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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6화 (16/687)

016화

어차피 한 학기 동안 강의 들으면서 서로 검 맞대야 하는데, 괜히 ‘나는 사실 마법명가 출신이지만 소드마스터가 꿈이었단다’같은 거짓말을 해서 서로 좋을 게 없었다.

게다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을 경계하고 있는 만큼 그 경계심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냥 적당히 버티다가 점수 받아갈 테니 너희가 신경 쓸 필요 없다!

“......”

그러나 상대의 표정은 매우 미묘하고 복잡해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한의 말이 거짓말인지 아닌지 몰라서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 그렇구나. 난 모라디 가문 출신이야. 모라디라고 불러.”

“그래. 반갑군. 모라디.”

이한은 모라디의 손을 잡고 가볍게 악수했다.

체구는 작은 편이었지만 손바닥에 잡힌 물집과 굳은살은 상대가 기사 가문 출신이라는 걸 다시 상기시켰다.

‘잠깐. 모라디 가문이면...’

모라디 가문.

이한도 몇 번 이름을 들어본 적 있던 제국 기사 가문이었다.

분명 추운 북쪽에서 철혈의 규칙으로 인근을 지키는,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가문의 이미지와는 좀 반대인데.’

“?”

모라디는 이한의 눈빛에 의아하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하긴 꼭 가문 명성이 일치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서로의 가문도 신경 쓰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시비부터 걸던 아까 상대와 비교하면 오히려 모라디가 더 상식적으로 느껴졌다.

‘잘 구슬려서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경계심을 풀어야겠군.’

*         *         *

벽암검(碧巖劍).

이한이 가문의 노기사 알라르롱에게 배운 검술의 이름이었다.

푸른 바위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알라르롱의 검술은 단단하고 우직했다.

-세상의 검술은 셀 수 없이 다양합니다. 빠르고, 느리고, 날카롭고, 둔탁하고, 무겁고, 가볍고, 단순하고, 복잡한 검술들을 모두를 배울 필요도 없을 뿐더러... 저는 가르칠 능력도 없습니다. 제가 가르칠 검술은, 제가 배워왔고 믿어 온 제 검의 길입니다. 언젠가 이한 님께서도 꾸준히 검의 길을 걷다 보면 자신만의 길을 깨닫게 되실 겁니다.

수십 년 동안 검술을 익혀 온 알라르롱과, 검술을 익힌 지 고작해야 십 년도 안 된 이한은 그 경험치 자체가 달랐다.

그래서 알라르롱이 말하는 것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한에게는 다른 귀족들에게 없는 장점이 하나 있었다.

그건 까라면 깐다는 점이었다.

알라르롱이 당황할 정도로 이한은 시키는 대로 했고, 덕분에 이한의 검술은 군더더기하나 없이 기본이 꽉 잡혀 있었다.

“벽암검? 기초가 잘 잡혀 있습니다.”

잉걸델 교수도 이한의 자세를 보고 칭찬했다.

“어디 가문 출신입니까? 벽암검이라면 분명...”

“워다나즈 가문 출신입니다.”

“...?”

잉걸델 교수는 순간 반응이 늦었다.

워다나즈 가문의 검술이 벽암검이었나?

뒤늦게 워다나즈 가문이 어떤 가문인지 떠올린 잉걸델 교수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검술을 배우려고 하는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제국 귀족이라면 검술은 기본적인 교양 아니겠습니까.”

잉걸델은 그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틀린 대답은 아니었지만 잉걸델이 좋아하는 대답은 아니었던 것이다.

잉걸델 같은 천생 검객에게 검술은 생사를 가르는 기술이었지 귀족을 위한 교양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검술이 마법 못지않게 깊이 있는 학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배우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만점!!”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잉걸델은 손을 내저었다.

생각치도 못한 훌륭한 대답에 무심코 속마음이 나와 버린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이라는 마법명가 출신이면서 저렇게 검술을 진지하게 대할 줄이야.

겉멋만 든 몇몇 흰 호랑이 탑 학생들보다 훨씬 더 보기 좋은 태도였다.

‘통했나?’

