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화
“교수님 말이 맞습니다.”
“두렵다고 해서 물러나기만 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진정 강한 기사는 두려움에 맞서 싸웁니다!”
‘이런 정신 나간 놈들.’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다른 탑 학생들이 있었다면 그들과 손을 잡고 ‘잉걸델 교수님 정신 차리세요’라고 말했을 테지만, 불행히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이한이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놈들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풀려난 소환수와 싸우는 걸 저렇게 찬성하다니.
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게 보통 아닌가?
가끔 이한은 이 학교에 제정신인 사람이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아서 외로워질 때가 있었다.
“나는 좋은 제자들을 두었습니다.”
잉걸델 교수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반응에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두려워하거나 피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역시 재능 있는 검객들인 만큼 두려움을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려고 했다.
주변을 돌아보던 잉걸델 교수의 시선이 문득 이한에게 멈췄다. 이한은 반사적으로 외쳤다.
“정말 훌륭하신 생각입니다. 교수님!”
“고맙습니다. 다들.”
잉걸델 교수는 이한까지 그렇게 외치자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떠올린 생각치고는 꽤 괜찮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자. 다들 세 명씩 모여서 한 조를 짜십시오.”
다행히 잉걸델 교수에게는 남은 양심이 있었다. 혼자서 몬스터를 상대하란 소리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앗. 망했군.’
이한은 망했다는 걸 깨달았다.
닐리아처럼 친구를 사귀는 데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조 짜기부터 숨이 막히는 것이다.
이한이 닐리아는 아니었지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과 손을 잡을 리 없었다.
‘한 명은 더르규로 때운다고 치고, 다른 한 명은 강제로 패서 데리고 와야 하나? 교수의 시선을 따돌리고 협박할 수 있을까?’
“교수님. 조는 마음대로 짜도 됩니까?”
“아니요. 제비를 만들었으니 각자 뽑으시면 됩니다.”
잉걸델 교수는 이한에게 살짝 눈짓을 보냈다.
교수도 이한이 푸른 용의 탑 소속인 만큼,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친하지 않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이렇게 배려해주는 것이었다.
‘교수님...’
이한은 고맙긴 했다.
그런데...
‘...그렇게 배려를 해주실 거면 그냥 탈출한 소환수 잡는 실습보다는 검술 형(形) 훈련이나 시켜주시지...’
배려의 방법이 비뚤어진 것도 참으로 교수다웠다.
이한은 줄을 서서 제비를 뽑았다. 숫자 4가 쓰여 있었다.
“4 뽑은 사람 있나?”
더르규가 손을 들었다. 이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매우 걱정된다는 듯이 이한을 노려보았다.
또 더르규를 체스말처럼 갖고 노는 거 아니야?
“한 명 더 없나?”
한 조는 세 명.
이한의 말에 누군가 손을 들었다.
모라디 가문의 지젤이었다.
“......”
“......”
더르규와 이한은 물론이고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까지 경악했다.
‘이거 칼부림 터지는 거 아닌가?’
한쪽은 입학 전부터 온갖 사악한 마법의 비의에 통달한 워다나즈 가문의 정수 이한.
한쪽은 타고난 카리스마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이끄는, 북부 기사 가문 중 가장 강력한 가문 중 하나인 모라디 가문 출신의 지젤.
게다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러나 지젤은 칼을 휘두르는 대신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뜻 모를 미소만 지었다. 이한은 그게 더 불길하게 느껴졌다.
“서로 유치하게 실수를 했으니 이번 기회에 잊으면 안 되나?”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이한?”
더르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물론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따지고 보면 지젤이긴 했다.
하지만 감정싸움에 그런 선후관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엿먹인 강도만 보면 이한이 압도적이었다.
잠재운 다음 해골 교장한테 떠넘겨서 징벌방 보내기, 야밤에 친구들 이끌고 휴게실 습격해서 깃발 훔치기 등등.
더르규는 지젤과 그리 친하지 않았지만, 같은 북부 기사 가문 출신인 만큼 어떤 사람인지는 꽤 잘 알았다.
