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0화
계속 워다나즈 가문에 있다 보니 제국 귀족들이 얼마나 허세부리기 좋아하는 족속들인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제국 귀족들은 목숨보다 명예를 중요시하고, 당장 파산하기 직전이어도 호화로운 식사를 하는 걸 자존심으로 여기는 이들!
‘아오. 쓸데없이 고생했네.’
“훌륭해요! 푸른 용의 탑에서 두 명이나 나왔군요.”
“?”
이한은 옆을 쳐다보았다.
황녀도 손을 들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한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눈빛은 별로 호의적인 눈빛이 아니었다. 푸른 눈동자에 차가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뭐지?’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푸른 용의 탑에서 손꼽히는 인재인 황녀에게 미움을 받는 건 별로 유익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한은 딱히 황녀에게 잘못을 한 기억이 없었다.
오히려 친절을 베풀기만 했던 것이다.
멧돼지도 같이 잡았고 학생에게 도움 되는 유익한 강의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고...
‘나중에 과제나 시험 관련해서 어떻게 도움을 받을지 계획도 세워놨는데. 왜 저러지? 가이난도와 같이 돌아다녀서 그런가?’
툭툭-
“워다나즈.”
아산 달카드가 작게 말했다.
“워다나즈 너에 관해 도는 이상한 소문을 황녀께서 믿는 모양이다.”
“이상한 소문이라니?”
“네가 마법에 몰두하지 않고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소문.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이지.”
아산은 자기 일처럼 화난 표정을 지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이한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이한은 놀랐다.
‘아니. 정확한데? 어떻게 알았지?’
너무 정확하게 알아차려서 소름이 돋을 정도!
그리고 이한은 이게 딱히 불명예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산은 이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매우 매우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난 이번 일로 황녀께 실망했다. 물론 이런 소문을 퍼뜨린 놈이 가장 나쁜 놈이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믿다니.”
“아니 뭐... 믿을 수도 있지?”
“...?!”
아산은 경악했다.
워다나즈...
대체 얼마나 관대할 생각이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대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하지만, 지금 아산 눈앞의 워다나즈처럼 귀족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학생은 없었다.
아산은 가문에서 왜 이 학교로 아산을 보냈는지 새삼 깨달았다.
이런 친구를 만나라고 보낸 게 분명했다.
“넌 정말 대단한 녀석이다. 워다나즈.”
“??”
이한은 아산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뭐 잘못 먹었나?’
* * *
“빛이여!”
“빛나라.”
이한과 황녀는 <빛 생성> 마법을 성공시켰다.
지팡이 끝에 구(球) 형태의 발광하는 빛 덩어리가 생기고 마치 랜턴처럼 머물렀다.
황녀의 <빛 생성> 마법은 어딘지 서늘하고 뚜렷한 느낌이 들었고, 이한의 <빛 생성> 마법은 태양처럼 강렬하게 타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아주 잘 했어요! 첫 주에 발광 마법을 성공시키는 학생들은 드문 편이죠. 뛰어난 인재들을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요. 물론 그렇다고 초조해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어요. 발광 마법은 1서클 마법 중에 가장 기초적인 마법이자, 마법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는 마법이니까요. 조금 빠르거나 조금 늦는 걸로 마법의 길이 달리지지는 않을 거랍니다.”
‘별로 설득력 없게 들리는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가르시아 교수가 말한 것처럼, 이 <빛 생성> 마법으로 학생들의 재능을 평가할 수 없긴 했다.
수학으로 비교하면 덧셈 좀 빨리 익숙해진다고 나중에 미적분 같은 복잡한 수학 문제를 잘 풀 수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경쟁심 가득한 학생들한테 저런 말이 들어올 리 없었다.
실제로 다들 ‘반드시 다른 탑 놈들보다 먼저 익혀주겠어!’라고 생각하고서 활활 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빛 생성> 마법을 가장 먼저 배우게 한 이유는... 이번 학기에 우리가 배우게 될 마법이 원소 마법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은 <빛 생성> 마법을 배우면서 원소 마법을 쓰는 요령을 무의식적으로 익혔을 겁니다.”
“!”
학생들은 가르시아 교수의 말에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원소 마법이라니!
