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화
저번에 돌아온 학생들을 보고 ‘황소는 없었냐? 왜 없지?’같은 질문을 던졌던 우레걸음 교수.
왜 갑자기 그 때 그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지 알 수 없었다.
‘집중하자.’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눈앞의 정령 황소는 상당히 독특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먼저 두 가지 종류의 마력.
아마 강화 마법과 물약의 기운이 분명했다.
이론적으로 설명하기는 힘들었지만 외부에서 시전하는 강화 마법과, 안에서 작동하는 마법 물약의 마력은 그 기운이 달랐다.
그리고 마력과 비슷하지만 그 궤가 다른 기운 하나.
‘정령의 힘인가?’
이한이 정령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지금 눈앞의 황소가 정령과 섞여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평범한 황소는 육체의 절반이 일렁거리는 얼음 덩어리로 되어 있지는 않을 테니까.
이쪽을 노려보면서 탁탁 발굽을 구를 때마다 바닥에 살얼음이 끼었다.
“이한. 이쪽을 노려보는데, 달려들 것 같나? 어떻게 생각하지?”
“원래 별 생각 없었는데 불을 켜서 화난 걸지도 모르겠군.”
“......”
더르규와 지젤은 고개를 돌려 이한을 쳐다보았다.
야!
“뭐? 어두운데 불은 켜야 할 거 아니야. 불 켰다고 화내는 놈이 이상한 놈이지.”
“지금 정령 황소가 이상한지 안 이상한지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
“놈에게 데미지를 줄 방법이 있는지 물어봐, 초이.”
‘아직도 안 끝났어?’
지젤이 이한에게 할 말을 더르규에게 전하자 더르규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마 정령 부분에는 평범한 물리 공격은 안 들어가겠지. 무기에 마법을 거는 건 아직 무리고...”
몬스터들 중에는 평범한 공격은 통하지 않는 놈들이 제법 있었다.
이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모험가들은 마법이 걸린 무기를 갖고 다니거나, 혹은 무기에 마력을 담는 방법을 익히곤 했다.
“이 중에서 무기에 마력을 조금이나마 담을 줄 아는 사람 있나?”
이한의 질문에 더르규가 손을 들었다. 지젤도 손을 들었다. 질문을 한 이한도 손을 들었다.
...지젤은 미친 놈 보듯이 둘을 쳐다보았다.
더르규야 그렇다 쳐도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 놈이 왜 마력을 담을 줄 아는 거야?
“더르규한테 한 말인데 그쪽도 대답했군. 어쨌든 셋 다 공격할 수 있다면 잘 된 거 아닌가? 흩어져서 찌르자고.”
사실 이 셋이 한 조에 모여 있는 건 상당히 행운이었다.
이한이나 더르규는 지금 검술 수업을 듣는 학생들 중 손꼽히는 실력이었고, 지젤은 둘에 비해 살짝 약했지만 마찬가지로 막강한 검술 실력을 갖고 있었으니까.
물론 사이는 더럽게 안 좋았지만.
“누가 가운데에 설 건지 물어봐. 초이.”
지금 같은 상황에서 접근을 시작하면 정령 황소는 정면에 있는 놈을 싫어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한은 대장을 존중하는 뜻을 담아 물었다.
“당연히 대장님이 가운데에 서야 하지 않냐고 전해주겠나? 더르규?”
지젤은 가운뎃손가락으로 대답했다. 더르규는 한숨을 쉬었다.
“가위바위보?”
“가위바위보.”
이한이 가운데. 지젤이 오른쪽, 더르규가 왼쪽이 나왔다.
더르규는 지젤이 저렇게 환하게 미소짓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 * *
다행히 정령 황소는 불을 켰어도 먼저 덤벼들지는 않았다.
세 학생의 전략은 간단했다.
각자 세 방향으로 흩어져서, 정령 황소가 반응할 때까지 접근한다.
놈이 반응하기 시작하면 타겟이 된 학생은 회피에 전념하고, 나머지 두 학생은 데미지를 넣는다.
‘문제는 회피인데.’
원래 이런 사냥은 몰고 피하는 사람이 중요하지 찌르는 사람은 비교적 편했다.
이한은 가운데를 피하지 못한 스스로의 실력을 안타까워했다.
-■!
아까까지만 해도 발굽만 두드리던 정령 황소가 얼음 입김을 내뿜으며 살벌하게 소리를 냈다.