오만한 자존심 덩어리인 만큼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더라도 이한에게 아주 단단히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진지하게 걱정이 됐다.
“이한. 같이 움직일 때 무조건 날 너와 모라디 사이에 둬라. 그리고 절대 모라디에게 등을 보이지 말고.”
“고맙다. 더르규. 응원이 되는데.”
“조를 다 짰습니까?”
잉걸델 교수는 확인한 다음 말을 이었다.
“파티에는 언제나 리더가 있어야 합니다. 종이 귀퉁이에 붉은 칠이 되어 있는 걸 뽑은 사람이 리더입니다. 리더는 지시를 내려 보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리더의 지시를 따라 몬스터를 상대하고요.”
“......”
이한은 뽑은 종이 귀퉁이에 붉은 칠 같은 건 없었다는 걸 떠올렸다.
“더르규. 붉은 칠이 되어 있는 걸 뽑았다고 해주겠나?”
“...미안하다.”
이한과 더르규는 지젤을 쳐다보았다. 지젤은 붉은 칠이 되어 있는 종이를 흔들며 아까 같은 뜻 모를 미소를 다시 지었다.
“대장님이라고 불러보시지?”
“대장.”
“아니지. 님을 붙여야지.”
“대장님.”
이한의 대답에 지젤의 미소가 짙어졌다.
“뒤에서 찔리기 싫으면 지시 잘 내리도록.”
“......”
북부 산맥 너머로 흰 얼음폭풍이 몰려오는 걸 목격한 적 있는 기사들은 더 이상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 있었다.
더르규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지만, 지금 이한과 지젤이 서로 쳐다보는 모습은 진지하게 무서웠다.
* * *
“그래서 저희가 상대해야 할 소환수는 어떤 소환수인가요?”
“그건 알려줄 수 없습니다.”
“...?”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모두 똑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한은 불길함을 느꼈다.
“정체 모를 소환수를 상대하는 방법을 배우려는 것인데, 정체를 미리 알아서야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잉걸델 교수가 친절하게 보충설명을 해줬다.
많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아하 그렇구나’하고 납득해버렸지만 이한이나 머리가 멀쩡한 흰 호랑이 탑 학생 몇몇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금부터 한 조씩 차례대로 별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안에 잡아 놓은 소환수가 있으니, 놈을 상대한 다음 반대쪽 출구로 나가면 됩니다.”
잉걸델 교수의 말이 끝나자, 아까 머리가 멀쩡한 몇몇 학생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래도 교수님. 저희가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소환수일 텐데 정보가 조금은 필요할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힌트라도 조금 주십시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말에 잉걸델 교수의 얼굴이 살짝 고민으로 물들었다.
생각해보니 너무 난이도 높은 실습인가 고민이 들었던 것이다.
‘하긴 자기들끼리 상대하는 방법을 찾는 경험도,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정보는 있어야 할지 모르겠...’
다른 교수들의 기행으로 마비되었던 정상인의 감각이 돌아오려던 찰나,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끼어들었다.
“겁쟁이 같은 소리 하지 마!”
“교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그것 하나 못하는 나약한 자식들이라고 생각할 거 아니야!”
“아닙니다. 여러분.”
“교수님. 저희는 괜찮습니다!”
“힌트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저희의 손과 발, 검으로 상대하는 방법을 찾아내겠습니다.”
‘여기 마법학교 아닌가?’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을 쓰자 애들아! 가능하면 힌트도 받고!
“멍청한 쓰레기들이 진짜...”
“?”
“뭐. 왜?”
이한이 고개를 돌리자 지젤이 어쩌라는 듯이 말했다.
원래 표정이나 언행을 관리하는 것도 상대를 봐가면서 하는 법. 알 거 다 아는 워다나즈 놈 앞에서 굳이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었다.
“멍청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
“그쪽도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할 때가 있긴 하네. 내가 내리는 지시도 그렇게 들으라고. 그러면 아무 문제도 없을 테니까.”
지젤은 경고하듯이 말했다.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난 지시에 문제가 없다면 아무 불만이 없어. 내가 왜 괜한 시비를 걸겠어? 난 남한테 시비를 거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
“......”
