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7화
그제야 우레걸음은 저번에 가르시아 교수한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한 학생은 마력이 많더라구요.
-그렇게 말할 정도였소? 어느 정도길래?
-양 팔로 크게 원을 그려보세요.
-와. 상당한 수준이군.
-그걸 뺀 만큼?
-......
미친놈처럼 마력이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마력 포션을 먹어도 회복되는 걸 못 느낀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교수님.”
“...아니다. 됐다. 어쨌든 잘 만들었다. 칭찬해주마. 자! 여기 완벽하게 물약을 만든 학생이 나왔다.”
“워다나즈...!”
“역시 워다나즈 가문인가?”
다른 학생들은 이한의 모습에 놀라기보다는 ‘워다나즈라면 확실히’ ‘저 정도 천재라면 별로 놀랍지 않다’ 같은 반응을 보였다.
수군거리는 그 반응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뭐야. 왜 이렇게 거품이 꼈지?’
이한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한 본인은 천재가 아니었다. 그냥 오랫동안 실험실에서 굴러서 남들보다 노ㅇ... 아니, 학생 생활에 익숙할 뿐.
그런데 천재 취급을 받으니 좀 당황스러웠다.
언제 이렇게 됐지?
“역시 워다나즈. 천재적이군.”
약간 흐릿한 푸른색의 물약을 플라스크에 옮겨 담던 아산은 감탄했다.
아산의 물약도 제법 괜찮았지만 이한과 비교하면 그 완성도가 아쉬워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저기 불사조 탑의 시아나가 만든 물약도 뛰어났지만 너보다는 못한데? 저기 봐.”
“!”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사제복을 입은 뱀 수인족 학생이 꽤 선명한 푸른 물약을 들고 있었다.
‘플레맹 교단?’
요네르가 설명해준 적이 있어서 이한은 금세 알아보았다.
연금술을 숭배하는 교단, 플레맹 교단.
당연히 교단의 사제들은 다 뛰어난 연금술사들이었다.
그런 만큼 시아나란 학생이 뛰어난 물약을 만든 것도 당연했다.
슥-
시아나는 이한과 아산 쪽으로 걸어오더니 손을 내밀었다.
“워다나즈 가문이죠?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아나라고 해요.”
“반갑군.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이한이다.”
이한은 상대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뱀 수인족이라 그런지 차갑고 서늘했다.
“이렇게 뛰어난 연금술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워다나즈 가문에서 배운 건가요?”
“어이. 이제 그만 떠들어라.”
우레걸음 교수가 말을 끊었다. 어느새 교수는 강의실 앞으로 돌아가 있었다.
“오늘 <하급 마력 회복 물약>을 다들 만들어봤을 거다. 어떤 녀석은 처음인데도 잘 만들었을 거고, 어떤 녀석은 서투르게 만들었겠지. 하지만 이런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마라. 이건 연금술의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 너희 앞에는 복잡하고 기기묘묘한 연금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확실히 교수들은 다들 학생의 의욕을 없애는 데에는 재주가 뛰어나.’
“다음 주까지 과제를 주마. <하급 정령 친화의 물약>을 만들어 와라. 자신이 만들어 온 것으로 직접 테스트를 해볼 테니 신경 쓰는 게 좋을 거다.”
학생들은 열심히 깃펜을 놀려가며 메모했다.
다행히 우레걸음 교수는 <하급 정령 친화의 물약> 만드는 제작법을 알려주었다.
신입생들한테 ‘제작법도 너희가 연구해서 알아보려무나’같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교수님. 지금 여기엔 진화령초가 없는데... 어디에 있나요? 위층에 있나요?”
선반과 서랍에서 재료를 찾지 못한 학생들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우레걸음도 똑같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슨 소리냐? 너희가 찾아야지.”
“아. 그런가요? 저희가 찾아보겠습니다.”
우레걸음의 말에 학생들은 주변을 뒤지려고 일어섰다.
“아니. 아니. 여기 말고.”
“??”
“저기.”
우레걸음은 창문 밖을 가리켰다.
본관 뒤편의 울창한 산맥이 학생들을 맞이했다.
“......”
“......”
“가서 찾아와야지. 내가 첫 강의 때 뭐라고 했는지 다들 기억하리라 믿는다.”
학생들의 얼굴은 절망과 분노로 일그러졌다.
* * *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교수는 우레걸음만이 아니었다.
