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화
-참. 선물을 주기로 했었지.
말하는 떡갈나무는 이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한의 발 앞쪽의 흙이 꿈틀거리더니 나뭇가지가 솟아나 엮이고 꼬이며 위로 자라났다.
어느새 나뭇가지는 기다란 마법지팡이의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
마법사들의 마도구, 아티팩트는 마법사의 손발과 같은 존재였다.
그 중에서 마법지팡이는 가장 중요한 아티팩트라고 할 수 있었다.
때로는 마법의 위력을 증폭시키고.
때로는 마법의 시전시간을 단축시켜주고.
때로는 쓸 수 없는 마법도 쓰게 만들어주는...
마법사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지금 마법학교의 1학년들은 모두 학교에서 만들어 준 기다란 스태프 형태의 마법지팡이를 쓰고 있었다.
별다른 특징도 개성도 없지만 이 마법지팡이의 장점은 매우 단단하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사람 키를 가볍게 넘길 정도로 길어서 이한은 이걸 나무 봉처럼 사용했다.
이 지팡이가 없었다면 우레걸음이 풀어놓은 돌연변이 돼지를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지팡이에 정이 들어서 바꿀 생각이 없는가?
“아니요?”
이한은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새 지팡이를 뽑아들었다.
도구는 도구.
그런 것에 감상적인 마음을 갖는 게 이상한 것이었다.
‘실험 장비 새로 바꿀 때 정 들어서 망설이는 사람도 있나?’
옆에서 더르규가 황당하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탁-
새 지팡이를 땅에서 뽑아들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싱그러움이었다.
땅에서 떨어진 나무지팡이에서 싱그러움을 느끼는 게 이상할 수도 있었지만 이한은 분명히 느꼈다.
-느낌이 어떻지?
“싱그러운... 느낌이 듭니다만.”
-!
말하는 떡갈나무는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지팡이에 적응한 것이다.
‘붙잡자마자 지팡이의 기운을 느낄 줄이야.’
원래라면 훨씬 더 오래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다.
지금 이한이 느낀 건 지팡이 안에 깃든 나무 정령의 기운이었다.
저 나무지팡이는 정령이 웅크리고 있는 지팡이였던 것이다.
새내기 마법사가 정령을 소환해내기 위해서는 온갖 수련과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하는 것처럼, 지팡이 안에 깃든 정령과 교감하고 힘을 꺼내는 것도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원래라면 몇 달은 지팡이를 잡고 휘둘러야 느낄 수 있었고, 그것도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좀 있어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탁월하군. 아무리 워다나즈 가문이라지만 저 정도 재능이라니.’
-훌륭하다. 그걸 느끼다니.
“그렇습니까?”
이한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떡갈나무를 쳐다보았다.
이 싱그러운 느낌을 받은 게 뭐가 대단한 건지 잘 감이 안 온 것이다.
안에 깃든 게 뭔지 모르니 당연했다.
-지팡이를 쓰다보면 그 지팡이 안에 깃든 힘을 알게 될 거다.
“혹시 지금 말해주시면 안 됩니까?”
-안 된다. 재촉하지 않아도 네 재능이라면 충분할 테니까.
말하는 떡갈나무는 슬슬 이한이 매우 독특한 신입생이라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가끔 신입생들 중에서 저런 또라이가 나오곤 했던 것이다.
겁 없고, 능력 있는 또라이들.
지금 이한의 모습은 마치 백 년쯤 전에 만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미치광이를 연상시켰다.
그보다는 훨씬 더 예의 바르고 침착하긴 했지만...
-자. 나는 다시 잠들어야겠다. 그리고 이제 이 숲 근처에서는 마법을 쓰지 마라. 네 마법은 너무 마력이 강해서 주변의 나무들을 전부 잠에서 깨우니 말이다.
“......”
‘설마 졸려서 내보내려고 대충 말한 건 아니겠지?’
이한은 갑자기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지팡이에서 싱그러운 기운이 느껴졌다는 말 한 마디 했다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는 게 뭔가 좀 이상했던 것이다.
지팡이에 깃든 힘을 바로 말해주지 않는 것도 살짝 수상했다.
