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화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한이 마법으로 날려 보낸 쇠구슬이 정확하게 진흙 골렘에게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벌어진 일은 이한의 예상과 달랐다.
“!”
이한의 안색이 변했다.
쇠구슬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이다.
진흙 골렘의 거대한 몸속에 틀어박힌 쇠구슬은 더 이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일했다.’
이한은 혀를 찼다.
진흙 골렘은 마력으로 그 거대한 몸을 유지하고 있는 몬스터.
마력으로 연결된 물체가 안으로 들어오면 진흙 골렘의 마력으로 방해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달그락-
뼈 소환수가 손을 흔들었다. 마치 자길 보내달라는 것 같았다.
“빼올 수 있겠나? 그러면... 가라!”
이한의 명령이 떨어지자 뼈 소환수가 날아들었다.
통통거리며 진흙 골렘 위를 타고 오른 뼈 소환수는 등판에 박힌 쇠구슬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
그러나 쇠구슬은 너무 깊게 박혀 있었다. 뼈 소환수는 낑낑거리며 손을 버둥거렸지만 쇠구슬에는 닿지 않았다.
“됐다. 뒤로 나와라.”
뼈 소환수는 시무룩해져서 빠져나왔다.
그나마 다행히 진흙 골렘이 덤벼들진 않았다.
‘투명화 마법까지는 안 써도 되겠군.’
만약의 경우 도망칠 준비까지 하고 있었던 이한이었지만,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공격을 준비했다.
쇠구슬은 막혔지만...
‘물 구슬은 가능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다시 한 번 볼라디 교수의 가르침이 쓸만하다는 걸 인정할 시간이 찾아왔다.
볼라디 교수가 날리는 암기를 피해가며 마법을 수련한 덕분에 이한은 물 구슬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 파괴력이었다.
‘쇠구슬보다 약하지 않나?’
지금 사방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는데도 이한이 굳이 쇠구슬을 먼저 날린 건 그 파괴력 때문이었다.
게다가 쇠구슬은 과정도 간단했다.
띄우고, 집중해서, 날리면 끝.
재질도 묵직한데다가 집중하기도 쉬웠으니 파괴력이 더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물 구슬은 여러모로 불리했다. 과정도 훨씬 어려웠다.
물을 불러오고, 구슬 형태로 뭉치고, 그걸 조종해서 날려야 하는 것이다.
쇠구슬보다 몇 배는 더 많은 과정.
쇠구슬은 완벽하게 다루는 이한이 물 구슬은 완벽하게 다루지 못해서 볼라디 교수한테 두들겨 맞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샘솟아라!”
이한은 물 구슬을 일단 띄웠다.
허공에 물이 샘솟더니 곧 압축된 구체가 만들어졌다. 비가 오고 있어서 그런지 훨씬 더 수월한 기분이었다.
퍽!
‘역시 안 되나.’
물 구슬이 작렬했지만, 아까 쇠구슬보다 파괴력이 약했다. 진흙이 파인 깊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뼈 소환수도 그렇게 느꼈는지 몸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해보자. 교수들이 아무리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의 마음을 잃어버린 짐승이라 하더라도 어떤 공략 방법도 없이 이런 골렘을 준비시키지는 않았을 거다.’
이한은 다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물론 이 골렘은 우레걸음 교수가 준비한 게 아니었지만 이한이 그것까지 알 방법은 없었다.
‘우레걸음 교수는 내가 볼라디 교수 밑에서 수업 받는 걸 알고 있겠지. 볼라디 교수와도 이야기를 나눌 테고. 볼라디 교수한테서 배운 마법을 최대한 활용하면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빙글빙글.
이한은 고개를 들었다.
물 구슬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면서 돌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이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볼라디 교수한테 하도 당한 덕분에 가만히 있어도 무의식적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무언가가 이한의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물 구슬 자체를 빠르게 회전시킨다면?’
그냥 물 구슬을 날리는 것보다 회전시켜서 날린다면 관통력은 높아질 터.
이한은 물 구슬로 원을 그리는 것을 멈추고, 물 구슬을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쉬이익!
* * *
잉걸델 교수가 단단히 토라진 것 같자 해골 교장은 우레걸음 교수한테 텔레파시를 보냈다.
-뭐라도 좀 해보게나.
잉걸델 교수는 마법학교 입장에서도 구하기 힘든 귀한 인재였다.
