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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63화 (63/687)

063화

원래 제국의 대귀족들은 돈을 빌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직접 나서서’ 돈을 빌리지 않았다.

명예로운 대귀족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 일인 것이다.

물론 대귀족도 돈이 필요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이제 대귀족들과 친분이 있거나 혹은 대귀족의 눈에 들고 싶어하는 상인들이 알아서 찾아왔다.

공손하게 인사 올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좀 하고, 저택 칭찬도 하고, 가문 칭찬도 좀 하고, 그런 다음에 ‘미천한 제가 귀족님께 조금이나마 돈을 바치고 싶습니다’같은 말을 꺼내면 대귀족은 마지못해서 허락해주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 다음은 이제 대귀족 밑에서 일하는 집사장과 세세한 일을 이야기하면 됐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만큼, 대부분의 제국 대귀족들은 직접 나서서 돈을 빌릴 줄 몰랐다.

하물며 그 가문 출신의, 이제 갓 성인이 된 소년소녀들이라면?

말을 꺼내는 방법도 모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카아코 상단의 지점장, 아리언은 누가 봐도 대귀족 출신인 소년이 돈 빌려달라고 찾아왔을 때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진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맞나??’

*         *         *

필로네 마을은 그 규모에 비해 상당히 번영한 곳이었다.

길가에는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시골에는 볼 수 없는 다양한 종류의 가게들이 있었다.

게다가 이런 마을에 한 개면 충분한 여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주점들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필로네 마을뿐만 아니라, 이 근처의 다른 마을이나 도시도 마찬가지로 활기가 넘쳤다.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학교 때문이었다.

지역 자체가 마법학교가 위치한 곳인 만큼 자연의 마력이 넘치는 것이다.

각종 던전, 몬스터, 희귀 재료들이 가득한 곳!

거기다가 마법학교 내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은 실험을 위해 온갖 재료와 시약을 필요로 했다.

이런 걸 누가 가져다주겠는가?

대부분의 마법사들은 연약해서 책상 앞에서 일어서면 픽 시들어버렸다.

당연히 모험가들을 고용할 수밖에 없었다.

두둑한 보상이 걸린 만큼 모험가들은 신나서 몰려오고, 재료나 시약이 빠르게 모이니 신이 난 마법사들은 팍팍 실험하고 또 다시 고용하고, 명세서를 본 제국 재무관은 ‘오수 고나달테스를 불러오게!!’하며 분노하고...

하여간 몇 명 빼고는 모두 행복한 순환의 고리가 이 인근에 완성된 것이다.

이한에게도 행운이었다.

돈만 있으면 어지간한 건 다 살 수 있었으니까. 돈이 있어도 못 사는 것보단 나았다.

“그러니까 돈 좀 빌려주십시오.”

“아, 아니.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안 됩니까?”

“아니!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빌려드릴 겁니다.”

염소 수인족 지점장은 양손을 급히 흔들었다.

상대가 워다나즈 가문이라면(그리고 가짜가 아니라면), 빌려주는 게 무조건 이득이었다.

워다나즈 가문에 찾아가서 돈을 갚아달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워다나즈 가문 출신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득이었던 것이다.

아리언은 각오를 했다.

‘좋다. 내 사비를 털어서라도...’

하지만 상인으로서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과연 상대가 얼마나 거액을 요구할까?

아리언의 전재산보다 많은 양이라면 빠르게 위로 연락을 보내서 허가를 구해야 할 텐데...

“얼마나 원하십니까?”

이한은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 아리언은 점점 무서워졌다.

대체 얼마를??

“...은화 스무 닢 가능합니까?”

“...예?”

“안 되면 은화 열다섯 닢 정도라도...”

“......”

아리언은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상대방이 어디서 본 것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바로 마법학교 교복이었다.

‘마법학교 학생이었어?!?’

심지어 일학년이었다. 마법학교의 정신 나간 엄격한 규율을 알고 있는 만큼 아리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일학년이 빠져나왔지??

