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화
하지만 로웨나는 소환수의 비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보다는 눈앞의 진흙 골렘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해야 했던 것이다.
“나가면 공격하는군.”
“말도 안 돼! 그러면 갇혔다는 거야?!”
“아직 확신하긴 일러. 공격해보자!”
“그만둬! 괜히 섣부르게 공격했다가는 위험할 수 있어.”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서로 의견을 내놓았다.
다들 겁을 먹고 당황한 상태라 그런지 목소리가 커지고 굽히지 않으려고 했다.
또 아까처럼 쓸데없이 논쟁을 벌일 것 같자 닐리아는 다급히 이한에게 다가갔다.
이 (닐리아 말은 안 듣는) 친구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한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이한은 인상을 찌푸린 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닐리아는 이한의 팔을 붙잡고 흔들면서 다시 불렀다.
“워다나즈!”
“아. 미안. 무슨 일이지?”
“너야말로 왜 그래? 지금 저 새ㄲ... 아니, 친구들이 또 다투려고 하고 있어. 네가 나서야 해.”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닐리아는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래서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 이 상황을 곰곰이 따져보고 있었어.”
“!”
닐리아는 긴 귀를 쫑긋 세웠다.
생각해보니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남들과는 다른 통찰력이 있었다.
그림자 순찰대 소속의 사냥꾼들과 순찰자들을 높게 평가해주는 것도 그렇고, 사냥꾼들의 지혜를 높게 평가해주는 것도 그렇고, 닐리아 본인과 친하게 지내주는 것도 그렇고.
그 특유의 통찰력으로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도 찾은 것일까?
“뭔데? 뭘 알아냈어?”
닐리아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도 살짝 기대 섞인 시선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이건 교수들의 함정 같은데.”
“......”
“......”
생각치도 못한 의견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 * *
“이거 풀어주십시오.”
진정하게나. 잉걸델 교수.
해골 교장은 달래듯이 말하며 잉걸델 교수의 손목과 발목을 묶은 마법 사슬을 풀어주었다.
잉걸델 교수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해골 교장과 우레걸음 교수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더니 다른 곳으로 날아와서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해골 교장이 잉걸델을 납치한 것이다.
세상에 이런 미친 마법사들이!
내가 잉걸델 교수를 데리고 온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네. 들으면 이해할 거야.
“이유가 뭡니까?”
그야 자네처럼 든든한 검사가 옆에 있으면 학생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스스로 성장할 기회를 잃어버리잖나.
“......”
설마 했던 개소리에 잉걸델 교수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그 모습을 보고 납득했다고 생각했는지 해골 교장과 우레걸음 교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잉걸델 교수도 이해하신 것 같습니다.”
“이해 못했습니다! 무슨... 학생들을 성장시키고 싶으면 다른 방법도 많지 않습니까!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훈련과 대결, 스승의 태도와 올바른 가르침...”
잉걸델 교수의 말에 해골 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이래서 검사들이란’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마법사는 그렇게 키우는 게 아닐세.
“맞습니다. 잉걸델 교수님. 마법사는 그렇게 키우면 안 됩니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위기를 맞이해봤자 마법사의 창의성은 길러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
잉걸델 교수는 검을 뽑으려다가 참았다. 여기는 마법학교지 기사학교가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기사학교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군.’
잉걸델 교수가 지금은 혼란스럽겠지만 언젠가 내 뜻을 이해하게 되겠지.
“...다 좋습니다. 학생들한테 ‘위기’를 주기 위해서 저 깊은 산맥 속으로 몇 시간 동안 걸어가게 하고, 안 좋은 날씨를 맞이하게 하고,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기습적으로 위기를 주는 것까지는 그렇다고 칩시다.”
우레걸음은 잉걸델 교수의 말에 쑥스러워했다.
“그렇게 칭찬하실 것까지는...”
“칭찬 아닙니다. 어쨌든 산맥에는 다른 위험한 몬스터가 많습니다. 게다가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험하고 복잡하고요. 만약에 다른 몬스터가 나타나는 것 같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잉걸델 교수의 질문에 해골 교장과 우레걸음은 동시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대답했다.
학생들이 알아서 극복해야지?
“학생들이 알아서 극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잉걸델 교수의 어깨가 허탈한 듯이 축 늘어졌다.