마법학교의 교수들은 누가 누가 더 과제 많이 내기 시합이라도 하는지 각자 맡은 강의마다 환장할 분량의 과제를 내줬다.
-여기 책들을 가져가서 읽고, 책들 안에서 논리의 허점을 다섯 개 이상 찾아오도록.
-교수님. 책 숫자가 부족합니다. 학생들이 나눠가지려면 좀 더 필요할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냐? 그건 한 명 몫이다. 책을 전부 들어 올려라. 그럼 밑에서 새 책이 생겨날 테니까.
-......
열 몇 권은 족히 넘는 것 같은 분량에 학생들은 기겁을 했다.
-교수님. 이걸 들고 가기에는...
-걱정할 것 없다. 너희들을 위해 경량화 마법을 걸어놨으니까. 빨리 책 가지고 가라.
몇몇 흰 호랑이의 탑 학생들을 진지하게 울먹이게 만든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강의.
-내가 젊은 시절에 제국에 제출했던 마법진 제작 설계서다. 이 설계서를 보고 총 비용이 얼마나 들었을지 계산해오도록. 정확한 정답을 맞힐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정답에서 가장 먼 답을 쓴 하위권 학생들은 처벌하겠다.
나름 제국 재상 가문 출신인 아산도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절망하게 만든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강의.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화합할지어다. 뭐? 싫다고? 너희들의 뜻은 중요하지 않다. 너희들은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에게 과제를 내주겠다. 각 탑의 학생들은 내가 지정해주는 탑의 신입생 휴게실에 걸린 깃발을 다음 시간까지 챙겨갖고 와라.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다.
이쯤 되면 인성 교육을 하는 건지 싸움을 붙이는 건지 의심이 가는 <기초 마법 인성 교육>까지.
강의가 하나씩 끝날 때마다 학생들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흰 호랑이 탑 놈들 깃발을 어떻게 갖고 나오지?”
“왜 하필 흰 호랑이 탑 놈들이야? 그 자식들이 설득이 될 리가 없잖아.”
게다가 하필이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목표는 흰 호랑이 탑이었다.
검은 거북이 탑이나 불사조의 탑이었다면 설득과 대화로 깃발을 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흰 호랑이 탑과의 악연을 생각했을 때, 빌려달라고 하면 코웃음을 칠 게 분명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도 우리 깃발이 목표던데. 교환하자고 해볼까?”
“그 자식들을 어떻게 믿고? 그 자식들이 더러운 짓 하는 거 봤지? 명예라고는 조금도 모르는 야만인 놈들이야.”
“아까 내가 물어봤는데 절대 그럴 생각 없다고 하더라.”
“야. 관두자. 관둬. 시간 낭비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한탄하며 수군거렸다.
과제도 적당히 할 수 있어야 의욕이 생기지, 이렇게 답이 없으면 그냥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하필 흰 호랑이 탑이 걸려가지고!
‘이거 안 좋은데.’
이한은 친구들의 분위기에 당황했다.
강의 하나의 학점을 쉽게 포기하는 놈은 절대로 크게 될 수 없었다.
특히 이 마법학교는 어떤 미친 강의가, 어떤 미친 학점을 줄 지 모르는 복마전 같은 곳이었다.
벌써부터 포기해서는 안 됐다.
자기 점수면 상관없었지만 이한도 같이 묶여서 점수가 깎일 것 아닌가.
“잠깐! 다들 포기하지 마라.”
“!”
“워다나즈!”
“방법이 있는 거야?”
“역시. 방법이 있을 줄 알았지.”
학생들의 반응이 놀라움->호기심->확신->믿음으로 바뀌기까지 3초 정도 걸렸다.
이한은 이 귀 얇은 친구들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어떤 방법을 생각하고 있지, 워다나즈?”
“잠깐. 내가 알 것 같군.”
아산이 대신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말했다.
“뭔데, 달카드?”
“남들 몰래 흰 호랑이 탑에 침입할 생각이지. 95% 확률로 그거일 거야.”
“오오...!”
“과연! 나도 함께하겠어!”
“나도! 흰 호랑이 탑 놈들에게 한 방 먹여주자고!”
“뭐야? 무슨 일이야?”
“워다나즈가 흰 호랑이 탑 놈들한테 애걸복걸하는 대신, 흰 호랑이 탑에 들어가서 깃발을 가져오자는데?”
“그거 정말 마음에 드는군!”
순식간에 푸른 용 탑 학생들은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는 이한을 불렀다.
