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화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잖아?’
이한은 상대가 무슨 짓을 하나 유심히 지켜보았다.
상대는 쥐 수인족 소년이었다. 키가 작고 살짝 등이 굽어 있었지만 발걸음은 소리 하나 나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이한은 상대가 특수한 훈련을 받은 게 아닌가 의심했다.
늙은 기사 알라르롱이 말한 것처럼 발걸음은 상대의 신분을 말해줄 때가 많았다.
기사의 발걸음, 마법사의 발걸음, 사냥꾼의 발걸음, 도둑의 발걸음...
그리고 저 발걸음은 도둑의 발걸음에 가까웠다.
‘쥐 수인족들은 제국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편이긴 한데.’
제국의 모든 종족이 평등하다고 말은 해도 진실로 그러기는 어려웠다.
실제로는 인기 있는 종족과 없는 종족이 나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쥐 수인족들은 후자였다.
도둑이나 부랑자, 소매치기나 넝마주이들이 많은 탓에 언제나 제국 사람들의 의심어린 눈초리를 받는 종족.
그게 바로 쥐 수인족들이었다.
‘내 편견이겠지. 쥐 수인족이라고 무조건 다 도둑질을 하러 다닐 리는 없을 테고.’
이한은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고 생각했다.
쥐 수인족이라고 다 도둑 훈련을 받은 사람은 아니지 않겠는가.
짤깍─
“......”
그러나 상대는 허리춤에서 투박하고 조잡한 가짜 열쇠를 꺼내더니 잠긴 문에 대고 열심히 돌리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의도가 뻔해보였다.
‘하긴 나도 남 욕할 때가 아니군.’
이한도 지금 학교 교칙 어겨가면서 빠져나갈 방법 찾고 있는 상황인 만큼, 다른 사람을 비난할 수 없었다.
오히려...
‘협력하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열쇠까지 만들어서 갖고 온 걸 보니 상대는 오늘 처음 나온 게 아니었다.
학교를 빠져나가려는 학생이 이한뿐일 리가 없는 것이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상대가 놀라서 소리라도 지르면 이한까지 같이 망할 테니까.
슥-
이한은 정신없이 집중한 쥐 수인족 소년의 뒤에 조용히 멈춘 다음, 목에 지팡이를 겨누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봐. 큰 소리 내면 죽는다.”
“...!!”
* * *
랫포드는 입학하기 전부터 도둑 길드, <흰 까마귀> 소속의 프로 도둑놈이었다.
사실 랫포드는 자신이 마법학교 입학 제안을 받았을 때부터 믿기질 않았다.
아무리 자질이 있다지만 도둑까지 학생으로 받아주려 하다니.
다행히 검은 거북이의 탑 학생들은 랫포드를 따돌리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랫포드 본인이 묘한 소외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소년소녀들과, 밤의 골목을 누비며 도둑질을 연마한 랫포드는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랫포드는 자신만의 능력으로 뭔가 보여주고 싶어졌다.
사냥꾼 출신인 닐리아가 그랬듯이(물론 랫포드는 자기 같은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능력으로 같은 탑의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랫포드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넓은 학교인 만큼 주방이나 창고들이 있을 거다. 거길 찾아서 털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넉넉한 음식과 각종 생필품들을 챙길 수 있어!
다른 학생들이 별 생각 없이 복도를 지나 강의실을 갈 때 랫포드는 남의 눈치를 봐가며 중앙 계단 뒤쪽 구역의 열쇠구멍을 조사했다.
손가락 끝의 감각만으로 열쇠구멍 안을 조사한 다음, 즉석에서 간이 열쇠를 만들어 문을 따는 건 어지간한 도둑도 할 수 없는 난이도 높은 곡예였지만...
랫포드는 남는 시간을 다 쏟아 넣은 끝에 결국 성공한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영광밖에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이런 기습이라니.
‘누... 누구...’
상대가 누군지는 뻔했다.
이 학교를 지키는 경비가 분명했다.
프로 도둑놈들은 언제나 이런 상황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랫포드는 조심스럽게 양손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다음 최대한 비굴하게 말했다.
“때, 때리지 마십시오. 항복하겠습니다.”
같은 도둑놈이라 하더라도 잡혔을 때 잡아떼고 발광하는 놈과 순순히 인정하는 놈은 맞는 매의 횟수부가 달랐다.