‘마법사들하고 대화를 하려고 한 내가 멍청했지...’
뛰어난 마법사일수록 기괴한 정신세계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학교의 교수로 있을 정도의 마법사라면 반쯤 미치광이라고 봐야 했다.
잉걸델 교수는 더 이상 대화하는 걸 포기했다.
“됐습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거나 실종자라도 나와서 구출대를 보내야 한다면 저도 불러주십시오.”
그래그래. 이제 자네도 생각이 좀 바뀌었나보군.
“안 바뀌었습니다.”
한숨을 쉬는 잉걸델 교수를 달래듯이, 우레걸음 교수는 뜨끈한 차를 건넸다.
그리고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잉걸델 교수. 제가 준비한 게 그리 위험한 건 아니니 말입니다. 고작해야 물약으로 강화된 황소들입니다.”
우레걸음 교수는 이번 연금술 과제를 위해 정성스레 준비를 해놓았었다.
물약에 필요한 재료들이 있는 장소에, 저번처럼 세심하게 몬스터들을 준비시켜 놓은 것이다.
지금이야 학생들이 ‘우레걸음 개새끼야’하고 욕할지도 모르지만, 먼 훗날 뛰어난 연금술사가 되면 ‘아, 우레걸음 교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마워하리라.
“황소들 정도면 확실히 학생들이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잉걸델 교수는 그나마 좀 안심이 되었다.
물약으로 강화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금 산맥에 들어간 신입생들 중에는 꽤 뛰어난 학생들이 제법 있었으니, 충분히 요령껏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불을 뿜나?
“안 뿜습니다.”
텔레포트는?
“안 합니다.”
다른 기타 속성 공격은? 도검불침의 축복은? 공포스러운 존재감은? 포효는?
“무슨 황소 한 마리에 대저택 몇 채 값이라도 투자하실 생각이십니까?”
우레걸음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힘과 민첩이 오른 정도면 충분하지, 해골 교장이 말한 능력을 다 부여하려면 어마어마한 거금을 퍼부어도 모자랐다.
해골 교장은 김이 샜는지 투덜거렸다.
재미없기는. 다른 몬스터나 나와라.
“그러신다고 몬스터가 나오겠습니까?”
* * *
이한의 의견은 처음에는 터무니없게 들렸다.
하지만 친구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한의 의견이 그럴듯하다고 느끼게 됐다.
일단 이한 본인의 신뢰도가 있었다.
같은 말을 해도 가이난도가 했다면 ‘저게 또 헛소리하네’로 받아들였겠지만, 이한이 말하자 ‘그래도 워다나즈가 아무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하진 않을 텐데’싶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레걸음 교수는 전적이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아직 연금술 첫 강의가 생생했다.
미친 멧돼지를 보내 학생들을 습격했던 우레걸음 교수의 사악함!
그런 교수라면 진흙 골렘을 대기시켜놨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면 잉걸델 교수님은 어디로 가신 건데?”
“우레걸음 교수와 미리 짠 거겠지.”
“너무해...!”
“하여간 교수들이란! 교수들은 다 믿을 게 안 된다니까!”
학생들은 이한의 추측에 분개했다.
믿고 있었던 잉걸델 교수마저 우레걸음 교수의 편이었다니.
이한은 냉정하게 상황을 다시 확인해봤다.
‘아무리 봐도 너무 공교롭단 말이지.’
약초와 재료가 피어 있는 장소에 도착했더니 갑자기 잉걸델 교수가 사라지고, 비가 내리고, 진흙 골렘 같은 몬스터가 나타나다니...
우연의 일치라기에는 너무 모든 일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이쯤 되면 의심을 해야 했다.
“워다나즈. 만약 이게 우레걸음 교수님의 함정이라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크게 달라진 건 없어. 저 진흙 골렘을 치울 방법을 알아내야지.”
아산의 물음에 이한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학생들의 표정에 우울함이 깃들자 이한은 기운을 북돋기 위해 말했다.
“다들 기운 차려. 그래도 우레걸음 교수가 준비한 함정이니까 해결할 방법도 분명히 있을 거야.”
“그렇지!”
확실히 그랬다.