누가 봐도 ‘얌전히 꺼져라’하고 경고하는 기색이었다.
이한은 더 이상 접근하는 대신 마법을 사용했다.
“샘솟아라, 움직여라!”
물의 구슬이 허공에 샘솟더니 그대로 정령 황소한테 날아갔다. 가만히 서있던 정령 황소가 화들짝 놀라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작렬한 물 구슬이 터져나갔다.
퍽, 퍽!
“대단... 잠깐.”
다시 봐도 감탄만 나오는 마법 솜씨에 놀라워하던 더르규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이한이 물 구슬을 날리는 방향이 어쩐지 좀 이상했던 것이다.
위에서 아래쪽으로 쏘듯이 내리찍는데, 그 결과가 마치 정령 황소를 오른쪽으로 몰듯이...?
‘빌어먹을 새끼가 진짜.’
지젤은 쌍검을 뽑아들었다.
더르규가 눈치를 챘는데 지젤이 눈치를 못 챌 리 없었다.
애초에 지젤도 정령 황소가 자기 쪽으로 오면 이한 쪽으로 몰려고 했었던 것이다.
팟!
지젤은 좌측 대각선 뒤로 뛰었다.
자신에게 쏠린 정령 황소의 시선을 다시 이한에게 돌리기 위해서였다.
순간적으로 몰렸지만 정령 황소에게 누가 더 위협적인지는 뻔했다.
나름 꾀를 냈지만 저건 결국 자기 무덤을 판 짓이었다.
-■■!
자극 받은 정령 황소는 완전히 각도를 꺾어 이한과 지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밤에 숨노니!”
“...?!”
이한의 신형이 사라졌다. 지젤은 욕을 할 시간도 없었다. 정령 황소를 상대하기 위해 쌍검을 뽑고 자운검을 펼쳐야 했다.
오른손에 든 검을 흔들어 정령 황소의 시선을 유인하고 왼손에 든 검으로는 황소의 턱을 정확히 노렸다. 지젤은 노련한 투우사(鬪牛士)처럼 옆으로 스쳐지나가며 정령 황소에게 데미지를 넣었다.
‘칫.’
지젤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혀를 찼다. 정령 부분을 공격했는지 황소는 전혀 데미지가 없어 보였다.
들고 있는 검에는 살얼음이 꼈는데, 정령 황소가 공격 받은 부분은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끽-!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정령 황소가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엄청나게 유연하고 민첩한 놈이었다.
지젤은 고개를 까딱거리며 다시 와보라는 듯이 검을 흔들었다.
꽝!!!!
그 순간 정령 황소가 무언가에 치인 것처럼 옆으로 날아갔다.
이한은 투명화 마법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손에 들고 있던 단단한 목검이 완전히 가루가 되어 있었다.
“......”
“......”
* * *
물론 변명 같이 들리겠지만, 이한이 지젤 쪽으로 시선을 끈 이유가 있었다.
이한이 제대로 된 공격을 하려면 누군가 정령 황소의 시선을 끌어줘야 했던 것이다.
지젤한테 말해봤자 당연히 믿어줄 리 없을 테고...
마음 아프지만 결과로 보여줄 수밖에 없었다.
“이래도 괜찮을까 이한?!”
“괜찮아! 어차피 이번 수업 아니면 같은 조 할 일도 없다!”
이한은 호쾌하게 대답하며 투명해진 상태로 황소의 뒤를 쫓아 달렸다.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이한의 중얼거림이 주문으로 변해 전신에 감돌았다.
안 그래도 집중으로 선명해진 시야가 더욱 더 또렷하게 변하며 정령 황소의 움직임이 잡힐듯 눈에 들어왔다.
우우우웅!
저번에 검 부숴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한은 가차 없이 마력을 불어넣었다.
정령 황소가 지젤에게 시선이 쏠린 덕분에 제대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한은 검이 박살나기 전에 정령 황소한테 휘둘렀다. 당연히 공격과 함께 검은 박살이 났다.
꽝!!!!
그래도 효과는 확실했다. 정령 황소는 옆으로 날아갔다. 이한은 충격으로 마비된 손을 흔들며 정령 황소가 일어나기 전에 외쳤다.
“지금이다! 밖으로 나가자!”
“그... 그래.”
더르규는 차마 지젤의 표정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웠다.
* * *
염소 수인족, 앙라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출구를 쳐다보았다.
