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화
“다들 이렇게 환영을 해주니 고맙군요.”
소환 마법 교수, 밀레이는 뜨거운 강의실의 분위기에 의아해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밀레이 교수는 어느 누가 봐도 제국의 유서 깊은 대가문 출신의 귀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가문 출신의 귀족은 걷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티가 나는 것이다.
‘푸른 용의 탑 놈들은 이제 좀 예외긴 하지.’
물론 탑에 갇혀서 쫄쫄 굶은 학생들은 예외였다. 귀족이든 뭐든 사람이 걸신들리게 되면 체면이 없어졌다.
밀레이 교수는 한쪽 눈에 차고 있는 단안경을 살짝 올렸다. 그 모습이 매우 엄격한 완벽주의자 같았다.
하지만 이한은 겁먹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볼라디 교수보단 낫겠지.’
가르시아 교수가 옆에서 간단히 설명을 시작했다.
“흑마법과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소환마법도 2학년 때부터 배우게 되는 분야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렇게 밀레이 교수님을 부른 것은, 소환마법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기도 하지만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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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강의실 밖 학교 부지에서 탈출한 소환수 한 마리가 울부짖었다. 창문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학교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랍니다.”
“가르시아 교수님...!”
“저희는 교수님밖에 없어요!”
학생들 몇몇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밀레이 교수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르시아 교수. 시작해도 될까요?”
“네. 시작해주세요.”
“여기서, 소환마법에 관심 있는 학생?”
모든 학생들이 손을 들었다. 이한도 손을 들었다. 왜 모르툼 교수의 슬픈 얼굴이 스치고 지나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환마법은 정말 좋은 마법이다.’
흑마법도 그 안에서 저주나 원소, 언데드 소환이나 음에너지 등 분야가 다양하게 나뉘듯이, 소환마법도 말이 소환마법이지 그 안에 수많은 분야를 포함하고 있는 마법이었다.
정령 소환, 악마 소환, 몬스터 소환, 아티팩트 소환, 마법 물체 소환 등등.
생물체부터 무생물체까지 온갖 다양한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 마법인 만큼(심지어 흑마법과도 일정 부분 겹쳤다), 그 활용도도 무궁무진했다.
옛날 동화에 보면 평생 고생하다가 어디서 뛰어난 소환수 하나와 계약한 마법사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그것도 게으르게) 이야기가 나왔다.
동화인 만큼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소환마법은 한 번 대성하면 먹고 살기 좋았다.
“고맙군요. 하지만 여기서 소환마법을 배울 자격이 있는 학생은 한 명이 될까 말까일 겁니다.”
“......”
“......”
교수들은 원래 찬물 끼얹는 데에 다 재주가 있었다. 밀레이 교수 또한 그랬다. 그녀는 엄하게 말했다.
“숨기지 않겠습니다. 소환마법은 어려운 마법입니다. 배울 능력이 없는데 괜히 2학년 때 강의에 들어오면 학생에게 힘든 일일 겁니다.”
‘저게 교수지.’
이한은 감탄했다.
학생이 배울 능력이 없으면 말리거나 기다려야지 ‘왜 못 배우지? 어디 죽기 전에도 못 배우나 볼까?’하면 그건 교수가 아니라 깡패 아닌가.
“소환마법은 단순히 한 분야의 마법 지식만으로는 배울 수 없습니다. 정령 소환은 정령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악마 소환은 악마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몬스터 소환은 몬스터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하죠. 비교적 쉬운 무생물체 소환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하겠습니다. 자신이 없다면 소환마법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오히려 더 솔깃한 모양이었다.
어린 나이인 만큼 어렵다고 물러설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다들 더 의욕이 생기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쉽다고 해도 학생들이 시큰둥해했던 흑마법과는 정반대였다.
가르시아 교수는 작게 속삭였다.
“다들 재능 있는 학생들이에요. 한 번 기회를 주시겠어요?”
밀레이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팟!
지팡이를 휘두르자 갑자기 학생들 앞에 기묘한 도형이 새겨진 마법진 스크롤들이 나타났다.
찢어서 발동되는 형태의 일회용 스크롤이 아닌, 펼쳐져 있는 스크롤 위에 마법진이 새겨진 고정 스크롤이었다.
“다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을 듣고 있겠죠.”
“네.”
강의 이름을 듣자 학생들의 표정이 개구리라도 씹은 것처럼 변했다.
마법도, 교양도 아닌 지독한 숫자들의 고문을 견딜 수 있는 학생은 얼마 없었다.
‘솔직히 그 정도면 쉬운 편인데.’
이한은 다른 친구들이 들었으면 돌을 집어 던졌을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면 학생은 소환마법을 배울 가능성이 없습니다.”
“......”
말 한 마디 꺼냈다가 소환마법에서 탈락할 꼴이 되자 가이난도는 입을 다물었다.
“다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을 잘 들어두십시오. 소환마법에서 마법진의 작성과 계산은 필수적입니다.”
이한은 마법진을 읽어보았다.
벌써 눈동자가 빙글빙글 갈 곳을 잃고 헤매는 가이난도와 달리, 이한은 그려진 마법진이 어떤 마법진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마력을 이런 식으로...’
마법진은 일종의 회로(回路)였다.
