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화
진짜 프로 도둑놈의 마음가짐은 일반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교장과 교수들이 와서 현장 점검하고 있는데 그 사이 자물쇠를 따고 물건을 꺼내다니.
유리로 된 플라스크에는 총천연색의 물약들이 담겨 있었다. 이한은 그 안에서 발산되는 복잡하고 다양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무슨 물약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그렇군.”
생각해보니 랫포드는 프로 도둑놈이었지 프로 연금술사가 아니었다.
적당히 되는 대로 집어온 거지 뭘 알아보고 챙긴 게 아닌 것이다.
‘나도 하나도 모르겠군.’
이한도 나름 워다나즈 가문에 있을 때 이것저것 책 읽고 선행학습을 했던 사람이지만, 아무런 표시 없는 물약만 보고 정체를 알아보는 건 무리였다.
“요네르. 좀 알겠어?”
“이건...”
요네르가 플라스크 하나를 집어 들더니 신중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술 같은데?”
“...말도 안 돼.”
“포도주 같아.”
요네르는 코르크로 된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더니 향을 맡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포도주야.”
“......”
“그래도 다른 건 마법 물약이 맞는 거 같은데? 뭔지 알려면 도서관 가서 찾아봐야 할 것 같지만...”
“그나마 다행이군.”
랫포드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과 메이킨 가문 출신이 도둑질한 물약을 갖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모습에 놀라지 않았다.
윗사람이 하는 일에 건방지게 의문을 품으면 안 되는 것이다.
‘도둑질한 물약들도 쓰실 만큼 그릇이 넓으시군.’
“고맙다. 랫포드. 잘 쓸게.”
“아닙니다. 바치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면 불러만 주십시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참. 같이 말 돌볼래?”
아침 일찍 마구간에 온 만큼 랫포드도 말들과 친해지면 좋을 것 같았다.
이한의 제안에 랫포드는 고개를 숙였다.
“예. 영광입니다.”
“영광은 그만하고.”
“광영...”
“그만해라.”
“옙.”
털썩-
“?”
누군가 뒤에서 뭘 떨어뜨린 소리가 났다. 이한은 고개를 돌렸다.
닐리아가 충격 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새, 새 친구를... 사귀었구나...”
배신 받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려는 닐리아의 모습에, 이한과 요네르는 후다닥 달려갔다.
* * *
“뭐야. 그런 거였어? 말해주지. 내가 그런 걸로 오해할 사람도 아니구.”
“......”
“......”
이한과 요네르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교환했다.
‘방금 오해하려고 하지 않았나?’
‘분명히 오해하려고 했어.’
다행히 닐리아 대신 랫포드를 새로운 검은 거북이 탑 출신 친구로 삼으려고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는 풀렸다.
랫포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친구가 아니라 부하...읍읍.”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군.”
이한은 말의 털을 손질해주는 솔로 랫포드의 입을 막았다.
“자. 다 같이 말이나 돌보자고.”
마구간 안에는 말들과 친해지려고 온 학생들이 몇 명 더 있었다.
번개걸음 교수가 ‘말들과 친해져라’라고 말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잠을 깨서 올 정도로 성실한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말들은 그런 성실한 학생들에게도 가차 없었다.
“악! 그만 뱉어 좀!”
“말 좀 들으라고! 왜 그러는 건데! 뭐가 불만인 거야!”
말들은 박치기를 하고 침을 뱉고 푸르릉대며 학생들의 손을 물려고 들었다.
그러나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원래 말 잘 듣는 실험동물은 없는 법이지.’
물론 말들이 거칠긴 했지만 이 정도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었다.
몰래 도망치거나 자기 똥을 던지는 일은 없지 않은가.
“자. 털을 빗어주마.”
-푸흥!
번개걸음 교수가 맡긴 흰 말은 이한을 노려보았다.
접근하는 순간 한 대 때리겠다는 의도가 매우 노골적으로 엿보였다.
그러나 이한은 아랑곳하지 않고 접근했다.
쉭!
흰 말이 박치기를 시도했다. 이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몸을 뒤로 젖혀서 피했다.
흰 말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이한이 피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퉷!
흰 말이 이번에는 침을 뱉었다. 이한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했다.
