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화
통한다는 걸 알게 되자 이한의 반응은 더욱 더 격렬해졌다.
이한은 이마를 치며 외쳤다.
“대단해! 역시 플레맹 교단의 시아나 사제!! 대단해!!!”
“...어디 아파?”
요네르는 남들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한이 뭔가 잘못 먹은 것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요네르를 제외한 사람들은 다 만족했다. 특히 시아나 사제는 매우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역시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보는 눈이 없는 장님이라도 이 물약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있을 거다.”
“과찬의 말씀이에요.”
시아나 사제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소매로 가리고 작게 웃었다. 이한도 마주보고 웃어줬다.
몇 마디 인사를 더 나눈 다음 시아나 사제는 매우 만족한 표정으로 불사조 탑 학생들에게로 돌아갔다.
이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힘들었다.’
마음에도 없는 반응을 격렬하게 보여주는 것도 생각보다 지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여준 보람이 있었다.
시아나 사제가 불사조의 탑 학생들에게 돌아가서 이한의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이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답게 어찌나 예의바르고 보는 눈이 있으신지...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사제님?
-그런 건 없었고요 정말 보는 눈이 있...
저 반응을 보니 불사조의 탑 학생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요네르. 난 네가 연금술 수업에서 1등을 하더라도 네 잔에 독을 타진 않을 거야.”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요네르의 눈빛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 * *
응급처치를 끝낸 학생들은 귀환을 시작했다.
부러진 다리가 낫지 않은 학생들은 멀쩡한 학생들한테 업혔다.
다행히 내려가는 동안에는 별다른 몬스터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바트렉. 워다나즈한테 별다른 일을 당하진 않았지?”
“바트렉. 워다나즈가 너한테 혹시 세뇌를...”
“바트렉. 워다나즈가 너한테 금지된 흑마법을...”
“안 당했다고 했잖냐!”
바트렉은 어이가 없었다.
이한이 도와줬다고 말해줘도 다들 제대로 듣질 않았다.
“그리고 다 같은 일학년인데 어떻게 금지된 흑마법을 시전한다는 거냐?”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지. 헛소문일 거라고. 하지만 워다나즈의 마법 능력을 보라고.”
“나도 믿지 않았지만 워다나즈를 보니 헛소문이 아니라는 것에 무게가 실리더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게도 이들은 반쯤 진지하게 소문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워다나즈 가문 내에서 어렸을 때부터 비밀리에 마법 훈련을 시켰겠지.”
“정말 무섭군, 워다나즈 가문.”
이한이 보여준 강력한 염동력 마법(조준 실패였지만)이나, 기초 흑마법 강의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벌써 부풀려져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한과 어울릴 기회가 제법 있었던 다른 탑 학생들은 그렇게까지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았다.
오해를 하더라도 ‘워다나즈 가문 출신답게 카리스마 넘치긴 하더라’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규칙으로 다스리고 있다던데?’정도.
그러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달랐다.
진짜 진지하게 무섭다!
“모라디나 다른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워다나즈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 같지는 않...”
바트렉은 오해를 풀어보려고 했다.
목숨을 구해준 만큼, 이 정도는 해줘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바트렉. 아까 골렘을 쓰러뜨린 마법을 누가 불러냈지?”
“...워다나즈가 불러내긴 했지.”
“그 화염이 평범한 마법이야?”
바트렉은 말문이 막혔다. 반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믿는 놈들한테 논리로 밀리다니...!
“어이.”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떠드는 사이 이한이 다가왔다.
이한을 발견한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목검을 붙잡고 눈을 파르르 떨며 몸을 긴장시켰다.
‘...뭔 초식동물이냐?’
“무, 무, 무, 무슨 일이지 워다나즈...?”
“별 건 아니고... 다들 고생 많이 했으니 힘이 빠졌겠지.”
이한은 배낭 안에 넣어 온 간식들을 내밀었다.
식료품실, 아니, 개인실 찬장에 보관했던 음식들 중 가장 오래된 간식들이었지만 맛은 충분했다.
