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4화
더르규가 가이난도에 대한 평가를 낮추고 있는 동안, 닐리아는 밤에 오랫동안 돌아다닐 때 필요한 준비물을 하나씩 손꼽기 시작했다.
“일단 얼마나 오래 움직일지 모르니까 최대한 잘 준비해야 해. 튼튼한 부츠에 질 좋은 양말 몇 켤레가 있으면 좋겠지만...”
“우린 그런 게 없지.”
이한의 말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일부러 교장이 거칠고 낡은 옷을 줬는데 그런 게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닐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짐을 꺼냈다.
“저번에 잡은 짐승 가죽을 이용해서 예비 부츠를 만들어왔어. 휴게실에 있는 커튼 천을 뜯어서 발싸개를 만들었고. 자. 발 줘봐.”
“......”
“......”
이한과 요네르가 말이 없자 닐리아는 아차 싶었다.
‘내가 또 궁상맞게 굴었나?’
고기를 가져다 준 다음부터 닐리아는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과 꽤 친해질 수 있었지만 그래도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거리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추운 북부 산맥에서 그림자 순찰대 소속으로 태어나고 자란 닐리아와, 제국 중앙의 거대 상단 가문에서 태어나고 자란 학생은 거리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와! 저기 붉은 꽃 보여?
-응. 저 꽃 맛있지. 달달하고.
-...아, 아니. 예쁘지 않아?
-예쁘고 맛있으니까 더 좋은 거 아니야?
물론 닐리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한 번 어색해진 다음부터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삼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말하게 되다니.
실수였다.
“이게, 그러니까... 내가 직접 꿰매긴 했는데... 어쩔 수 없어서 그런...”
“정말 대단해!”
“맞아! 대단해!”
“!?”
그러나 이한과 요네르의 반응은 닐리아의 예상과 정반대였다.
“이게, 대단하다고?”
“당연하지. 이걸 직접 만들다니.”
“아무나 할 수 없는 솜씨야. 이거 직접 바늘로 꿰맨 거지?”
이한과 요네르의 반응에 닐리아의 입가와 눈꼬리가 기분 좋은 듯 파르르 떨렸다.
“...별 거 아닌데?”
“별 거 아니라니. 무슨 소리를.”
“맞아. 이걸 여기서 누가 할 수 있겠어.”
“닐리아. 넌 장사를 해야 해.”
“맞아. 같은 탑 학생들한테 돈 받고 팔자.”
기분 좋게 칭찬 듣다가 화제가 이상한 방식으로 흘러가자 닐리아는 손을 내저었다.
“장사는 싫어.”
“아니 왜?”
“어째서? 닐리아. 돈을 왜 싫어하는 거야?”
이한과 요네르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물어보자 닐리아는 어이가 없었다.
‘친구들한테 장사하기 싫어하는 게 보통이지 않아!?’
누가 보면 닐리아가 푸른 용의 탑 소속인 줄 알 것이다.
“뭘 이런 걸로 돈을 받아! 싫어!”
그 말에 이한과 요네르는 정색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돈을 받을 수 있냐 없냐는 네가 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이 정하는 거야.”
“정말 좋은 말이야. 닐리아. 이해했지?”
“...나 그냥 설명 마저 하면 안 될까? 응??”
“아. 미안. 계속해.”
간신히 벗어난 닐리아는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밝아졌고, 길쭉한 귀도 기분 좋은듯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인정받는 것은 기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근데 이게 뭐가 대단한 건데?”
가이난도가 이해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퍽!
요네르가 가이난도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이한은 가이난도의 정강이를 깠다.
“닐리아. 쟤는 주지 마라. 안 써봐야지 뭐가 대단한 건지 알지.”
“맞아. 쟤는 고생을 좀 해봐야 해.”
“너...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그래도 황자인데...!”
‘황자였어?!’
닐리아는 기겁했다.
대가문 출신인 이한이나 요네르는 세 자리 숫자가 넘어가는 황족들에게 별다른 생각이 없었지만, 닐리아에게는 어마어마하게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직계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위엄이...
‘...있지는 않네.’
요네르한테 등짝을 맞고 이한한테는 발로 정강이를 까이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봐도 황자보다는 환자에 가까웠다.
“야. 네가 지금 몇시간을 꼬박 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 부츠랑 발싸개가 얼마나 귀한 건지 몰라? 넌 한 시간만 걸어도 발이고 뭐고 다 까질 거라고.”