저 진흙 골렘이 우레걸음 교수가 준비한 몬스터라면, 분명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있으리라.
압도적인 겉모습에 겁을 먹었던 학생들은 기운을 차리고 진흙 골렘을 어떻게 상대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불이나 산성 물약을 던져보면 어떨까?”
“그건 가르ㅅ... 아니, 트롤을 상대할 때 쓰는 방법이지. 선을 넘으면 공격하는 것 같은데 선을 지워볼까?”
“그런 편법이 통하겠어? 골렘의 시야를 가려보자. 눈이 안 보이면 우리가 빠져나가는 걸 모를지도.”
“일단 활로 쏴보자!”
학생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산은 다시 한 번 워다나즈가 상황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안 그랬다가는 온갖 쓰레기 같은 방법이 다 나올 것 아닌가.
로웨나가 다가와서 말했다.
“황녀님께서는 정령을 사용해서 골렘의 주목을 끌어보자고 하시는데... 잠깐. 워다나즈는 어디 갔습니까?”
“어?”
아산은 당황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한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워다나즈 어디 갔는지 못 봤나?”
“설, 설마 납치당했나?”
“제가 골렘을 돌파해서 찾아오겠습니다.”
다들 진흙 골렘이 나타났을 때보다 훨씬 더 패닉에 빠졌다.
그러나 이한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요네르는 이한이 진흙 골렘의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
“워다나즈?!”
떠들던 학생들도 이한이 선을 통과해 진흙 골렘 뒤에 나타난 걸 보고 눈을 의심했다.
진흙 골렘은 이미 선을 넘어간 이한을 잡는 대신 멍청하게 우두커니 서있었다.
“어떻게?!”
“마법으로. 투명화 마법을 썼지.”
친구들이 떠드는 동안 이한은 간단한 실험을 했다.
허리띠에 걸린 투명화 마법을 썼을 때 진흙 골렘이 눈치를 채나, 못 채나 실험을 해본 것이다.
다행히 진흙 골렘은 이한이 지나가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게다가 추가적인 소득도 있었다.
한 번 선을 빠져나오면 그 다음부터는 투명화를 풀어도 별 상관을 하지 않는다는 점!
이건 꽤 컸다.
“벌써 투명 마법을...!”
“아니. 아티팩트의 힘을 빌렸는데.”
“벌써 아티팩트 제작을...!”
“...제작이 아니라.”
이한을 보고 있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의아해했다.
어라?
우리가 저런 아티팩트도 팔았었나?
“그런 아티팩트도 있었어?”
“이건 학교에서 만든 게 아니라 교단에서 받은 선물이야.”
“와. 어떤 교단이 그런 선물을 줘?”
“프리싱가 교단.”
“......”
“......”
두 탑 학생들 모두 프리싱가 교단의 이름을 듣자 질색했다.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 * *
이한이 빠져나오긴 했지만 상황은 아직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진흙 골렘 앞에 갇혀 있었으니까.
“워다나즈. 내려가서 교수님을 불러와줘!”
“혼자 보내면 안 돼! 만약에 워다나즈가 우릴 버리기라도 한다면...”
“워다나즈가 무슨 가이난도로 보여?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미, 미안. 내가 실언을...”
이한은 친구들의 말을 무시했다.
애초에 이게 우레걸음 교수의 함정인 만큼, 내려가서 교수님을 불러온다고 해도 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레걸음 교수가 준비했다는 건 신입생 수준에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움직여라!”
이한은 쇠구슬을 던지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쇠구슬이 허공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골렘을 이루고 있는 핵을 찾아낸다.’
이한은 닥치는 대로 진흙 골렘을 두들겨서 핵이 있는 위치를 찾아내 볼 생각이었다.
요네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괜찮을까? 골렘인데...”
아무리 진흙이라지만 골렘은 골렘. 그 몸을 이루고 있는 두께가 보통이 아니었다.
신입생이 쓰는 마법으로 뚫을 수 있을지 걱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한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게 야생의 골렘이었다면 이한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봤을 테지만, 이건 우레걸음 교수가 준비해 놓은 일종의 과제물이었다.
‘그렇다면 그렇게까지 강하진 않을 거다!’
지팡이가 휘둘러지고, 쇠구슬이 그대로 골렘에게 작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