이한은 잉걸델의 표정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미친 리치 교장에 비하면 잉걸델 교수는 인상만 험악하지 매우 알기 쉽고 선량한 사람이었다.

미친 교수들 밑에서 닳고 닳은 이한에게 잉걸델 교수 같은 순진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쉬운 일이었다.

아무리 점수 날로 먹으려고 들어왔다지만 교수 앞에서는 본심을 숨겨야 하는 법.

“훌륭한 마음가짐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니 나 또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진지하게 상대하겠습니다. 자. 목검을 들어 올리세요.”

“......”

이한은 너무 대답을 잘 했나 살짝 후회했다.

*         *         *

잉걸델 교수는 쉴 틈 없이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처음에는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에 방심했던 학생들도 몇 대 두들겨 맞자 악에 받쳐 덤벼들게 되었다.

잉걸델 교수는 그런 학생들을 다시 한 번 두들겨 패서 꼬리 내린 쥐새끼처럼 만들었다.

‘와. 장난 아니군.’

이한의 검술 실력은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그래도 상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볼 정도는 됐다.

이한을 가르친 알라르롱도 대단한 검사였지만 잉걸델 교수도 그에 못지않았던 것이다.

알라르롱이 움직이지 않는 바위 같은 검사였다면 잉걸델은 빠르게 흐르는 물과 같은 검사였다.

놀라운 건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의수와 의족인데도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름 자기 가문의 검술을 오랫동안 수련해 온 학생들은 잉걸델 교수의 움직임을 조금도 따라잡지 못하고 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다.

“자운검(紫雲劍)의 움직임치고는 변화가 너무 적습니다. 쌍검의 핵심은 그 난해함과 복잡함! 무작정 검을 휘두르지 말고 더욱 고민하고 휘두르는 게 좋을 겁니다.”

“고산월검(高山月劍)은 더 빠르고 날카롭게! 찌를 때 눈치를 보지 말고 전력을 향해 몸을 던지십시오.”

게다가 교수라는 직위에 걸맞게 잉걸델은 학생들이 펼치는 검술들을 다 알아보았다.

제국의 검술은 유명한 것만 따져도 수백 개가 넘었고, 가문에서만 전해져 내려오는 것까지 따지면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잉걸델은 그 검술들의 이름까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 쉬도록 하겠습니다.”

“......”

“커억...”

“개ㅆ...”

학생들은 앓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드러누웠다. 욕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을 정도였다.

이한도 근육이 뻐근하고 몸이 얼얼했다.

-벽암검은 바위와 같은 검술. 어떤 공격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어, 교수님의 실력이 저보다 위인데 안 흔들릴 수가 있습니까?

-자, 계속 공격하겠습니다. 막아내 보십시오! 자! 자! 자!

잉걸델은 이한도 모르는 약점을 잘도 찾아내서 때려댔다.

이한은 살아남기 위해 열심히 막아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실수한 것 같은데...’

휴식 시간이 되자 이한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학생들보다 좀 더 많이, 집요하게 맞은 것 같았다.

물론 이한의 검술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었지만 이한의 직감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미 <기초 연금술의 이해>에서 교수에게 잘못 걸렸다가 어떻게 되는지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냥 가만히 있었어야 했나?

‘점수 땄다고 더 두들겨 맞을 줄은 몰랐다.’

“워다나즈?”

“예. 교수님.”

“잠깐 대련을 하게 나오십시오.”

“......”

이한은 정말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다.

남들 쉬는데 교수한테 단독으로 매를 맞아야 한다니.

그러나 잉걸델은 자기가 이한을 패려고 불러낸 게 아니었다.

“이쪽은 초이 가문의 더르규. 두 학생이 간단하게 대련을 해보도록 하십시오.”

“!”

이한뿐만 아니라 쉬고 있던 학생들도 놀랐다.

왜 저 둘을?

‘아까 시비걸었던 놈이잖아?’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더르규를 쳐다보았다.

‘다른 기숙사 놈이 왜 강의 듣냐?’하고 시비 걸었던 놈인 만큼 좋게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이한이 워다나즈 가문인 걸 알고도 앞뒤 가리지 않고 시비 걸 정도로 머리가 꽉 막힌 놈 아닌가.