“우리 그냥 두고 가자.”
“아... 아니야! 알았어! 알았으니까 두고 가지 마!”
상황이 마무리되자 이한은 닐리아에게 대신 사과했다.
“미안. 닐리아. 열심히 준비했는데 여기 가이난도가 무례한 말을 했군.”
“아, 아니야. 정말 신경 안 써.”
“신경 쓰는 거 같은데 한 대 더 때릴까?”
“진짜 괜찮거든?!!”
닐리아는 다시 기겁해서 말렸다.
정말 불쾌한 감정은 하나도 없었다. 딱 보니 가이난도는 평생 오래 걸어 본 적이 없어 보였는데(하물며 황자라니), 모르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자. 여기 내가 만들어 온 외투. 봄이지만 밤에는 쌀쌀할 거야. 이 주변에는 바람도 꽤 불 거고.”
“닐리아...”
“정말이지...”
“...말 한 마디 할 때마다 그만 반응할래?”
기분 좋긴 한데 너무 호들갑을 떨어대니 슬슬 닐리아도 귀찮아졌다.
“가죽 배낭. 마을 들어가면 필요할 테니까. 가죽 물주머니. 이것도 만들어왔어.”
‘진짜 대단하군.’
이한은 솔직히 감탄했다.
가죽, 바늘, 실만 가지고서 저걸 혼자서 다 만들다니.
‘저 재주로 왜 장사를 하지 않는 거지?’
만약 이한이었다면 쏠쏠하게 벌어먹었을 텐데.
옆을 보니 요네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움직이려면 발을 잘 감싸고, 혹시 모를 추위를 대비해서 외투를 준비하고, 그리고 마실 것과 먹을 게 충분해야 하는데...”
말하던 닐리아는 머뭇거렸다.
먹을 게 걱정되었던 것이다.
닐리아야 하루 동안 굶으면서 산맥을 탈 수 있다지만 다른 애들도 과연 괜찮을까?
“먹을 건 내가 갖고 왔어. 소시지하고 빵 잘라낸 거, 염소 치즈. 그리고 드워프식 벌꿀 사탕. 이 정도면 될까?”
“!”
닐리아는 깜짝 놀랐다.
이한이 갖고 온 음식들이면 비상식량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어디서 구해왔어?”
“우레걸음 교수의 오두막에서 슬쩍했어.”
“......”
너 진짜 푸른 용 탑 소속 맞아?
* * *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명예로운 친구들. 내 명령에 따르겠다고 맹세한 기사들.”
지젤의 말에 건장한 체격을 가진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을 믿고 같이 탈출을 시도하기로 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었다.
어떤 계획도 듣지 못했지만 이렇게 모인 모습에서 지젤이 가진 영향력을 알 수 있었다.
지젤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학생들도 여럿이었고 훨씬 더 험상궂게 생긴 학생들도 여럿.
선이 가늘고 여리여리한 외모를 가진 엘프인 만큼 주눅이 들 법도 했지만, 지젤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에 섰다.
그리고 오만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안 모인 멍청이들,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 곧 그 자식들도 알게 되겠지.”
“물론!”
“네 말이 맞아. 모라디.”
“십 분 후 출발한다.”
지젤이 이렇게 자신감에 가득 차있는 데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지도를 따라서 움직이면, 네 시간 정도면 충분해.’
놀랍게도 지젤은 탈출지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 모라디 가문에 있었을 때 찾았던 탈출지도!
-초심자를 위한 마법 개론서, 마법이란 무엇인가, 에인로가드의 전설... 이런 것밖에 없다고?
-죄송합니다. 모라디 님.
-가능한 다 갖고 와. 다른 마법사들한테 무시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기사 가문 출신들은 마법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다들 비슷한 고민을 했다.
내가 과연 따라갈 수 있을까?
다른 가문 출신들과 달리 평생 검만 잡고 휘둘러 온 만큼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자존심 강한 지젤은 무시당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마법학교에 들어가기 전 각종 책들을 읽으며 최대한 공부했다.
그리고 그 책 사이에 끼어있던 게 탈출지도였다.
-에인로가드 탈출지도...? 뭐 이런 게 있어?
학교를 빠져나가는 상세한 방법이 쓰여 있는 지도라니.