지젤은 물론이고 더르규도 살짝 당황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자연스럽게 잘 패고 다니던데...’
“그런 사람이 남을 배신하고 교장한테 넘겼다고?”
지젤은 팔짱을 끼고 기가 막히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눈빛은 벌써 검을 뽑아도 몇 번은 뽑았을 눈빛이었다.
“딱히 같은 편이 아니었으니 배신은 아니지 않나...”
“이한. 내가 화술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그만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더르규가 이한을 말렸다.
더르규도 딱히 지젤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몬스터하고 싸우기도 전에 이한과 지젤 중 한 명은 쓰러질 것 같았던 것이다.
“오해를 풀려고 애쓰던 중이었는데.”
“아니야. 이한. 어떤 오해는 풀 수 없는 것도 있다. 그리고 이한 넌...”
더르규는 ‘넌 적을 열받게 만드는 재능이 있다’라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둘 사이를 말릴 수 있는 건 더르규밖에 없었다. 더르규는 힘을 내기로 마음먹었다.
말주변은 없지만 그래도...!
“둘 다 생각해봐라. 서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멋대로 굴어봤자 손해를 보는 건 둘 모두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수업인 만큼 내준 목표는 성실하게...”
“그건 당연하지. 더르규. 걱정하지 마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초이. 그건 말 안 해도 아니까.”
둘이 더르규를 동시에 타박했다. 더르규는 괜히 억울해졌다.
* * *
잉걸델 교수가 마련한 별관 건물은 거대한 체육관이나 강당 같은 겉모습을 갖고 있었다.
물론 닫혀 있는 문 안에는 즐거운 운동 대신 탈출한 소환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게 달랐지만.
‘소리가 안 나는 게 더 신경이 쓰이는군.’
차라리 비명소리라도 들렸다면 그걸로 짐작이나 해볼 텐데, 마법으로 차단된 것처럼 무음이 지속되니 오히려 더 소름끼쳤다.
뭘 갖다 놓은 거야?
“문 열고 들어간 다음에도 멋대로 움직이지 말고 상황부터 파악해. 만약 들어가자마자 공격 시작하면 각자 왼쪽, 오른쪽으로 나눠서 움직이고...라고 옆으로 전해. 초이.”
“......”
더르규는 지젤의 유치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바로 이한이 옆에 있는데 전하긴 뭘 전하란 말인가?
‘이렇게 유치한 사람은 아니었잖나, 모라디!’
“안이 어두울 경우 바로 빛 마법부터 켜고 들어갈 건데, 괜히 놀라지 말라고 옆으로 전해라. 더르규.”
“괜히 마력 낭비했다가 쓰러지면 버리고 갈 거라고 옆으로 전해. 초이.”
“빛 마법 쓸 줄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내가 나서는 거라고 옆으로 전하도록. 더르규.”
“빛 마법 정도는 나도 쓸 줄 아니 으스대지 말라고 옆으로 전해. 초이.”
‘누가 절 좀 살려주십시오.’
더르규는 마법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온갖 이야기를 들었었다.
학생들을 마법에 몰두시키기 위해 가혹한 시련을 준비한다더라, 교수가 트롤이라더라, 기사 출신들은 마법에 둔해서 구박을 받는다더라...
하지만 어떤 이야기에서도 이런 상황은 없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안은 밝지 않고 어두웠다.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슬슬 이 학교의 패턴이 예상되는 게 더 무섭군.’
밝을 줄 알고 들어갔던 학생들은 어두컴컴한 안의 모습에 당황했을 것이다.
잉걸델 교수가 이 어둠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생각했을지 상상이 갔다.
‘소환수들은 대낮보다 밤에 돌아다닐 확률이 많으니까 대비하라고 준비했겠지.’
“빛이여!”
이한의 주문은 태양처럼 떠올라 별관 안을 강하게 비췄다. 더르규도, 지젤도 이한의 마법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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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소환수는 정령과 황소가 섞인 것 같은 겉모습을 갖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평범한 황소에게서 느껴질 수 없는 강화 마법과 물약의 기운까지.
이한은 순간 우레걸음 교수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