놓은 과목들 있어?”
“난 당연히 연금술이지.”
요네르의 말에 가이난도가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에이. 연금술은 하인이나 노예들이 하는 거지!”
“......”
이한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요네르의 주먹이 불끈 쥐어지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