그걸 처음 봤을 때 지젤은 어이가 없었다.
에인로가드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학교가 아니었다.
제국에서 재능 있는 자들만 뽑혀서 들어가는 최고의 마법학교.
어떤 한심한 놈이 기껏 그런 기회를 잡고서 탈출하는 방법을 고민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 학교에 들어온 지 하루 만에 지젤은 그 지도가 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되었다.
아, 만들어질 만 하구나!
-에인로가드 탈출에 대하여-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은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로다. 너희 후배들은 나와 내 친구들이 갈고 닦은 이 길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갈지어다...
지도는 먼저 들어온 선배들이 후배들을 위해 자세하고 세심하게 작성되어 있었다.
이 지도만 있다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 * *
“산으로 움직인다.”
“과연...”
수풀 속에 엎드려 있던 이한 일행은 멀리서 횃불들이 일렁거리며 움직이는 걸 목격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산이었나?’
이한이 보기에, 마법학교를 빠져나갈 수 있는 루트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법학교 정면의 거대한 성벽이나 성문 쪽.
들어온 곳인 만큼 가깝고, 나가기만 하면 제국 가도(街道)를 따라 마을로 금세 갈 수 있었지만, 성벽이나 성문을 돌파하는 게 쉽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다른 하나는 마법학교 뒤쪽에 펼쳐진 거대하고 웅장한 산맥.
길게 이어진 성벽도 산맥 깊숙한 곳에서 끊겨 있을 테니, 잘 들어가기만 하면 우회해서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이한은 지젤이 방법을 안다면 후자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마법학교 뒤쪽에 펼쳐진 광활한 산맥은 밖에서 보기에도 삼림이 우거져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지도를 갖고 충분히 돌파할 수 있을 터.
그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움직인다. 따라가자!”
“어? 왜 산으로 가??”
가이난도는 당황하면서 뒤를 쫓았다.
당연히 성문으로 나갈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산 위로 올라가서 돌파한다.”
“어? 왜?!”
“거기에 길이 있으니까. 더르규. 가이난도를 부탁한다.”
“알겠다.”
더르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닐리아는 이 중에서 가장 산을 잘 타는 사람이었고, 이한과 더르규는 기사로서 꽤 훈련을 받았다. 요네르도 어렸을 때부터 연금술 재료 모으겠다고 이곳저곳을 쏘다닌 덕분에 걷는 데에는 자신이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가이난도!
“어? 뭘 부탁해??”
“내가 네 뒤에 있다. 황자. 코로 숨을 쉬고 발걸음을 멈추지 마라. 자!”
“어? 아니, 잠...”
의문을 풀려던 가이난도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더 이상 질문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헉헉헉헉헉.”
“자!”
“뭔... 자... 헉헉헉.”
“자!”
‘그만해...!’
달빛도 희미한 밤.
어둠 속에서 낯선 산길을 따라 걷는 건 많은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닐리아가 앞장서서 길을 확인하고, 장애물을 잘라내고 치워줬는데도 일행은 전부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한은 그 와중에도 길을 기록하려고 애썼다.
미친 교수 밑에서 혹독하게 단련된 덕분에 이한은 보이지 않아도 종이 위에 슥슥 지도를 그려나갔다.
“???”
옆에서 같이 걷던 요네르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혹시 <야간 시야> 같은 마법을 혼자 쓴 걸까?’
워다나즈 가문이라서 미리 배운 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묘기였다.
“앗. 이거 봐.”
“이게 뭐지?”
“수면초야. 가루를 내서 물에 타 마시면 잠이 잘 와.”
“챙기자.”
“응?”
“챙기자. 언제 쓰게 될지 모르니까.”
“이걸 쓸 일이 있어?”
요네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수면초를 챙겼다.
‘최소한 한 시간은 넘은 것 같군.’
“닐리아. 얼마나 온 거 같아? 한 시간은 걸은 것 같은데.”
“한 시간하고 10분.”
닐리아는 그렇게 대답하고 새삼스럽게 이한을 쳐다보았다.
사냥꾼도 아니면서 이 산 속에서 시간감각을 잊지 않다니.
그 순간, 이한은 온몸의 등골이 곤두서는 듯한 오싹한 감각을 느꼈다.
‘몬스터인가!? 아니, 닐리아가 확인했을 텐데? 설마 놓쳤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
그건 익숙한 해골의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