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그나저나 말하는 떡갈나무가 무슨 수수께끼를 냈지?”
번개걸음은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 좀 이상하고 희한한 수수께끼들을 내더군요.”
그림자 수수께끼야 그렇다 쳐도 드워프와 촛불 수수께끼는 억지 그 자체였다.
“말하는 떡갈나무들은 말도 안 되는 수수께끼를 내긴 하지.”
번개걸음은 이해가 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는 떡갈나무들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상한 문제를 내면서 마법사들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유명했다.
경험 없는 마법사들은 풍채 좋은 말하는 떡갈나무들의 모습에 현혹되어서 그 수수께끼에 무슨 신비가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착각했지만, 그런 거 없었다.
말하는 떡갈나무들은 그냥 썰렁한 수수께끼를 좋아하는 썰렁한 정령들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런 거다. 세상 일이란 게 원래 대부분 알고 나면 허무한 법이지.”
번개걸음에게 설명을 들은 이한은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그 오크 잔치에 숨어 들어간 고블린 문제도 썰렁한 수수께끼였던 건가?
‘생각해보니 촛불 문제에 그런 낌새가 있긴 했다.’
“제가 들었던 수수께끼는...”
이한은 말하는 떡갈나무에게 들은 수수께끼들을 털어놓았다.
-여러 오크 부족들이 모여서 잔치를 열었는데 못된 고블린이 끼어들어서 진탕 먹고 마셨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쉽군. 정답은 오크로 변장해서다.”
“...네?”
“말하는 떡갈나무들의 수수께끼는 어렵게 생각하면 안 된다니까. 단순하게 생각해라. 고블린이면 오크들을 속이고 변장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겠지.”
“......”
이한은 황당함과 허무함을 참고 집중했다.
물론 어이없는 수수께끼긴 했지만, 이 수수께끼는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말하는 떡갈나무가 학교를 탈출하기 위한 힌트로 준 수수께끼 아닌가.
최소한 무슨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수수께끼의 뜻은, 변장하란 소리였나?’
너무 당연한 말이었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이 마법학교는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 아니었다.
당장 외부에서 다른 교단의 사제들도 학교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물자도 있다.’
마법학교에서 사용할 식료품부터 시작해서 각종 시약이나 재료들까지.
이런 것들은 밖에서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런 걸 옮기는 사람들은 보통 마법을 모르는 일꾼들일 터.
마법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이 학교를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
이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골 교장이 깔아놓은 캄캄한 어둠 속.
그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반짝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옆에서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의 얼굴을 보고 신기해했다.
분명히 지금 이 소년 마법사는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뭐지?
‘저 말하는 떡갈나무들의 썰렁한 수수께끼에서 어떻게 깨달음을 얻은 거지?’
숙련된 농부보다 밭일을 더 잘하는 것도 그렇고, 이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소년은 보고 있으면 질릴 일이 없을 정도로 신기한 녀석이었다.
* * *
이한이 텃밭을 가꾸고 나자 번개걸음 교수는 어디선가 닭 몇 마리를 구해다줬다.
우레걸음이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는 걸 보니 그 닭이 누구의 닭장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동물을 잘 길러라. 워다나즈. 동물을 잘 대해주면 언제나 보답을 받는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배고파서 돌멩이도 씹어 먹을 1학년 학생들한테 갓 낳은 달걀은 정신이 아찔해질 사치였다.
저 달걀들을 갖고 가면 기숙사의 왕이 될 수 있으리라.
“이것도 갖고 가고. 음. 이것도 좋겠군.”
번개걸음 교수는 새로 생긴 제자한테 뭐라도 챙겨주고 싶었는지 바구니에 이것저것 담아주었다.
달걀부터 시작해서 갓 수확한 싱싱한 양배추, 토마토, 양파와 감자, 버터와 치즈, 두툼하게 자른 사슴고기까지.
바구니에 담아줄 때마다 우레걸음의 얼굴에 패인 주름이 깊어지고 슬픔은 짙어졌지만 이한은 못 본 척했다.
“그러면 다음 수업 때 보자꾸나.”
‘졸지에 넉넉하게 먹게 생겼군.’