만약 잉걸델 교수가 교수직을 사퇴하고 떠나버리기라도 한다면 그 뒷일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해골 교장은 또 황제한테 가서 ‘제가 일부러 괴롭힌 게 아닙니다’같은 시말서를 써서 올려야 할 것이고, 제국 고관들에게 ‘내가 일부러 검사들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니까’같은 변명을 해야 할 것이고, 기사들에게 찾아가서 ‘정말로 안 괴롭힐 테니까 검술 교수 한 명만 좀 내놓게나’라고 사정사정을 해야 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왜 저한테...
우레걸음 교수는 투덜거렸지만 오두막 지하실로 내려가 드워프 특제 술통에서 벌꿀술을 잔뜩 따라왔다.
상대는 교장이었으니까.
-안주도 잊지 말게.
“......”
우레걸음 교수는 오두막 선반에서 훈제시킨 고기들과 채소들을 집어 들었다.
그 때 이한이 수확하고 남겨 놓은 채소들도 눈에 들어왔다.
‘엇. 이건 내가 먹으려고 했는데.’
알뜰하게 오두막을 털린 만큼 저 첫 수확한 채소는 우레걸음 본인이 먹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골 교장은 눈치가 귀신같았다.
-설마 맛 좋은 음식을 자기만 먹겠다고 안 갖고 오지는 않겠지?
‘제기랄.’
우레걸음 교수는 포기하고 전부 들고 왔다.
쿵!
“자자. 잉걸델 교수. 좀 드십시오. 제가 직접 만든 벌꿀술에, 제가 텃밭에서 기른 채소들, 그리고 제가 직접 훈제한 고기입니다.”
세상에! 우리 연금술 교수가 만든 술이라니! 제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천상의 맛이로다!
“......”
해골 교장은 칭찬에 별 재주가 없었다.
다행히 잉걸델 교수는 선량한 엘프였다. 잔을 기울이고 칭찬을 해줬다.
“정말 맛이 좋습니다. 우레걸음 교수.”
“이거 고맙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맛이 좋았다.
뛰어난 연금술사는 뛰어난 요리사이자 뛰어난 양조장이인 것이다.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분위기가 풀린 것 같자 해골 교장은 훈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학생들을 너무 걱정할 거 없네. 나 때는 훨씬 더 힘들었으니까.
“......”
“......”
까마득한 고대로 올라가는 해골 교장의 ‘나 때’이야기에 상대적으로 어린 두 교수는 침묵했다.
그야 그 때는 뭐든지 다 힘들었겠죠...!
그리고 이번 신입생들은 재미있는 놈들이 많아. 어지간한 위기는 알아서 극복할 걸세.
“그 말씀이 맞습니다.”
잉걸델 교수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교장의 말을 들어보니 자신이 너무 과보호를 한 것 같은 기분도 적잖게 들었던 것이다.
물론 약간 취해서 그런 걸 수도 있었다.
그렇지? 당장 산맥에 간 학생 중에 워다나즈 가문의 녀석만 해도 꽤 영특하지 않나.
해골 교장의 말에 다른 두 교수도 동의했다.
이한은 여기 있는 세 명에게 모두 관심을 받고 있는 만큼, 공감할 수밖에 없는 주제였다.
상대적으로 어린 두 교수들이 공감해주자 해골 교장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아까 말한 워다나즈 가문의 녀석은 내 마법서도 알아서 잘 배울 정도로 영특하고, 또 다른 녀석은...
“?”
“?”
조용히 벌꿀술 마시면서 듣고 있던 두 교수는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가?
“...당신의 마법서를 알아서 잘 배운다고 하셨...?”
잉걸델 교수는 물론이고 우레걸음 교수도 경악한 표정으로 해골 교장을 쳐다보았다.
물론 교수가 학생한테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줄 수 있었다. 마법을 배우러 들어온 학교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해골 교장은 좀 예외였다.
방금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요즘 교수들과는 사고방식이 좀 다른 고대의 광인 아닌가.
해골 교장은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고대 시절부터 존재해왔던 마법사답게 해골 교장은 이 상황에서 물러서는 대신 역으로 밀어부쳤다.
내가 이 학교의 교장이자 대표인데 가르침 하나 마음대로 주지 못한단 말인가!!
“......”
“......”
해골 교장은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두 교수가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해골 교장은 방향을 바꿨다.
나만 그런 것도 아닐세. 볼라디 배그렉 교수도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지 않나. 따지고 보면 우레걸음 자네도 개인적으로 가르침을 주고 있고!
은근슬쩍 자리에 없는 교수, 있는 교수 모두 물귀신처럼 끌어들이는 노련함.
과연 괜히 고대의 노마법사가 아니었다.