‘아... 워다나즈 가문이었지.’

아리언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해버렸다.

눈앞의 상대는 진정으로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맞았다.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일학년 때 마법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겠는가.

‘대귀족이 직접 찾아와서 돈을 빌려달라고 말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워다나즈 가문이니까!’

“은화 열두닢?”

“아, 아니. 그만 줄이셔도 됩니다.”

*         *         *

상황을 파악한 아리언은 이한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차와 함께 다과를 내오고, 아무 대가 없이 은화를 내줄 수도 있다는 말을 하자, 이한은 오히려 수상쩍다는 듯이 아리언을 쳐다보았다.

“아, 아니. 수상한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전 이만 다른 곳에 가봐야 할 것 같습...”

“정말입니다!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께서 지금은 돈이 없으실 것 같아서 배려해드린 말이었는데!”

아리언은 억울했다.

마법학교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일학년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지금 상황은 ‘돈은 상관없습니다. 저는 도련님을 믿습니다’ ‘아리언 씨! 당신은 보는 눈이 있군요. 내 훗날 출세하고 나서도 당신의 믿음을 잊지 않겠습니다!’같은 감동적인 상황이었는데...

“아. 그런 거라면... 돈은 없지만, 돈이 될 만한 물건은 있습니다.”

“?”

아리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갓 빠져나온 일학년이 돈이 될 만한 물건을 갖고 있다는 건 믿기 힘들었다.

‘설마 지팡이를...’

아리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마법학교 학생들이 자주 하는 착각이었다.

작년에도 3학년 학생 한 명이 빠져나와서 지팡이를 팔려다가 실패했다고 들었다.

마법학교에서 주는 기본 지팡이는 생각보다 돈이 안 되는 것이다.

“여기 다른 제국 가문 출신들이 제게 진 빚 장부입니다.”

“......”

아리언의 턱이 탁자에 닿을 정도로 떡 벌어졌다.

뭔 미친...!?!?!!!

“원래 이걸 들고 저택을 돌려고 했는데 빌어먹... 아니, 교장 선생님께서 저택을 다른 곳으로 치우셨다는군요.”

“그... 그랬었죠. 이런 거라면... 정말 돈이 될 만한 물건이 맞군요.”

저건 그냥 현금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단순히 현금으로 끝나지 않았다.

저걸 들고 그 가문에 찾아간다면, 그 가문은 자기 가문 출신 핏줄에게 은혜를 베푼 만큼 다른 보답을 해줄 것이다.

그것이 제국 귀족의 명예니까!

‘하지만...’

정말 탐이 났지만, 아리언은 딱 선을 그었다.

“그게 있다면 충분합니다. 돈을 빌려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 장부는...”

“아니. 도련님께서 갖고 계십시오.”

“......”

아리언의 말에 이한은 ‘이 상인이 혹시 오늘 처음 일하기 시작했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원래 돈을 빌릴 때는 물건을 돈 빌려주는 사람이 갖고 있는 법이지, 돈 빌려가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리언은 살짝 울컥했다.

‘신뢰를 보여주는 건데...!’

아리언이 저 장부를 탐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저건 워다나즈 가문과 다른 귀족 가문들의 약속이나 마찬가지였다.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이 나중에 저 장부를 들고 다른 가문의 저택에 찾아가면 얼마나 감사를 받겠는가.

아리언이 저 장부를 갖고 다른 귀족 가문들을 돌아다니면 이득이야 볼 수 있겠지만, 워다나즈 가문 쪽에서는 안 좋게 볼 수 있었다.

-저 상인 놈이 멋모르는 이한을 꼬드겨서 장부를 뺏은 거 아니야?

아리언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눈앞의 도련님을 속였다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했다.

그 대신 ‘이 상인이 혹시 오늘 처음 일하기 시작했나?’같은 오해를 받았지만!