두 드워프와의 식사는 정신없긴 했지만 확실히 얻은 게 많았다.
지팡이의 비밀은 물론이고 학교를 빠져나갈 수 있는 힌트까지.
그리고 추가 식량은 덤이었다. 안 그래도 식량이 바닥나고 있었던 것이다.
‘나 이전의 다른 1학년들은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던 걸까?’
이한이야 교수 밑에서 이렇게 노동하고 음식을 받아왔다지만 다른 학생들도 그러지는 못했을 것 아닌가.
그냥 굶으면서 버텼나?
“워다나즈!”
“워다나즈가 왔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1학년 휴게실에 피곤하고 굶주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체스나 카드를 돌리면서 시름을 달래고 있던 학생들은 이한을 보자 뛸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이한의 팔에 걸려 있는 바구니를 보자 더더욱 기뻐했다.
“워다나즈! 내 명예로운 친구여!”
“제국에서 가장 명예로운 가문이여!”
‘내가 할 소리는 아니긴 하지만, 대귀족 가문 출신치고는 다들 너무 품위가 없긴 하군.’
하지만 이해가 갔다.
황족이든 거지든 배가 고프면 사람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한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각자 자기 방에서 뛰어나와 이한 앞에 몰려들었다.
마치 모이를 기다리며 어미새를 쳐다보는 아기새 같았다.
“다들 배가 고픈 모양이군. 기다려라.”
번개걸음한테서 받은 야채들과 고기들을 사용하면 제법 괜찮은 수프를 끓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모인 학생들이 한꺼번에 먹는다 하더라도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식사가 되리라.
이한은 벽난로 화롯불 위에 냄비를 올리고 사슴고기와 양파를 잘라 넣은 다음 노릇노릇하게 익을 때까지 볶았다.
그 다음은 야채였다. 이한은 능숙한 솜씨로 물을 붓고 토마토와 감자를 넣은 다음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췄다.
밖에서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미료도 지금 1학년들한테는 귀하디귀한 조미료였다.
토마토 때문에 붉은 기운을 띤 수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학생들은 이한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그만 끓이고 먹어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한은 단호하게 막았다.
‘이제 양배추를 넣어도 되겠군.’
양배추를 넣고, 버터도 좀 넣고, 다시 간을 맞추고...
엄숙한 표정으로 진지하게 요리를 진행하는 그 모습은 마치 숙련된 연금술사 같았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공손하게 자세를 고쳤다.
“다 됐다. 그릇 갖고 와라.”
“예!”
‘왜 존댓말을?’
이한은 의아했지만 캐묻는 대신 국자를 들고 그릇에 듬뿍듬뿍 퍼주었다.
소식을 듣고 온 요네르도 깃펜에 잉크를 묻혀가며 장부를 작성하는 걸 도와줬다.
“킬레넨 가문, 은화 여덟 닢... 가이난도, 은화 열한닢...”
“워다나즈. 은화 한 닢은 너무 푼돈 아니야?”
“조금 더 받아도 되지 않을까? 네 헌신에 비하면 너무 적은 돈인데.”
대귀족 가문의 소년소녀들은 금전감각이 부족했다.
그 모습에 이한과 요네르는 한탄했다.
‘저래가지고 나중에 독립하게 되면 어떻게 살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군!’
“저, 워다나즈.”
“?”
“황녀님한테도 좀 갖다드릴 수는 없을까?”
푸른 용의 탑 학생 두셋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마 아덴아르트의 추종자인 모양이었다.
그 말에 이한의 얼굴이 살짝 흐려졌다.
“그, 그게. 워다나즈. 꼭 강요하는 건 아니고...”
“네가 가이난도 황자와 친한 건 알지만 꼭 둘이 싸워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냥 황녀님도 먹을 만한 음식을 드셨으면 해서 그래.”
‘응?’
이한은 친구들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한이 황녀한테 음식을 가져다주는 걸 꺼려했던 이유는 이한이 가이난도를 지지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공짜로 음식을 주기 아까워서였다.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이난도 때문에 황녀님한테 음식을 안 드릴 생각은 없다. 그런 유치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워다나즈...!”
“역시!”
이한의 말에 학생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분도 좋아졌겠다 이한은 슬쩍 물었다.