3조로 먼저 들어갔다 나온 앙라고는 4조가 매우 걱정이었다.
“워다나즈 놈이 더르규를 또 이용하면 어떡하지?”
“걱정하지 마. 모라디가 있잖아. 모라디가 알아서 잘 막아줄 거야.”
“그렇겠지? 모라디가 있으니까.”
다들 그렇게 말은 해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마치 늑대와 양을 같은 곳에 넣어둔 것 같은 기분!
그런 만큼 안에서 셋이 걸어나왔을 때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다!’
“나왔구나, 더르규!”
“모라디, 고생했어!”
“......”
“......”
“???”
그러나 나온 친구들은 4조의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워다나즈야 원래 무표정한 차가운 놈이라지만, 더르규까지 매우 어색한 표정으로 몸 둘 곳을 몰라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모라디는...
왠지 모르겠지만 말을 걸면 죽일 것 같이 살벌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앙라고는 무서워서 말을 거는 걸 멈췄다.
“아. 앙라고.”
“더르규! 잘 피했어?”
“그래. 잘 피했다. 너희들은 어떻게 해결했지?”
더르규는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조 학생들이 이한 같은 방법으로 해결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구석에 걸려 있는 횃불 집어서 던진 다음에 놈이 싫어하는 동안 도망쳐 나왔지.”
“우린 화염 불러내서 놈한테 던진 다음에 죽어라 달려서 나왔는데.”
“야. 너희들 똑똑하다. 우리는 그럴 능력이 없어서 차례대로 황소 유인하면서 간신히 출구 찾았는데.”
각 조의 학생들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머리를 굴려서 현명하게 해결한 조도 있었고, 무식하게 몸으로 때워서 해결한 조도 있었다.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더르규의 표정은 굳어졌다.
‘생각해보니까 상대한 다음에 출구로 나가라고 하셨지, 쓰러뜨리라고 하지는 않으셨잖아?’
잉걸델 교수는 쓰러뜨리란 말은 한 마디도 안 했는데 이한과 지젤이 어떻게 잡을지 떠드는 바람에 더르규도 분위기에 넘어가버린 것이다.
다음에 들어간 조들도 차례대로 나왔다. 몇몇 학생들은 망토나 옷에 얼음을 잔뜩 묻힌 채로 울상이 되어서 튀어나왔다.
“다들 훌륭했습니다. 상대하고 출구로 나가라고 했는데 굳이 제압까지 한 조도 있었고요. 원래 그러라고 들여보낸 건 아니지만, 워낙 훌륭하게 제압을 해서 칭찬밖에 해줄 수 없겠습니다.”
잉걸델 교수의 말에 학생들은 웅성거렸다.
몇몇 학생들은 지젤한테 ‘지젤 혹시 네가 했어?’라고 물어보려다가 지젤의 기분이 매우 더러워보여서 그냥 물러섰다.
“몬스터를 상대해 본 기분은 어땠습니까?”
“생각보다 강했습니다. 움직임도 빨랐고요.”
“공격 자체가 안 들어갈 줄은 몰랐습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생각나는 대로 소감을 말했다. 엘프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다들 그랬을 겁니다.”
“......”
더르규는 교수님의 말을 들으며 과연 자신의 조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고민했다.
“다들 느끼는 게 달랐겠지요. 하지만 몬스터를 피해 빠져나가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겁니다. 그렇게까지 겁먹을 건 없다는 것 말입니다.”
“맞습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동의했다.
단순히 도망치는 일이라 하더라도 몬스터를 직접 만나서 상대해보니 생각보다 두려움이 줄어들었다.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결국 그 두려움과 직접 마주해야 하는 것이다.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결국 검술과 근본이 같습니다. 침착하게, 상대가 어떤 녀석인지 파악하고, 이길 수 없다면 어떻게 도망칠지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이 말로는 가르칠 수 없는 교훈을 얻은 것 같아서 기쁩니다.”
더르규는 교수의 말에 동감했다.
물론 더르규의 조는 그냥 냅다 팼지만...
“참. 이번 학기 수업은 오늘 뽑은 조대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생각보다 아주 균형이 좋군요.”
“......”
더르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이한과 지젤을 쳐다보았다.
둘의 표정도 더르규와 비슷하게 굳어 있었다. 이한은 더르규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음. 아까 있었던 일을 사과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나?”
“...그냥 날 사이에 두고 말하는 게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