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화
“버리고 가면 안 되나? 90% 확률로 우리까지 위험해질 텐데?”
아산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 말에 검은 거북이 탑은 물론이고 푸른 용의 탑 학생들까지 경악한 표정으로 아산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야. 흰 호랑이 탑 놈들은 그렇다 쳐도 사제들도 있잖아.”
“사제님들까지 버릴 수는 없지.”
“어떻게 그런 냉정한 생각을 해?”
다른 학생들의 반응에 이한은 뜨끔했다.
사실 이한도 아산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다.
“두고 가려고 해도 늦었어! 일단 다들 흩어져!”
닐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산맥에서 위험한 몬스터를 몇 번이고 상대했던 만큼 닐리아는 이런 상황에 대해 잘 알았다.
저렇게 쫓아오는 몬스터를 등 뒤에 두고 무작정 도망치는 건 더 위험했다.
일단 흩어져서 놈의 발을 묶고 차근차근 도망쳐야 했다.
로웨나는 달리면서 다급하게 물었다.
“아까 쓰셨던 <유미디후스의 수옥탄> 마법, 다시 쓸 수 있습니까?”
“뭐?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지금은 못 쓰지! 다들 대피나 시켜!”
대답하면서 이한은 뒤늦게 유미디후스가 누군지 떠올렸다.
물 속성 마법 여럿을 만든 유명한 제국 마법사였다.
하지만 그게 어쨌든 간에 지금 바로 쓸 수는 없었다. 아까도 몇십분이나 걸려서 완성하지 않았던가.
당장 진흙 골렘이 달려오는데...
“나는 밤에 숨노니!”
이한은 주문을 외웠다. 이한의 몸이 빗속으로 사라졌다.
진흙 골렘이 시각으로 적을 찾는다는 건 아까 이미 확인했던 것이다.
‘아깝지만...’
진흙 골렘에게 접근한 이한은 품속에서 연막의 분필을 꺼냈다.
검은 거북이 탑 암시장에서 샀던 불완전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가라!’
팍!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진흙 골렘 근처에서 연막이 확 피어올랐다. 갑작스러운 시야 차단에 진흙 골렘은 머뭇거렸다.
이한은 교장에게서 받은 제국 반마법주의자의 검, 새벽별을 뽑아들었다.
흑자석(黑紫石) 검의 날이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이며 기묘한 소리를 냈다. 뼈 소환수가 질색하며 옆으로 거리를 벌렸다.
‘다리를 노린다!’
푹!
이한은 처음부터 진흙 골렘을 잡을 생각이 없었다.
‘시야를 뺏고 발을 묶는 것만으로 충분해. 진흙 골렘은 다른 몬스터들과 다르다. 학생들이 사라지기만 하면 계속 쫓아오진 않을 거야.’
새벽별의 효과는 생각보다 더 좋았다.
두터운 다리를 연결하는 발목의 뒤꿈치를 베인 진흙 골렘은 바로 회복하지 못한 채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위에서 뭔가 떨어졌다.
“?”
이한은 본능적으로 받았다.
그건 흰 호랑이 탑 드워프였다.
“???”
진흙 골렘의 주먹에 붙잡혔던 바트렉 바크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안 보이는 누군가가 자기를 들고 있던 것이다.
“뭐하냐? 안 일어나고?”
안 보이는 누군가의 심드렁한 말에 바트렉은 깜짝 놀라서 자세를 바로잡고 섰다.
“혹시 워다나즈인가?”
“?!”
이번에는 이한이 놀랄 차례였다.
‘뭐야 이 흰 호랑이 탑 놈? 어떻게 안 거지?’
“어떻게 안 거냐?”
“그냥 이런 짓을 할 놈은 푸른 용의 탑에 워다나즈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아니 그게 말이 되는...
“바트렉을 도와라! 바트렉을 도와!”
“바트렉! 우리가 간다!”
진흙 골렘이 멈춰 서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공격을 펼칠 준비를 했다.
그렇게 두들겨 맞고 도망을 쳤는데도 전의가 전혀 꺾이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대단했다.
물론 이한은 분노했다.
“아니 저런 인생에 불필요한 새끼들이 진짜!”
바트렉은 방금 자신을 구해준 워다나즈의 명예를 위해 못 들은 척 했다.
‘이 새끼들은 대피도 제대로 못하나?!’
이한의 계획은 간단했다.
아까 찾은 진흙 골렘의 약점을 이용해, 이한이 놈의 시야를 혼란시키고 시간을 끈다.
그러는 사이 학생들은 알아서 잘 대피한다.
학생들이 모두 사라지면 이한도 투명화 허리띠의 힘을 빌려 유유히 사라진다.