“그래그래. 착하지.”
와그작!
흰 말이 물려고 들었지만 이한은 옆으로 비켜서며 흰 말에게 다가섰다.
그래도 흰 말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리가 묶여 있어서 발차기는 하지 못해도 가능한 온갖 지랄을 모두 시도했다.
이한은 그런 공격을 피해내고 막아내고 버텨냈다.
뒤에서 보고 있던 닐리아는 감탄할 뿐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참을 수 있지?’
닐리아였다면 벌써 욕이 나오거나 아니면 채찍이 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한은 화를 내는 대신 ‘그래그래’하며 말을 계속해서 달래고 있었다.
저게 대귀족의 품격인가??
* * *
-푸르륵...
한참 동안 날뛰던 흰 말은 지쳤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이한은 그제야 솔을 들고 흰 말의 털을 빗어줄 수 있었다.
흰 말은 빗질을 당하면서도 이한을 노려보았다. 체력만 회복되면 다시 날뛰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이 말 진짜 다른 몬스터의 피가 섞인 거 아닌가?’
이한은 유난히 끈질긴 흰 말을 보고 의아해했다.
다른 말들은 이렇게까지 독한 것 같진 않은데...
덜커덩!
“됐, 됐다.”
옆에서 한참을 씨름한 요네르가 진흙투성이가 된 채 해맑은 얼굴로 걸어 나왔다.
닐리아나 랫포드도 꽤나 험한 꼴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말을 들어주기 시작했어.”
“나도 꽤 친해진 것 같아.”
둘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돌려 흰 말을 쳐다보았다.
흰 말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홱 돌렸다.
원래 어린 학생이라면 이 끈질긴 말의 반항에 분노하거나 포기했겠지만...
‘뭐 언젠가는 포기하겠지.’
이한의 마음은 호수처럼 평온했다.
흰 말이 아무리 지랄을 하더라도 교수보다 더할까.
이한은 그저 감정을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빗질을 끝낸 이한은 사료를 섞어서 흰 말 앞에 내놓았다. 흰 말은 우적우적 먹으면서 이한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이걸로 넘어갈 거란 생각은 하지도 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산책을 데리고 나갈 생각인데.”
닐리아는 진흙을 털어내며 말했다.
원래 말들을 돌볼 때 산책은 필수였다. 주기적으로 산책을 나가줘야 말들도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친해지려는 입장에서도 산책은 도움이 됐다.
계속 같이 돌아다니면 아무리 까탈스러운 짐승이라 하더라도 마음을 열 수밖에 없었다.
‘으음.’
그러나 이한은 흰 말이 과연 얌전히 따라올지 의문이었다.
지금도 계속 공격해오는데 넓은 공간으로 산책을 나가면 훨씬 더 다양한 공격을 시도하지 않을까?
“흠...”
이한은 자신이 차고 있는 쇠 팔찌와 허리띠를 내려다 본 다음, 다시 한 번 흰 말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에 흰 말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 * *
“나 왔다!”
“......”
우레걸음은 표정관리를 하며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있던 번개걸음이 양철 잔을 들고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차 좀 끓여라!”
“제가 탄 차를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
“참고 마실 테니까 괜찮아!”
“......”
우레걸음은 슬픈 표정으로 주전자를 끓였다. 이한이 없다는 게 이렇게 슬플 줄은 몰랐다.
“신입생들이 열심히 마구간을 돌보고 있더군.”
번개걸음은 뜨거운 차를 호쾌하게 들이키며 말했다.
연금술과 조련술 모두 적용되는 재능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성실함이었다.
<기초 탈 것 훈련> 수업에서 일부러 성질 더러운 말들을 모아놓고 친해지라고 한 이유는 하나였다.
신입생들에게 성실함을 가르치기 위해서.
낯선 동물들과 친해지기 위한 조건들은 많았지만 그 조건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게 성실함인 것이다.
성실하지 않으면 어떤 동물들과도 친해질 수 없다.
“일부러 말들의 성질을 더럽게 만들어놨지만, 정성을 들이고 아껴준다면 녀석들은 곧 진정하고 마음을 풀 거다. 하지만 정성을 들이는 대신 힘으로 채찍질해서 길들이려는 놈들은 아주 호된 맛을 보게 되겠지.”