졸려서 빨리 자려고 대충 말한 거 아니야?
그냥 내보내면 또 이 숲 근처에 와서 귀찮게 굴 수 있으니 적당한 지팡이를 하나 만들어줘서...
그러나 이한의 의심과는 별개로 공터는 닫히기 시작했다. 나무들이 움직이고 주변이 흐려지더니 점점 더 공터에서 멀어져나갔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말하는 떡갈나무의 목소리가 이한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가 말한 수수께끼를 기억해라. 그걸 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 * *
밖으로 돌아오자 다행히 언데드들은 모두 사라진 뒤였다.
이한 일행은 새벽의 여명이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는 사이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왔다.
다들 지칠 만큼 지쳐서 뭘 더 하기보다는 빨리 침대 위에 누워서 쉬고 싶어했다.
털썩!
이한은 푸른 용의 탑 안에 들어가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탈출이고 뭐고 일단 자고 일어난 다음 고민해 볼 생각이었다.
“...나즈! 워다나즈!”
몇 시간을 푹 잤을까, 누가 개인 침실 문을 두드리면서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뭐냐?”
이한은 하품을 하며 문을 열었다.
안경을 쓴 달카드 가문의 인간 소년, 아산이 앞에 서있었다.
“밖에서 교장 새, 아니, 선생님께서 행사를 진행하신대!”
‘나쁜 의미로 잠이 확 깨는군.’
이한은 그 말을 듣자 잠이 확 깼다.
교장이 행사를 진행한다니.
‘...설마 탈주 시도한 학생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찔리는 구석이 있어서 더 찜찜했다.
이한 일행이야 안 걸리고 돌아왔다지만 그 교장 성격에 뭔가 괴팍한 짓을 해도 이상할 것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참석을 안 하는 건 더 위험하다.’
이한은 잘 알았다.
원래 사고를 쳤을 때에는 더욱 더 평소 하던대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괜히 수상한 티를 내면 바로 들키는 것이다.
“알겠어. 요네르와 가이난도를 깨워서 나가야겠군.”
“다들 너무 늦게까지 자는 거 아니야?”
이한이 둘을 깨워서 탑 밖으로 걸어 나오자 벌써 태양이 머리 위까지 떠있었다.
셋은 하품을 하며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뒤를 쫓아 걸어 나갔다.
“!”
학교 본관 건물 앞에 떠있는 거대한 해골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왔다.
자, 자!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어서 와라! 어린 무쇠대ㄱ... 그릇들아! 환영한다!
“...??”
분위기를 보니 주동자 색출 작업 같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화기애애한 모임이나 행사에 가까웠다.
앞뜰에는 여러 천막이 설치되어 있었고, 사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선량한 미소를 띠며 착한 신입생들한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선물했다.
이한도 얼떨결에 사제가 준 쿠키를 받았다. 방금 막 구웠는지 쿠키는 따뜻하고 근사한 향을 풍겼다.
한 입 물자 바삭하고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잼이 새어나왔다.
‘뭐지? 학교가 망하나??’
이한의 당황을 눈치 챘는지 교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기쁜 주말을 맞아 제국의 여러 교단의 사제분들께서 학교를 방문해주셨다. 다들 기쁘겠지? 자. 박수!
짝짝짝짝짝-
신입생들은 웅성거리면서도 일단 박수를 쳤다. 사제들은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오수 고나달테스 님. 언제나 제국의 어린 마법사들을 가르치느라 고생이 많으실 텐데 이런 행사까지 허락하고 도와주실 줄이야.”
하하. 무얼요. 다 제 기쁨입니다. 황제 폐하께 말씀 잘 전해주십시오. 새로운 고대 마법을 발굴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예산이 필요한데...
“저, 저희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사제들은 해골 교장의 노골적인 말에 당황했다.
그러나 이한은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친숙함을 느꼈다.
‘어느 세상이든 간에 교수는 예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 없어 보이는 오만한 교수도 연구예산을 주는 사람 앞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었다.
해골 교장이 아무리 두려움이 없다 하더라도 예산을 지원해주는 제국의 황제 앞에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제들은 모인 학생들에게 말했다.