간단하면서도 제법 괜찮은 계획이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전부 망쳐버린 것이다.
물론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의 계획을 듣지 못했으니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었지만, 이한한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야, 도망치라고 해!”
“다들 피해라! 날 도와주러 올 필요 없다!”
바트렉은 당황했지만 일단 이한이 시키는 대로 했다.
지금 진흙 골렘의 시야를 차단시키고 자기를 구해준 건 다른 학생이 아니라 이한이었다.
탑의 자존심이고 뭐고 양심이 있다면 거부할 수 없는 상황.
...그런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바트렉의 말을 무시했다.
“바트렉! 지금 도와주러 갈게!”
“바트렉, 우리가 간다!”
“......”
바트렉은 자신도 모르게 이한의 눈치를 봤다. 물론 투명해서 보이진 않았다.
쿵-
주변에 연막이 터진데다가 다리를 회복시키느라 멈춰 있던 진흙 골렘이 슬슬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연막 너머로 달려오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진흙 골렘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골렘이 고개를 돌리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목표를 확인하고 추적하는 것 같은데.’
“이봐. 여기까지는 어떻게 뚫고 나왔지? 진흙 골렘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길을 내주진 않았을 텐데.”
이한은 바트렉에게 물었다.
이한이야 투명화 마법이 가능해서 진흙 골렘의 뒤로 돌았다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런 방법이 없었다.
“진흙 용해 물약을 만들어서 던졌다. 시아나 사제가 만들 줄 알아서...”
“!”
이한은 놀랐다. 그런 게 있었다니.
그런 게 있다면 진흙 골렘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잘 됐군! 그 물약은 어디 있지?”
“다 썼는데...”
“......”
이한은 안 보이는 김에 뒤통수를 한 대 때리려다가 말았다. 그렇게 귀중한 물약을 저렇게 안일하게 낭비하다니.
네놈들 대가리는 투구걸이냐?
‘후.’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나서 이한은 다시 집중했다.
흰 호랑이 탑 놈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이고...
이렇게 된 이상 연막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진흙 골렘에게 최대한 데미지를 줘야 했다.
지금 가장 좋은 방법은?
‘새벽별로 베어봤자 덩치에 비하면 너무 상처가 작고, 물 구슬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고민할 틈도 없이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흙 골렘은 벌써 주먹을 들어올렸다.
‘젠장!’
“타올라라!”
머리로 생각했다기보다는 거의 본능에 가까운 마법이었다.
진흙 골렘과 가까이 붙어 있는 만큼 사정거리가 됐고, 다른 마법보다 더 공격적이었으니까.
...그러나 효과는 이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났다.
화르르르르르르륵!
“?!?”
바트렉은 깜짝 놀라 엎드렸다.
갑자기 거센 화염이 치솟아 오르며 진흙 골렘을 그대로 감싸버린 것이다.
원래라면 쏟아지는 비를 맞아 꺼져야 할 화염이 이한의 마력을 연료 삼아서 멈추지 않고 타올랐다.
“대... 대단하군!!”
바트렉은 솔직히 감탄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에서 워다나즈를 싫어하고 질투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같은 신입생이 마법 한 방에 진흙 골렘을 이렇게 태워버리다니.
너무 차이가 나서 질투심보다는 경외감만 들 정도였다.
“미치겠군!”
“??”
그러나 이한은 감탄 대신 욕설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가르시아 교수님!’
가르시아 교수가 왜 화염 원소 마법을 좀 나중에 연습하라고 했는지, 이한은 지금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양보다 더 많은 마력을 마법에 쏟아 부었더니, 곧바로 화염은 이한의 통제에서 벗어나 제멋대로 날뛰었다.
아까의 성공으로 너무 오만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진흙 골렘이 미쳐 날뛰는 화염을 다 자기 몸으로 받아줬다는 점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화염이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갔으리라.
쩌저적!
‘뭐야?’
이한은 쩍쩍 갈라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진흙 골렘이 화염에 구워지면서 부스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흔히 흙을 불에 구우면 단단해질 거라고 생각하기 쉬웠지만, 흙도 제대로 준비된 흙이 아니라면 불에 굽는다고 단단해지진 않았다.
오히려 불에 취약해서 이렇게 부스러지는 것이다.
“...이... 이걸 노린 거였다니...!”
바트렉은 이제 더 이상 감탄하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이한도 이제 더 이상 대꾸하기도 힘들었다.
* * *
이한은 투명화 마법을 풀었다.
그리고 달려온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함께 호흡을 맞춰 진흙 골렘을 베고 찔렀다.