“워다나즈! 네가 우리를 이끌어줘.”
“우리를 이끌 사람은 이 계획을 처음부터 끝까지 세운 너밖에 없어!”
“......”
이한은 뭐라고 하려다가 포기했다. 이미 충분히 귀찮았던 것이다.
‘하긴 흰 호랑이 탑에 들어가긴 해야겠군.’
이한이 흰 호랑이 탑 학생이라 하더라도 깃발은 안 내줄 것 같았다.
이한 때문에 단체 징벌방 관람을 하고 왔는데...
애초에 방법은 무력행사밖에 없었던 것이다.
“알겠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놈들아,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이게 과연 인성 교육에 도움이 되는 건가?’
이한은 교장의 강의가 진짜로 올바른 인성을 가지게 도와주는지 의문이 들었다.
하면 할수록 서로간의 감정의 골만 깊게 패이는 것 아닌지?
* * *
간신히 찾아온 저녁.
이한은 티질링을 불러서 저번처럼 사악한 속임수로 밥을 먹였다.
수프를 홀짝이던 티질링은 이한의 성취감 섞인 시선을 느끼고는 의아해했다.
“왜 그러십니까?”
“후후. 아무것도 아니다.”
티질링은 설마 눈앞의 소년이 교묘한 화술을 써서 그녀에게 저녁을 먹인 것 때문에 저렇게 즐거워하나 싶었다.
‘기분 탓이겠지.’
명예로운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소년이었다.
지금 이렇게 저녁을 먹이러 오는 것도 사제의 부탁과 대귀족 출신으로서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명예심 때문일 터.
그런 사람이 이런 하찮은 일 때문에 악당처럼 웃을 리 없지 않은가.
“여기서 뵙네요. 워다나즈 가문. 안 그래도 찾고 있었는데.”
“!”
연금술 수업에서 만났던, 플레맹 교단의 시아나가 이한에게 인사했다.
시아나뿐만 아니라 다른 탑 학생들도 같이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아시다시피 연금술 수업에서 나온 과제 때문에, 우리 모두 <하급 정령 친화의 물약>을 만들어야 하잖아요? 혼자서의 힘에는 한계가 있으니. 다 같이 움직여서 재료를 모으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거 좋은 생각이군.”
이한은 반색했다.
저런 식으로 모여서 같이 다니는 방식은 이한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다른 탑 학생들이 이한을 무서워해서 그렇지.
‘젠장. 사제복 때문에 말을 들어주는 건가? 나도 사제복 있는데.’
“그러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모아서 와주시겠어요? 같이 재료를 모으도록 하죠.”
“그래. 그렇게 하지.”
대화를 마친 이한은 시아나를 배웅했다.
시아나 옆에 있던 학생들은 물러나면서 ‘살았다’ ‘눈빛 봤어?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그래도 생각보다 친절하시던데’같은 소리를 재잘거렸다.
이한은 알면서도 괜히 억울했다.
자리로 돌아오자 티질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지?”
“음... 플레맹 교단의 시아나 사제님 말입니다.”
“응. 연금술 수업을 같이 듣고 있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티질링은 말하려다가 입을 꼭 다물었다.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교과서적으로 궁금하게 하는군.’
물론 이한은 사제들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게, 괜한 험담으로 비칠 도 있어서 입을 다문 거겠지.
하지만 이한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 게 뭐냐. 내가 궁금한데.’
이한은 정공법 대신 우회해서 설득하기로 마음먹었다.
프리싱가 교단의 기도용 십자가를 꺼내서 앞의 바위에 올려놓았다.
“?”
티질링은 이해가 가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리에 없는 누군가를 욕하는 건 나쁜 일이지만, 신 앞에서 혼자 기도할 때 털어놓는 건 할 수 있는 일이지.”
“...그거 지금 설마, 눈 가리고 아웅을 하시겠다는...?”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들리지 않는군. 난 지금 기도중이라서.”
“......”
“저번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매복했다가 덤빈 탓에 죽을 뻔했는데, 혹시 이번에 산에 같이 들어가게 될 시아나 사제가 그런 흉계를 꾸밀 사람이라면 나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신께서는 나를 돌봐주시겠지.”
“......”
티질링은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한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십자가에 기도하듯이 머리를 숙였다.
“프리싱가 님. 이건 누군가를 음해하거나 고발하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고마워.”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들리지 않습니다. 기도중이라서.”
“......”
티질링도 은근히 뒤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