“미래에 뛰어난 마법사가 될 학생분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희는 제국의 여러 교단을 대표해서 나온 미천한 종들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저희 교단들을 소개해 줄 수 있다면 진실로 기쁘겠습니다.”
‘마력이 어마어마한데.’
이한은 사제들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에 놀랐다.
신입생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마력량이 전신에서 일렁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사제들의 마력은 특이했다.
신성한 기운을 품고 있는 마력이라니.
신기하지?
“!”
이한은 소름이 돋았다.
어느새 해골 교장이 인기척을 숨긴 채 이한의 옆까지 와있었던 것이다.
이해가 간다. 사제들의 마력은 신성력이라고 불릴 정도로 특이한 구석이 있으니까.
“예.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입니다.”
역시 사제들의 마력을 감지하고 있었구나.
‘젠장.’
이한은 실수를 깨달았다.
교장의 떠보는 말에 넘어간 것이다.
왜 그걸 숨기려고 하느냐? 뛰어난 재능이 있으면 자랑해야지. 여기 있는 무쇠대... 무쇠그릇들 중에서 그렇게 정확하게 마력을 탐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 같으냐?
해골 교장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마법사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고 드러낼 줄 알아야 했다.
그래야 돈 많은 귀족들에게서 돈을 갈취, 아니, 투자를 받아서 더 강하고 고등한 마법을 연구하고...
‘음. 당신이랑 엮이기 싫어서라고 말하면 뒤지겠지?’
이한은 생각을 삼켰다.
이한은 어디까지나 좋은 성적 좋은 인맥 쌓아서 졸업하는 게 목표였지 해골 교장과 함께 마법의 진리를 탐구하는 게 목표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는 상황.
“저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이 학교에 많을 테니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라니까? 앞으로는 만나는 학생마다 네 재능을 자랑하고 다니도록 해라. 마땅히 그래야 한다.
‘이거 미친 놈 아니야?’
교장이 말한 대로 하면 이한의 교우관계는 하루만에 가이난도 한 명만 남을 것이다.
다행히 해골 교장은 이한의 친구 관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는지 다시 화제를 돌렸다.
아마 워다나즈 가문은 신앙에 관심이 없었던 만큼 사제들을 만날 일이 없었겠지.
“예. 그랬습니다.”
제국에는 수많은 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교단이 있었지만, 마법사들은 원래 신앙과 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마법사들은...
나 또한 신앙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나는 신을 믿기에는 너무 똑똑하기 때문이지.
‘...이러니까 그렇겠지.’
해골 교장처럼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마법사들 중에서는 불신자들이 많았다.
실제로 이한의 아버지인 워다나즈 가문의 가주는 식사시간에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신성력은 마력의 일종이다. 다만 수많은 저능아들의 집단적인 믿음이 성질 변화를 일으켰을 뿐. 신성 마법이라는 것도 결국 마법의 일종이다. 왜 신성 ‘마법’이겠느냐?
-그렇다면 가주님. 신성 마법을 연구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은 생각이다. 네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고 싶다면 말이다. 수식과 이론을 배경으로 정교화된 진짜 마법에 비하면 신성 마법은 그냥 믿음과 감성에 취해 울부짖는 야만인들의 개짓거리지.
‘사제들 앞에서는 절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거 밝히지 말아야겠군.’
회상을 끝낸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선량한 사제들이라도 저 말을 들으면 없던 분노가 생길 것이다.
아마 워다나즈도 나와 생각이 비슷하겠지. 교단들도 참 한심하구나. 먹을 것 좀 챙겨준다고 들어갈 정도의 놈들이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놈들일 텐데. 이런 행사를 열다니.
해골 교장은 투덜거릴 상대가 필요했는지 이한 옆에서 연신 투덜거렸다.
묵묵히 듣던 이한은 입을 열었다.
“교장 선생님.”
왜?
“혹시 추천해주실 만한 교단들 있습니까?”
......
방금 말한 사람 무안해지게 만드는 반응에 해골 교장은 이한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잠깐, 교단들?’
교단이 아니라 교단 ‘들’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