대련이라고 적당히 봐주는 대신 무작정 덤벼들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그렇게 말하고 오크는 이한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이한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주 속마음이 보인다.’

이번 기회를 빌려서 재수 없는 다른 기숙사 학생을 밟아놓겠다는 속마음이 얼굴에서 읽힐 정도였다.

많고 많은 학생 중에서 교수가 왜 굳이 이한을 고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설마 다른 기숙사 학생이라고 교수한테 찍힌 건 아니겠지. 분명 아까 대답은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이한도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가문의 저택에서 편하게 놀고먹으면서 지내도 됐는데 굳이 알라르롱에게 두들겨 맞으며 검술을 배웠던 건, 이럴 때 두들겨 맞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

*         *         *

잉걸델 교수가 더르규와 이한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지금, 학생들 중 둘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검술은 그냥 배운다고 바로 펼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검술의 핵심 기술들, 검식(劍式)은 기본적으로 몇 천 번 정도 연습하고 자신이 직접 실전에서 해봐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상대의 가슴을 찌르려고 하다가 궤도를 틀어 목을 찌르는 기술이 있다고 쳐보자.

그걸 그냥 다짜고짜 쓰면 어지간히 멍청한 적이 아니고서야 맞아주지 않았다.

그 전에 휘두르려고 살짝 위협을 하거나, 하단을 노리는 것처럼 속임수를 걸거나, 이런 세세한 동작들을 연속해서 넣어줘야 그 기술의 파괴력이 나오는 것이다.

즉 검식을 이해한다는 건 이런 응용으로 온전하게 펼치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자기가 배운 검식을 이해할 줄만 알아도 바깥의 어지간한 용병들은 찜쪄먹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자기가 뭘 하는지도 모르고 본능과 힘에 맡겨 마구잡이로 휘둘러댔으니...

그런 점에서 둘은 자기가 배운 검식을 이해하고 써먹을 줄 아는 경지였다.

심지어 둘은 미약하지만 무기에 마력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아무리 기사 가문 출신이라 하더라도 이 나이에 이 정도면 기사로 가도 충분히 성공할 재능이었다.

‘워다나즈 가문 같은 마법명가에서 저 정도로 검술을 연습하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초이 가문의 더르규는 그렇다 치더라도, 워다나즈 같은 마법명가 출신의 학생이 검술의 성취가 높은 건 정말 의외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더 잉걸델에게 기특했다.

‘검술도 마법만큼 깊고 의미 있는 학문이다. 저 학생도 그렇게 느꼈기에 각오를 하고 배우려고 온 거겠지.’

잉걸델은 이한을 오해하고 있었다.

이한이 가문의 눈치를 보며 몰래 검술을 익힐 정도로 검술에 목숨을 걸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워다나즈 가문 사람들은 이한이 알라르롱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에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워다나즈 가문은 원래 각자 자기 할 일 알아서 하고 서로 뭘 하든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걸 모르는 잉걸델에게 이한은 기특하고 안타까운 학생이었다.

이렇게 만나게 된 이상, 잉걸델에게는 이한이 걷는 검의 길을 지도해 줄 책임이 있었다.

‘초이 가문의 고산월검(高山月劍)은 빠르고 날카로운 쾌검. 그에 비해 워다나즈의 벽암검(碧巖劍)은 무겁고 강한 중검. 서로 정반대되는 스타일이다. 서로 겨루게 하면 배우는 게 많겠지. 검의 길에서 자신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라이벌의 존재는 무엇보다 귀하니까.’

물론 잉걸델 교수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유일하게 다른 기숙사 출신인 이한에게 적대감을 품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었다.

잉걸델 교수 밑에서 개처럼 두들겨 맞다 보면 서로 사이가 나빠질 시간도 없을 것이다. 오직 잉걸델 교수만을 미워하게 될 테니까!

잉걸델 교수는 현재 가장 뛰어난 두 학생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를, 그래서 그 긍정적인 영향이 다른 학생들에게도 전파되기를 진심으로 원했다.

촤아아악!

그런 생각을 하던 잉걸델 교수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한이 발로 흙을 차서 더르규의 얼굴에 흩뿌리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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