“그런데 은화는 누가 내는 거지? 황녀님이 내는 게 맞나?”
“우리가 대신 낼게! 우리가 각자 두 배로 낼게.”
“고마워, 워다나즈!”
“아니... 그런 (돈이 썩어나는) 짓을 해도 되나?”
“네가 해주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푼돈이야. 워다나즈.”
“정말 고마워. 황자 때문에 신경 쓰일 텐데.”
학생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 모습에 이한은 놀랐다.
황녀를 위해 자기 돈을 대신 쓰는 것에 놀랐고, 흥정해도 모자랄 판에 돈을 더 늘리는 금전감각에 놀랐고, 가이난도를 고평가하는 모습에 놀랐다.
‘가이난도는 황족으로서 자기 파벌 만들고 굴릴 수 있는 정치력이 0에 가까운데.’
뭔가 서로 오해가 많았지만 상대가 이한을 좋게 봐주는데 굳이 해명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황족들끼리 다 친하게 지냈으면 해. 제국을 위해서.”
“워다나즈...!”
“너란 녀석은...!”
* * *
이한은 수프 그릇을 들고 황녀의 개인실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에 아덴아르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
아덴아르트는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무슨 이유로 왔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이한은 따끈따끈한 그릇을 내밀며 말했다.
“휴게실에서 요리를 했는데, 조금 드시죠.”
아덴아르트는 바로 받는 대신 조금 머뭇거렸다. 이한이 무슨 생각인지 알지 못해서 망설이는 모양이었다.
이미 아래에서 가이난도에 관한 오해를 들었기에, 이한은 오해를 풀기로 했다.
“다른 학생들도 전부 받아갔습니다. 드셔도 괜찮습니다.”
사실 은화 받고 받아간 거지만 이한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아덴아르트는 방금 머뭇거린 것만큼 더 망설이다가 결국 그릇을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받았다.
배고픔이 망설임을 이긴 모양이었다.
감사의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 아덴아르트는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떠서 입에 집어넣었다.
한 숟갈 두 숟갈 뜨고 나서 점점 속도가 빨라지는 걸 보니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들어가셔서 드셔도 됩니다만.”
이한의 말에 아덴아르트는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을 멈췄다.
“......”
그리고는 고개를 한 번 더 꾸벅 숙인 다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괜히 말했나?’
이한이 휴게실로 내려오자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고마움을 표했다.
“워다나즈. 황녀님은...”
“아. 마음에 드신 것 같더군.”
“대단해! 넌 정말 뛰어난 연금술사야!”
‘그냥 굶으면 뭘 줘도 잘 먹을 것 같은데...’
“앞으로도 계속 부탁해도 될까? 우리가 은화를 낼 테니까 음식이 생기면 황녀님한테도 좀 갖다드렸으면 좋겠어.”
“...제국의 황실을 향한 헌신은 귀족으로서 명예나 마찬가지지.”
이한의 입에서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이한 본인도 놀랐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황족은 정말로 대단하군.’
단순히 혈통만으로 이렇게 추종하는 사람이 몰리다니.
새삼스럽게 핏줄의 힘이 느껴졌다.
물론 가이난도는 좀 예외고...
* * *
본관 지하 1층에서 진행되는 <기초 마법전투의 반복적 학습>.
뱀파이어 교수, 볼라디 배그렉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표정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지금 유일하게 남은 저 한 명의 학생.
저 학생이 이 강의를 계속 듣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참으로 어렵군.’
원래 볼라디 교수는 학생이 강의를 듣게 만드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볼라디 교수의 계약 내용은 여기서 강의를 하는 거였지, 학생들을 모으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예외적이었다.
상당한 마력량을 가진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
저 소년 같은 인재를 또 구할 수 있을까?
만약에 이번에 놓친다면 강의의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는 건 또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다음에 올 학생이 저 소년만한 자질을 갖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었고.
고민한 끝에 볼라디 교수는 입을 열었다.
“혹시 궁금한 게 있나?”
“...예?”
구슬 돌리기에 집중하던 이한은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왜 질문이지?
혹시 날로 먹으려는 이한의 시꺼먼 마음이 들키기라도 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