“도련님. 생각해보십시오. 도련님께서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이신데, 그 장부를 제가 갖고 있는지, 없는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래도 갖고 있는 게 나으실 텐데...”

“...혹시 마을을 안내해드릴까요?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으실 텐데요.”

아리언은 화제를 돌렸다.

지금 막 탈출한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정해져 있었다.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상단과 연결된 가게로 안내해주시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아리언은 슬슬 눈앞의 소년이 워다나즈 가문의 출신인지 워다나즈 상단의 출신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귀족 가문 출신이면 으레 보이는 천진난만함이나 순진함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

먼저 방을 나서는 이한의 뒤를 따라가던 아리언은 아까 갖고 온 다과가 싹 사라진 걸 깨달았다.

‘다 드셨나? 이상하다? 뭘 드시지도 않았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리언은 이한의 망토 주머니가 불룩해진 걸 목격했다.

‘...설마... 에이... 아니겠지...’

*         *         *

“이 슈크림은 어떻습니까? 마을에서 손꼽히는 장인이 만든 디저트입니다. 이 얇은 반죽 안에 크림이 가득 들어 있어서 귀족 분들도 만족스러워 하실...”

“아니, 보관하기 쉽고 부피 작은 걸로 추천해주십시오.”

“......”

“......”

이한은 무슨 전쟁 대비해서 나온 제국 보급관마냥 철저하게 행동했다.

부피가 크고, 잘 부서지고, 상하기 쉬운 음식들은 아무리 맛있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로지 최대 압축으로 인한 최대 효율만을 쫓았다.

“이 통조림은...”

“요즘 제국에서 인기 있는 통조림입니다? 디자인이 참 예쁘지 않습니까?”

“이래서는 꽉꽉 담을 수 없습니다!”

“......”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치워버리는 이한의 모습을 보고 아리언은 고민했다.

...마법학교 졸업하면 상단에 취직하라고 권해봐야 하나?

아무리 봐도 뛰어난 상인의 자질인데...

이한은 각종 식료품들을 고르고, 부피와 무게를 계산하고, 그걸 담을 상자까지 손수 골랐다.

“잠깐만요. 도련님. 학교에는 마차를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저희를 벌하실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들고 갈 겁니다.”

“...???!?!”

아리언만 놀란 게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도 ‘지점장님 말려야 하지 않아요?’하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무슨 생각이 있으실 거다.”

그러나 아리언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저 워다나즈 가문의 도련님은 노련한 상인의 축복이 깃든 사람이라는 것을.

무언가 생각이 있으리라!

“슬슬 재단사한테 가시죠. 신사복을 맞춰드릴 겁니다.”

“?”

이한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어... 그 누더ㄱ... 아니, 그 옷은 좀 불편하지 않으십니까?”

마법학교 학생들의 옷은 상당히 불편하고 거칠어보였다. 심지어 직원들이 봐도 그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한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별로 안 불편합니다.”

“!?”

“물론 옷이 필요한 건 맞습니다만...”

이한의 이어지는 말에 아리언은 안심했다.

그래도 옷 생각이 있긴 하셨구나!

“재단사 말고, 포목점으로 갑시다.”

“...설마 직접 만드실 생각이신...?”

“맞습니다만?”

“......”

포목점에 들어가서 두껍고 튼튼한 옷감만 찾아서 고르는 이한의 모습에, 아리언은 현기증이 났다.

이번 마법학교 신입생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같은 옷감인데 왜 더 가격이 쌉니까?”

“무늬가 유행이 지나서...”

“그렇다면 유행 지난 옷감으로 주십시오. 이 옷감과 이 옷감 중 뭐가 더 물을 잘 견딥니까?”

아까 식료품점에 이어, 이한은 포목점에서도 눈부신 수완을 발휘했다.

수많은 옷감 중에서 알짜배기만 쏙쏙 골라내는 모습에 노련한 포목점 주인도, 상단의 지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아리언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자리를 지배하고 있는 건 저 워다나즈 가문의 어린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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