원소 마법은 기본적으로는 불, 물, 흙, 바람 같이 쉬운 속성들부터 어둠이나 식물 같은 어려운 속성들까지 포함하고 있는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 원소 마법은 다른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익히기에 앞서 탄탄한 기초가 되어주는 역할을 했다.
정령 소환을 하고 싶다?
화염 정령을 소환하고 싶다면 화염 원소 마법을 어느 정도 익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화염 정령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아티팩트를 만들고 싶다?
화염 속성을 가진 보석을 다루거나 화염 관련 마법을 넣으려면 당연히 화염 원소 마법을 어느 정도 익혀야 했다.
먼 곳으로 여행을 가거나 제국의 외딴 땅에서 근무하게 됐다?
간단한 원소 마법만으로도 마법사들은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야영지의 불을 피우거나 마실 물을 준비한다거나 같은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고급 인력인 것이다.
이렇듯 원소 마법은 그나마 배우기 쉬운 것부터 시작해서 다른 마법들로 응용이 쉽다는 점까지, 모든 새내기 마법사들이 배우고 넘어가야 할 기초교육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다른 고등학문을 배우기 위해 덧셈뺄셈을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오늘도 <빛 생성> 마법 연습을 하겠지만, 동시에 여러분들에게 각종 기초 원소 마법들을 테스트하게 할 겁니다. 사람마다 적성에 맞는 원소가 있고, 그 원소를 찾는 것도 중요하거든요.”
학생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소곤거렸다.
사실 마법사들은 모든 마법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자기가 관심이 있고 배우고 싶은 분야만 배우면 됐다.
그런 만큼 모든 원소 마법을 다 익히는 것보다, 자신에게 맞는 원소를 찾아서 열심히 배우는 게 더 좋은 방법이었다.
가르시아 교수가 <빛 생성> 마법에 굳이 집착하지 않는 건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러면...”
가르시아 교수가 거대한 지팡이로 교실 바닥을 두드리자, 각 학생들 앞에 촛불이 생겨나고 불이 붙었다.
“요령은 저번 <빛 생성>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빛이 아닌, 불을 타오르게 만드는 게 다르죠.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빛과 달리 불은 사람을 태울 수 있으니까요.”
꿀꺽-
몇몇 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주문과 함께... 타올라라!”
가르시아 교수 앞에 이글거리는 불덩어리가 나타났다. 아무런 땔감도 없는데 혼자서 타오르는 신비한 마법의 불이었다.
“자. 다들 해보세요. 너무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제가 곁에 있으니까요.”
“불타올라라!”
“이글이글...”
“지글지글...”
“화르륵...”
학생들은 집중해서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몇몇 눈치 빠른 학생은 가르시아 교수의 의도를 깨닫고 촛불에 손을 가까이 가져다대거나, 혹은 일렁거리는 촛불을 노려보았다.
정신을 집중할 때 실제로 그 대상이 가까이 있으면 훨씬 더 심상(心想)을 만들기 쉬운 것이다.
마법사 특유의 정신력으로 불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마력을 끌어내서 그 불을 만들어내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주문을 외운다!
이한도 집중해서 불을 익혀보려고 했다. <빛 생성>과 달리 남들한테 속지 않고 평범하게 익힐 생각이었다.
“잠깐. 잠깐.”
“?”
그러나 가르시아 교수가 이한을 막았다.
“이한 학생. 학생은 발화 마법을 연습하지 마세요.”
“???”
이한은 의아해했다.
그러고 보니 이한 앞에만 촛불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구리 그릇 안에 담긴 찰랑거리는 물이 있었다.
“어째서입니까?”
“위험하니까요.”
“......”
이한은 깨달았다.
<빛 생성> 마법을 연습할 때도 몇 번이고 통제에 실패해서 빛이 폭발하곤 했었다.
그나마 눈이 좀 부실 뿐이지 빛은 폭발해도 별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화염이 폭발하면?
‘음. 여럿 죽겠군.’
이한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마력에 대한 통제력이 올라가고, 원소에 대한 감각이 더 정교해졌을 때, 그때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해했습니다.”
“그 전까지는 <물 생성> 마법을 연습해보세요. <물 생성> 마법은 실패하더라도 그렇게 위험하지 않으니까요.”
물.
화염과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원소 중 하나였다.
금속이나 번개의 이미지를 뚜렷하게 떠올리긴 힘들어도, 물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쉽고 친숙한 원소.