“아니... 저는 일학년 수준에 맞는 가르침만을 주고 있습니다. 배그렉 교수도 그렇고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레걸음은 황당하다는 듯이 말했다.
우레걸음이 이한에게 시키는 일들은 조금 몸은 힘들어도 미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아주 안전한 것들이었다.
그에 비해 저 해골 교장은 상대가 일학년이어도 온갖 난해하고 괴이한 마법을 가르칠 인물이었다.
배그렉 교수도 일학년 수준에 맞지 않는 마법을 가르치고 있네. 저번에 들어보니까 사실상 3서클 마법을 가르치고 있더군.
해골 교장은 한 번 우레걸음을 끌어들인 다음 자리에 없는 볼라디 배그렉 교수한테 화제를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건 거짓말도 아니었다.
저번에 들어보니 볼라디 교수는 정말로 3서클 마법 비슷한 걸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 쇠구슬로 원을 완벽하게 그리는 훈련을 통과했습니다.
-그랬나? 역시 뛰어나군. 1서클 마법이라지만 그 정도 통제력을 보여주려면 1서클로는 힘들 텐데.
-그래서 다음 과정으로 넘어갔습니다.
-다음 과정은 뭐였지? 수옥(水玉) 마법인가? 2서클일 텐데.
마법의 난이도를 재는 척도인 서클은 마법의 시전 과정 개수로 정해졌다.
물을 불러내고, 그걸 구슬 형태로 유지하는 마법은 2서클인 것이다.
-물로 구슬을 만드는 것에 성공해서 원을 그리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조종까지 추가한다면 사실상 3서클.
물론 결과가 같다는 거지 저게 3서클 마법이란 건 아니었다.
3서클 마법이란 건 지팡이 동작 하나와 주문 하나로 저 모든 과정을 엮어내어서 한 번에 현실에 현현시켜야 했다.
물 불러내고, 구슬 형태로 만들고, 그걸 원으로 돌리는 식으로 따로따로 작업해서 완성시키는 건 엄밀히 따지자면 3서클 마법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결국 마법에 익숙해지고 빨라진다면 3서클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증거 아닌가.
2서클 마법도 허덕일 일학년이 저걸 지금 완성시킬 줄이야.
다른 교수였다면 깜짝 놀랐을 테지만 해골 교장은 쿨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군. 잘 된 일이야.
그리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볼라디 교수도 이러는데 나도 좀 개인적으로 마법 전수해도 문제 없겠군!’
“그게 무슨 드워프가 풀 뜯어먹는 소리입니까?! 배그렉 교수는 배그렉 교수고 당신 마법은 당신 마법이죠!”
우레걸음 교수는 당연히 교장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솔직히 배그렉 교수가 진짜 3서클 마법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의문인데다가, 그게 진실이라 하더라도 교장의 가르침이 훨씬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나는 정말 안전하게 가르치고 있네! 수준에 맞는 마법만을 가르치고 있단 말일세.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
“......”
“......”
내 마법을 걸고 맹세하지!
“아. 그러시다면야...”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마법까지 걸고 맹세하자 두 교수는 간신히 의심을 풀었다.
일학년 학생한테 교장 본인도 해석 못한 고대의 마법을 가르쳐서 뇌를 파괴하려고 하나 의심했었던 것이다.
다행히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배그렉 교수가 뭘 가르치고 있는 겁니까?”
물 속성 전투 마법.
교장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두 교수는 감탄했다.
교장 말대로 정말 3서클 마법은 아니었지만, 일학년이 저 정도 마법의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재능과 노력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놀라운 결과물!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 잘 모릅니다만, 저 학년에 저 정도 성취를 보이는 게 흔한 일입니까?”
“아주 드문 일입니다. 아마 물 속성과 아주 친밀한 거겠죠. 물론 그것만으로는 안 되고 다른 재능들도 많이 필요합니다만... 잠깐, 배그렉 교수는 마법전투 전문이잖습니까? 그러면 그걸 지금 반복 훈련시키는 겁니까? 마력은 물론이고 정신력에도 어마어마한 혹사가...”
저런. 정말 나쁜 사람이군.
“......”
뭐 그래도 그 이상은 안 하겠지. 지금 하는 훈련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니 할만한 것 아닌가? 지금 마법의 난이도도 난이도인 만큼 더 올라가지는 않을 걸세.
* * *
쉬이이익!
‘완성했다.’
제자리에서 소리를 내며 맹렬하게 회전하는 물의 구슬.
이한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들고 진흙 골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