이미 잡혔다면 차라리 인정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선택인 것이다.
“쉿. 나도 너처럼 몰래 나왔다.”
“...?!”
그제야 랫포드는 뒤를 돌아보았다.
사제복을 입은 건장한 소년이 랫포드의 목에서 지팡이를 치우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같은 신입생이었어!?’
랫포드는 기가 막혔다.
하도 살벌하게 협박을 해서 랫포드는 당연히 경비인 줄 알았던 것이다.
아니, 같은 신입생 놈이 ‘큰 소리 내면 죽는다’같이 살기등등한 협박을 하다니...
“이게 무슨...”
“목소리 줄이라니까.”
“넌 누구냐?”
물어보면서도 랫포드는 상대가 누군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키 크고 단단한 체격에, 이렇게 다가와서 지팡이를 무기처럼 다루는 솜씨까지.
흰 호랑이 탑 출신 학생 중 한 명이 분명했다.
‘사제복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머리가 좀 돌아가는 놈인데?’
사제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의심을 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까지 근육덩어리인 기사 출신이 저런 기지를 발휘할 줄이야.
“푸른 용의 탑, 이한 워다나즈다.”
“......”
랫포드는 경악해서 입을 벌렸다.
* * *
랫포드는 생각보다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사실 완전히 납득한 건 아니었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대체 이 밤에... 뭘... 아니, 사제복은 어떻게...’
하지만 지금 상황이 워낙 촉박한지라 그냥 받아들이고 넘어가기로 한 것이다.
무엇보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꺼낸 제안이 더 충격적이었다.
“같이 움직이자고?”
“무슨 일이든 2인 1조가 더 효율적이지. 혼자서 움직이는 것보다는 같이 움직이는 게 너한테도 괜찮지 않겠어?”
“...내가 누군지 안 보이냐??”
랫포드는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 질문에 이한은 멈칫했다.
“혹시 교장 아들이라도 되나?”
“......”
물론 당연히 교장 아들은 아니었다.
랫포드는 어이가 없었다.
눈이 있다면 랫포드가 쥐 수인족 출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기에 이런 한밤중에 가짜 열쇠를 짤깍거리며 문을 따려고 하지 않았는가.
머리가 있다면 ‘아, 도둑놈이구나!’라는 걸 알아봐야 했다.
“딱 봐도 도둑놈이잖아!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높으신 분께서 나 같은 도둑놈하고 같이 다니자는 거냐?”
“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건 뭘로 보이냐?”
“......”
이한의 질문에 랫포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러게?
“같이 움직이자고?”
“그래. 식료품 창고를 찾고 있었겠지? 나도 마찬가지다.”
“!”
랫포드는 한 차례 경악한 다음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진짜 워다나즈 가문 출신 맞냐?”
랫포드는 수상쩍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이 움직일 거냐. 아니면 널 쓰러트리고 나 혼자 움직일까?”
“진, 진정해. 진정하라고. 같이 움직이자. 한 명보단 두 명이 낫지.”
랫포드는 이한의 지팡이가 위협적으로 들이밀어지자 다급히 손을 내저었다.
다른 건 몰라도 맞붙었을 때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확실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래서. 열쇠를 준비했던 건가?”
“그래.”
“열리기는 하고?”
“안 열려. 원래라면 열려야 하는데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것 같아.”
랫포드는 초조하게 열쇠구멍을 쑤셨다.
만약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는 거라면 랫포드도 열 방법이 없었다.
도둑의 보물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여기는 완전히 맨몸이니...
철컥!
“?”
이한의 주머니에서 열쇠 하나가 날듯이 솟아오르더니 그대로 열쇠구멍에 꽂혔다.
그리고는 빙글 돌더니 문을 열었다.
“???”
“어, 어디서 난 열쇠야?”
“교장 사무실에서 훔친 열쇠군.”
“농... 농담이냐?”
“아니. 진짠데.”
저번에 아산과 남아서 뒷정리를 하면서 마법만 배운 게 아니라 열쇠도 하나 챙겨놨었던 것이다.
무슨 열쇠인가 했었는데, 여기 중앙 현관 뒤쪽 구역 열쇠였나?
‘...조심 좀 해야겠군.’
교장이 두고 간 열쇠라면 절대 방심할 수 없었다.