게다가 화염과 달리 실패했을 때 위험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물은 좀 미묘한데.’
물 원소 마법의 단점.
그것은 멋이 없다는 점...
...이 아니라.
‘그것도 있긴 하지만, 쓸모가 좀 미묘한데.’
쓸모가 좀 미묘하다는 점이었다.
공격?
화염이나 번개가 더 나았다.
방어?
흙이나 금속이 더 나았다.
굳이 장점을 뽑자면 여행 다닐 때 마실 물을 자기가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있긴 했지만...
‘정말 미묘한 장점이군.’
제국 마법사로서 날로 먹을 수 있는 달달한 꿀 직장에 앉는 게 목표인 이한에게, 그런 생존적인 쓸모는 좀 많이 미묘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화염을 연습하다가 주변을 태울 수는 없었다.
“샘솟아라!”
“워다나즈. 부럽다. 교수님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받다니.”
옆에서 연습하던 아산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이한에게는 헛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이게 특별 가르침으로 보이나?’
이한도 그냥 남들 하는 것처럼 화염 마법을 배우고 싶었다.
굳이 쓸모가 미묘한 원소 마법을...
“샘솟아라!”
“샘솟아라!”
촤아아악!
불과 세 번째 시도에서, 허공에 물덩어리가 생겨났다.
“!?”
물방울이 아닌 주먹만한 물덩어리!
이한도 놀랐고 가르시아 교수도 깜짝 놀랐다.
아무리 발광 마법을 성공시켜서 조금 익숙해졌다지만, 세번만에 물 생성 마법을 성공하다니.
쉽게 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게다가 물방울이 아니라 주먹만한 물덩어리라니.
원소와의 적성이 정말 잘 맞아야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대단해!’
“다들 여기 보세요! 이한 학생이 물 원소 마법을 성공시켰어요!”
“우와아...!”
“대단하다!”
“역시 워다나즈!”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기쁜 표정으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찌푸리고 질투 섞인 표정으로 이한의 마법을 쳐다보았다.
짝짝짝-
가르시아 교수는 박수를 치며 말했다.
“이한 학생은 훌륭해요. 다들 본받으면 좋겠군요. 하지만 여러분. 초조해할 필요는 없어요. 각자 적성에 맞는 원소라는 게 있거든요. 적성에 맞는 원소를 찾으면 금세 요령을 익힐 수 있을 거예요. 화산지대나 대장간에서 자란 학생은 화염에, 강가나 바닷가에서 자란 학생은 물에, 바람 거세게 부는 황량한 땅에서 자란 학생은 바람에... 자기가 익숙한 원소들일수록 심상을 만들기 쉬워서 다루기 쉽지요.”
듣고 있던 이한은 의아해했다.
‘난 딱히 강가나 바닷가 출신도 아닌데?’
인생에서 물과 관련된 기억은 교수한테 물먹은 기억밖에 없었다.
그냥 타고난 성격이 물과 잘 맞는 건가?
그게 나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역시...
‘번개나 얼음 같은 희귀한 속성하고 잘 맞으면 더 좋았을 텐데.’
뭔가 장점은 장점인데, 좀 미묘한 장점이라 기분이 묘했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서 옆을 보니 황녀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빤히 쳐다본 것 같았다.
‘?’
다른 생각을 하자 허공에 생겨났던 물덩어리가 형태를 잃고 바닥에 촥 쏟아졌다.
가르시아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한 학생의 다음 과제는 물을 생성한 다음 형태를 유지시키고 고정시키는 거겠네요.”
“알겠습니다. 교수님.”
물 생성의 요령을 안 이상, 그 상태로 정신을 집중해서 버티는 건 좀 더 쉬운 일이었다.
이한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그런 다음 문득 의문이 들어서 물었다.
“교수님. 얼마나 유지하고 고정시켜야 합니까?”
“아. 그렇게 물을 필요 없이 먼저 마력이 다 소진될 거... 아니. 잠시만요.”
보통 새내기 마법사는 집중력보다 마력이 먼저 다 닳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신입생은 정반대.
어마어마한 마력량을 갖고 있어서 그럴 리가 없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대답했다.
“수업 끝날 때까지 유지하고 고정하면 될 것 같네요!”
“...???”
이한은 귀를 의심했다.
어...
그건 체벌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