달달한 잼이 든 납작하게 구운 빵과 설탕을 뿌린 과자들.
이한은 유통기한 지나기 전에 음식들도 치울 겸 생색 좀 내기로 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먼저 시비를 걸어와서 ‘누가 나를 이유 없이 싫어한다고? 그 이유를 만들어주마’하고 굴었지만, 사실 이한도 의미 없는 싸움은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고... 고맙다. 워다나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걸 먹어도 멀쩡할까?’와 ‘하지만 배가 너무 고픈데’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후자가 이겼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에 저런 배고픔은 어느 누구라도 견디기 힘든 법.
“바크 가문의 바트렉? 동부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넌 여기 주먹밥하고 떡 받아라.”
“...!”
바트렉은 이한이 내민 음식에 살짝 감동했다.
바트렉이 동부 출신인 걸 알고 이런 세심한 배려까지 해줄 줄이야.
제국이 워낙 넓은 만큼 학생들은 자기 지역 쪽 음식이 아닌 것들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워다나즈도 딱히 동부 출신은 아닐 터.
그런데 이렇게 친절을 보여주다니.
정말 워다나즈에 대한 소문은 과장된 걸지도 몰랐다.
이한이 돌아가고 나서, 배에 허겁지겁 간식을 집어넣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우리가 오해한 걸지도 모...”
“너희 들었냐?! 내가 푸른 용의 탑 놈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쪽에 있던 진흙 골렘을 워다나즈가 물 마법 한 방으로 쓰러뜨렸대!! 물로 된 드래곤을 불러냈다는데???”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경악했다.
진짜...
진짜 무섭구나, 워다나즈!
* * *
서로 주거니 받거니 잔을 기울이던 우레걸음 교수는 문득 깨달았다.
‘어? 채소가 없잖아?’
제자인 이한이 수확한 채소도 같이 갖고 왔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싹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해골 교장이 먹었을 리는 없으니 범인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잉걸델 교수가 우레걸음 교수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 별 거 아닙니다. 그... 야채를 참 좋아하시는군요.”
저런, 우레걸음. 엘프 종족이라고 무조건 야채를 좋아한다는... 고대 시절에나 통했을 편견을 아직도 갖고 있다니. 이 학교의 대표로서 슬퍼지는군 그래. 자네는 그러면 드워프니까 맥주를 좋아하나?
“저는 좋아합니다만?”
“이런. 죄송합니다.”
잉걸델 교수는 사과했다.
“딱히 야채만 좋아하는 건 아닌데, 이상하게 맛있어서 계속 먹게 됐군요.”
“그랬습니까?”
자네 어차피 야채 별로 안 좋아하잖나?
“아니거든요? 먹을 땐 잘 먹습니다.”
기껏해야 고기 육즙에 적셔서 조금 먹겠지. 뭘 그런 걸 가지고 잉걸델 교수한테 핀잔을 주고 그러나.
“정말 죄송...”
“아닙니다! 아. 그만 좀 하십시오!”
우레걸음 교수는 다시는 해골 교장을 오두막에 부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해골교장은 음식도 술도 먹지 못하는 만큼 인생의 즐거움을 남을 괴롭히면서 찾고 있던 것이다.
‘근데 궁금하긴 하군.’
못 먹게 되니까 괜히 궁금해지는 게 사람 마음. 우레걸음 교수는 입맛을 다셨다.
학생들이 돌아오고 있군. 내가 뭐라고 했나? 다들 알아서 잘 해낼 거라고 말했지?
“!”
잉걸델 교수는 벌떡 일어서서 문으로 달려나갔다. 그 모습에 해골 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마음이 여려서야...
* * *
기다리고 있는 우레걸음 교수와 잉걸델 교수를 발견한 학생들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이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신 원한 섞인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나중에 제국 대마법사가 되면 여기 교수들부터 밟아버려야지.’
‘내가 나중에 제국 최고 검객이 되면 여기 교수들부터 아작을 내주겠어.’
‘내가 나중에 제국의 고관이 되면...’