이한은 이 행운에 방심하지 않으리라고 굳게 다짐했다.
사람 한 명 없는 텅 빈 연회장을 지나고, 대형 홀도 지나고, 몇 개의 닫힌 문을 지나고...
“잠깐.”
랫포드는 갑자기 바닥에 엎드렸다.
“지하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소리가 들려.”
“...!”
이한은 그 순간 일꾼들이 어디로 들어오는지 알 것 같았다.
‘지하구나!’
지상에 있는 정문이나 성벽 통로로 오가면 학생들의 눈에 띌 뿐만 아니라, 학생들이 그걸 이용하려고 들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지하 통로로 들어오고 나가면 학생들은 쉽게 알아낼 방법이 없었다.
어쩐지 학생들이 그렇게 돌아다니면서도 일꾼 그림자도 못 본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놈의 학교는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지하 쪽 창고에서 떠드는 게 분명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봐!”
“과, 과연...”
랫포드는 이한의 말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하로 통하는 계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둘 앞에 나타났다.
끼이익─
계단 하나만을 내려왔을 뿐이었지만 공기가 달라졌다.
위에서는 그래도 창문 사이로 달빛이 들어왔지만, 여기는 서늘한 어둠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한은 빛을 불러올까 고민했다.
그러나 이한의 본능이 그런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막았다.
무엇보다 교장의 사무실에 있던 열쇠가 문을 열어줬다는 사실이, 이한의 경계심을 올린 것이다.
‘이제까지 본 교장의 성격이라면, 이런 곳에 함정 몇 개는 설치해놔도 이상하지 않다.’
옆에서 랫포드가 부스럭거렸다. 이한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불 켜지 마라.”
“...?”
“누군가 대기하고 있을 수도 있어.”
“!”
랫포드는 이 워다나즈 가문 소년의 말에 깜짝 놀랐다.
확실히 여기는 뭐가 있는지 모르는 미지의 장소였다. 낯섦과 초조함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불을 붙이려고 했던 것이다.
이한이 말하지 않았다면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아니, 근데 진짜 뭐냐??’
워다나즈 가문 출신 소년에 대한 소문은 랫포드도 검은 거북이 탑 안에서 몇 번 들은 적 있었다.
-피도 눈물도 없다던데? 벌써 푸른 용의 탑을 카리스마로 휘어잡고 있나봐.
-황자도, 황녀도 워다나즈 가문 앞에서는 숨을 쉬지 못한대.
-저번에 마법 수업에서 봤는데, 남들이 몇 번 해도 실패하는 걸 한 번에 성공하더라.
-탈 것 수업에서 천둥새가 덤벼드는데 마법으로 제압해서 굴복시켰대. 그게 믿어져?
처음에는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같은 신입생인데 너무 심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 보게 되자 랫포드는 소문이 과장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풍겨내는 위압감이 장난이 아니다!
훅!
“!”
멀리서 등불이 번쩍이더니 그 주변이 밝아졌다.
이한과 랫포드는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자세를 수그렸다.
어두울 때는 몰랐는데, 이 지하 공간 전체가 거대한 창고 같은 곳이었다.
선반들과 탁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서있고 온갖 물건들이 그 안에 꽉꽉 들어차 있는 게 어렴풋하게 들어왔다.
창고지기는 천천히 등불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적막 덕분에 창고지기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생생히 들려왔다.
“치즈... 8개. 확인. 메이플 시럽... 5병. 확인. 백화지(白火紙)... 22장. 확인. 영은침(靈銀鍼)... 3개. 확인.”
‘숫자를 다 외우고 있다!’
“경보 마법이 약해졌군. 다시 걸어야지.”
마력의 파동과 함께 창고지기가 물건 위에 마법을 거는 게 느껴졌다.
이한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모든 물건에 경보 마법이 걸려 있다니.
이것도 모르고 멋대로 물건을 건드렸다가는 징벌방으로 끌려갈 뻔했던 것이다.
“누구십니까?”
“!”
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창고지기가 정확히 둘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던 것이다.
‘각도상 보일 리가 없을 텐데?’
이한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상대가 어떻게 알아차린 것일까? 혹시 떠보려는 것일까? 지금 투명화 마법을 써도 늦지 않을까?
“...!”
이한은 천천히 다가오는 창고지기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놀랍게도 창고지기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장님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