이런 과제를 내면 학생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었다.
성실하게 아침부터 나와 말들과 친해지려는 학생들.
그리고 건방지게 하던 버릇대로 박차와 채찍으로 말을 제압하려는 학생들.
번개걸음이 준비한 말들은 절대 그런 방법으로 제압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불성실한 학생들은 따끔한 맛을 보게 되리라.
“크핫-핫핫하!”
“......”
번개걸음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잔을 내려놓자 우레걸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생들 괴롭히는 걸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우레걸음은 자기가 이한에게 번개걸음과 비슷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나는 다르지!
“워다나즈 녀석은 잘 하고 있습니까?”
“아. 워다나즈. 성실한 녀석이니까 잘 하겠지. 물론 그리폰이 좀 까다롭긴 한데. 성실함과 영리함, 약간의 행운이라면 충분히 친해질 수 있을 거다.”
“?”
우레걸음은 차를 따르다가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한 거지?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가?”
“방금... 그 뭐시기라고 하셨잖습니까.”
“잘못 들었겠지. 말이라고 했다.”
“......”
우레걸음은 충격과 공포가 섞인 얼굴로 번개걸음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리폰을 말로 변신시켰...?
“아니죠?”
“뭐가?”
“......”
‘아니. 진정하자. 그냥 말 이름이 그리폰일수도 있잖나.’
우레걸음은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폰.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 사자의 발톱과 다리를 가진 비행 몬스터.
오만하고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데다가 주인을 엄청나게 가리는 난폭한 놈이었다.
어느 지역에 사느냐에 따라 성격과 습성이 좀 나뉘긴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신입생이 길들일 만한 건 아니다!!
“말 이름이 뭡니까?”
“그ㄹ... 폰리그.”
“...진짜 미치신 거 아닙니까!??!”
결국 참다 못한 우레걸음은 폭발했다.
안 그래도 지금 부상으로 하루 쉰 우레걸음의 연금술 제자한테 무슨 미친 짓을 시킨단 말인가.
“이 조카 놈이 돌았나! 왜 잘 마시다가 난리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폰을 말로 변신시켜요!?”
“내가 언제 그랬나! 증거 있어? 그리고 설령 변신시켰다 하더라도 말로 변신시켰으면 안전하지 않겠냐!”
“그리폰 지능이 무슨 슬라임으로 보입니까!?”
오두막 안에서 잔 깨지는 소리, 의자 날아가는 소리, 탁자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흔한 드워프식 집안싸움이었다.
* * *
-푸흐흐흐흐흐흐흥...
“녀석.”
이한은 흐뭇한 표정으로 흰 말을 쳐다보았다.
아까 그렇게 지랄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흰 말은 고분고분하고 얌전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한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갖고 있던 마력 흡수의 쇠 팔찌와 마력 흡수의 허리띠를 모조리 말에게 채워버린 것이다.
“역시. 마력을 흡수시키니 좀 고분고분해지는군.”
생물은 모두 어느 정도 마력을 갖고 태어나는 만큼, 마력이 흡수되면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한이 차고 있던 아이템들을 모조리 대신 장착한 흰 말은 기운이 쭉 빠져서 반항할 여력도 내지 못했다.
“그래.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푸흐흥...
흰 말은 이한이 고삐를 끄는 대로 얌전히 끌려갔다.
그 모습을 보자 이한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런데 팔찌하고 허리띠를 다 찼는데도 걸을 정도면, 말의 마력량이 생각보다 많은 것 아닌가?’
팔찌나 허리띠의 흡수량이 적거나 아니면 말의 마력량이 많거나.
‘진짜 몬스터의 피가 섞였어도 마력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텐데. 생각보다 장비들이 가져가는 마력량이 적나?’
이한은 생각에 잠긴 채 말을 데리고 걸어갔다.
앞에서는 학생 몇 명이 섣불리 말에 탔다가 엉엉 울며 빌고 있었다.
-내려, 내려줘!! 제발! 내가 잘못했어!
‘흡수하는 마력량을 늘릴 방법이 없을까?’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해진 마법학교의 일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