이미 쩍쩍 갈라져서 부서지고 있었던 만큼 진흙 골렘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무너지고 넘어지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와아아아아아!”
“잡았다! 잡았다고!”
“네 덕분이야! 잘했어!!”
“?”
이한은 몰려와서 고마워하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보고 의아해했다.
‘뭐지?’
물론 골렘 쓰러뜨리고 기쁜 건 알겠는데, 이제까지 싸워놓고 갑자기 이렇게 친한 척을?
“...그런데 너 누구였지? 본 기억이 없는데...?”
“어느 가문이야?”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에게 고마워하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바트렉 옆에서 같이 칼 들고 싸우길래 당연히 같은 흰 호랑이 탑 학생인 줄 알았는데...
보면 볼수록 흰 호랑이 탑 학생 같지가 않았다.
보다 못한 바트렉이 대신해서 나섰다.
“우리 탑이 아니라, 푸른 용의 탑 출신인 워다나즈잖나.”
“...으아어으아억!”
방금까지 고마워하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몇몇은 넘어지기까지 했다.
‘진흙 골렘이 덤벼들 때보다 더 놀라는 것 같은데.’
“무... 무슨 속셈으로... 우리를?”
“아니, 그보다 어떻게 우리를 속인 거지? 비를 이용한 건가? 그래도 말이 안 되는데?”
“마법으로 속인 건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헛소리를 하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이한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트렉은 절뚝거리며 말했다. 아까 진흙 골렘이 붙잡은 탓에 다친 것이다.
“여기 워다나즈는 우릴 도와주러 온 거다. 날 구해줬고. 다들 이상한 소리는 그만해라.”
“바트렉! 괜찮아?”
“조금 삔 것 같지만 괜찮다. 다른 학생들을 모아주겠나? 더 멀리 흩어지기 전에 한 곳으로 모으는 게 좋겠군.”
바트렉의 말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혈기 넘치게 덤벼든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불사조 탑의 사제들이나, 겁 많은(이한이 보기에는 영리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싸우는 대신 도망을 선택했다.
급히 도망치다가 산에서 길이라도 잃기 전에 불러와야 했다.
“그런데...”
“?”
“바트렉만 두고 가도 되는 거 맞지? 워다나즈, 바트렉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지?”
“......”
“아, 아니. 네 명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바트렉은 지금 다치기도 했고...”
이한의 차가운 시선을 마주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주눅이 들어서 주절주절 변명했다.
* * *
“사라진 사람 없지?”
“없어. 다 확인했어.”
이한은 푸른 용의 탑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인원을 확인했다.
옆을 보니 흰 호랑이 탑이나 불사조 탑 학생들도 다 모인 모양이었다.
이한 쪽은 다친 사람이 없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가장 부상자가 많았다.
진흙 골렘에게 무식하게 덤벼든 만큼, 타박상이나 골절상이 없는 학생이 드물 정도였다.
불사조 탑의 사제들은 그런 친구들에게 응급처치를 해주었다. 특히 시아나 사제는 플레맹 교단 출신답게 진통 물약과 타박상 치료 물약을 만들어서 나눠줬다.
요네르는 그 솜씨를 보고 감탄했다.
“역시 대단하셔! 플레맹 교단 출신이라 아는 제작법도 많고, 만드는 속도부터 솜씨까지 다...”
“......”
그러나 시아나 사제의 질투 이야기를 들었던 이한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만 없어지면 내가 1등이야!!
...같은 이야기들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것이다.
‘흰 호랑이 탑하고 이미 원수를 졌는데 불사조 탑하고까지 원수를 지고 싶지는 않은데...’
이한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시아나 사제가 다가왔다.
“진흙 골렘과 직접 싸우셨다고 들었는데, 이걸 마셔보세요. 타박상 치료 물약이에요.”
“이한은 안 다쳤...”
요네르가 친절하게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한이 한 발 더 빨랐다.
재빨리 물약을 받은 다음 원샷을 때리고는, 전력을 다해 감탄했다.
“이건... 내가 마셔본 물약 중 가장 훌륭한 물약이군!!”
“응?”
요네르는 이한의 격한 반응에 의아해했다.
물론 시아나 사제의 솜씨가 뛰어나긴 한데, 급하게 만든 물약이 그 정도로 좋을 리가...?
그러나 이한의 격한 반응은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교수의 지루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들으면서 단련된 실력이 불을 뿜었다.
“이 물약을 직접 만든 건가? 믿을 수가 없군! 이건 돈을 받고 팔아야 하는데! 신이시여!”
이한은 감탄하면서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시아나 사제의 얼굴이 방긋 밝아지는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