우레걸음 교수는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잘 갔다 왔구나!”
“예... 교수님 덕분에 아주 즐거웠습니다.”
“다들 놀라지 않는 걸 보니 눈치를 챈 모양이구나. 그래. 연금술이란 이런 거다. 앞으로도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어느 순간, 어느 상황에서라도 위기는 닥칠 수 있으니까.”
“......”
“......”
학생들은 진지하게 우레걸음 교수 기습 계획을 고민했다.
저 교수한테 예상치 못한 위기를 던져주고 싶다!
잉걸델 교수는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했다.
“다들 미안합니다. 저는 정말 남아 있으려고 했는데...”
“그러시겠죠.”
“흥. 다 똑같다니까.”
“?!”
심지어 흰 호랑이 탑 학생들까지 잉걸델 교수를 노려보았다. 잉걸델 교수는 당황했다.
“정말입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나타나셔서 저를 강제로 텔레포트...”
“됐습니다. 교수님.”
“저희는 이제 아무도 믿지 않을 겁니다. 이게 학교에서 원한 거 아니겠습니까?”
시련을 거친 학생들은 어느새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거칠어져 있었다.
어느 탑이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교수 불신을 하게 된 것이다.
검을 나누며 영혼의 교류를 한 제자들이 불신의 시선을 던지자 잉걸델 교수는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팠다.
“......”
우레걸음 교수는 잉걸델 교수가 노려보는 걸 못 본 척했다.
‘제 잘못 아닙니다. 잉걸델 교수. 고나달테스를 탓하십시오.’
이한은 잉걸델 교수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정말 잉걸델 교수는 몰랐나?’
물론 저 반응도 연기일 수 있었지만 잉걸델 교수의 반응에는 진심이 느껴졌다.
해골 교장이 나타나서 납치했다는 변명도 너무 터무니없어서 다들 믿지 않았지만...
‘딱히 터무니없진 않지. 충분히 할 새ㄲ... 사람이고.’
낑낑낑-
뼈 소환수가 달그락대며 오두막 쪽을 가리켰다.
“!”
아까 산맥에서 느꼈던 마력의 파장과 비슷한 마력이 오두막 쪽에서 흐릿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이한은 기억 속에서 저 마력이 누구의 마력이었는지 찾아냈다.
저건 교장의 마력이었다.
‘진짜였다고?!’
이한은 경악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교수를 다짜고짜 납치해?
‘생각해보니 딱히 놀랍진 않군. 충분히 할만한 짓이다.’
이한은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잉걸델 교수한테 말했다.
“교수님. 저는 교수님을 믿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납치를 하셨겠죠.”
“워다나즈 학생...!”
잉걸델 교수는 눈물이 살짝 맺힐 정도로 감동했다.
* * *
학생들을 다 확인한 우레걸음 교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여기 이 학생들은 우레걸음 교수가 준비한 시련을 어떻게 해결했을까?
“그래서 무슨 방법으로 해결했지?”
“워다나즈가 <유미디후스의 수옥탄> 마법으로 진흙 골렘을 날려버렸는데요.”
“그리고 다른 진흙 골렘은 워다나즈가 불로 태워서 잡았구요.”
“...?”
우레걸음 교수는 순간 너무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이 연속으로 나와서 당황했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잠깐... 잠깐. 잠깐만.”
“??”
“왜 진흙 골렘이 나오지? 황소는? 황소는 어디 갔어?”
“뭔 또... 교수님. 작작 좀 하십시오. 저희가 무슨 어린애인지 아십니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코웃음을 쳤다.
우레걸음 교수가 또 그들을 상대로 속임수를 시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안 속는다!
“아니...! 진짜 진흙 골렘이 왜 나오는 거냐? 진흙 골렘은 내가 준비하지 않았는데?”
“하. 그러시겠죠. ‘우연히’ 나온 거겠죠.”
“다들 들었지? 우레걸음 교수님께서 우연히 나왔대! 믿어드리자!”
“......”
우레걸음 교수는 스스로의 삶을 아주 살짝 반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