전기회로는 전류가 흐른다면 마법진은 마력이 흐른다는 것이 차이점.
직접 마법을 써본 마법사들은 누구나 알겠지만, 마법을 시전하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법의 난이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더더욱 그랬다.
일단 필요해지는 마력량이 올라갔고, 그 마력으로 구성해야 하는 마법의 구조도 복잡해졌다.
마법도 어느 수준부터는 ‘이건 사람이 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런 마법사들을 도와주는 것이 바로 마법진이었다.
어느 부분에서는 증폭, 어느 부분에서는 감소, 어느 부분에서는 우회, 어느 부분에서는 차단 등 다양한 형태로 마력을 순환시켜 마법사의 부담을 덜어주는 보조도구.
마법진을 따라 순환된 마력을 계산하고 머릿속에 그리던 이한은 순간 깃펜의 환상을 보았다.
‘...뭐지?’
마법의 세계에서는 우연이 없었다.
이한은 방금 본 깃펜이 이 마법진과 관계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마법진은 깃펜을 소환하는 소환마법진입니다.”
“깃펜이요?”
“깃펜을...?”
학생들은 당황스러워했다.
하다못해 단검도 아니라 깃펜을 소환한다고 하니 ‘왜 굳이?’라는 표정이었다.
이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사할 줄 모르는 놈들 같으니.’
이러다가 밀레이 교수가 책상 치워버리고 악마 소환진 던져준 다음 ‘죽기 싫으면 소환 성공시켜라’라고 하면 책임질 것인가?
다행히 밀레이 교수는 볼라디 교수와 달랐다. 교수는 전혀 달라지지 않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력으로 구성된 마법 깃펜입니다. 학생들이 소환한 건 오래 가지 못할 테니, 일단 소환하는 것에만 집중하도록 하세요.”
교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학생들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마법진을 가동시켰다.
“깃펜이여, 나와라!”
“마법의 깃펜 님. 나와 주십시오!”
주문과 함께 곳곳에서 마법진이 불타오르거나 스크롤이 찢어졌다.
마력을 견뎌내기 위해 만들어진 마법진이지만, 마법사의 실수에 따라 얼마든지 망가지고 부서지는 것이다.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던 부분이었기에 밀레이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망가진 마법진이 사라지고 새 마법진이 나타났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곳곳에서 깃펜 비슷한 걸 소환해낸 학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푸른 용의 탑은 요네르나 아덴아르트, 아산 등 가장 성공한 숫자가 많았고 검은 거북이 탑이나 불사조 탑도 제법 학생들이 나왔다.
흰 호랑이 탑은 가장 숫자가 적긴 했지만 그래도 몇몇 재능 있는 학생들이 깃펜 비슷한 걸 불러냈다.
학생들이 싱글벙글하는 걸 보고 가르시아 교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걸 가지고 좋아하면 안 되는데.’
실제로 밀레이 교수의 얼굴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딱딱한 조각처럼 그대로 서있었다.
소환마법의 까다로움은 바로 이런 점에 있었다.
‘비슷하게 소환한 것’은 실패나 마찬가지!
원소마법은 크기나 형태의 차이가 있더라도 일단 해내기만 하면 성공에 가까웠지만, 소환마법은 정반대였다.
완벽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소환물에 의지를 부여하는 학문인만큼 조금이라도 실수할 경우 소환물이 마법사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그나마 깃펜이라 다행이지...
“달... 달카드 이 자식이, 마법 깃펜으로 날 공격했어!!”
“오해야, 가이난도! 깃펜이 멋대로 움직였어! 그보다 고작 깃펜이잖아!”
“황족 암살이다! 황족 암살이라고! 이한, 도와줘!”
“고작 깃펜이라니까! 깃펜으로 죽을 확률이 몇 퍼센트나 되겠어!”
물론 그 깃펜만으로도 소란이 일어나기에는 충분했다.
* * *
흰 호랑이 탑 소속, 알파 가문의 앙라고는 매끈한 형태의 깃펜이 모습을 드러낸 걸 보고 뿌듯한 감격을 느꼈다.
아무래도 신분이 신분인 만큼 여러 마법에서 뒤쳐지는 걸 느꼈지만, 소환 마법은 조금 달랐다.
어쩌면 지젤보다도 더 뛰어난 걸지도 몰랐다.
“!”
앙라고는 앞에 앉은 이한을 보고 매우 고소해했다.
이한 앞에는 깃펜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처음으로 저 워다나즈 가문 출신의, 사악한 대마법사 소년의 콧대를 꺾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앙라고는 이한을 불렀다.
“워다나즈. 설마 소환에 실패한 거냐?”
“......”
“워다나즈! 무시하지 말고! 내 깃펜을 봐라!”
옆에 있던 요네르가 대신 대꾸했다.
“집에 깃펜이 없었어? 깃펜 갖고 자랑하게?”
“여기 내 깃펜을 보라니...”
쾅!!!
굉음이 터져 나왔다. 앙라고는 순간 이한이 흑마법을 갈긴 줄 알고 겁에 질려 엎드렸다.
이한의 마법진 위로 마법 깃펜들이 우수수 생성되기 시작했다.
“......”
이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하늘거리는 깃펜들을 쳐다보았다.
‘실패했군.’
앙라고가 뒤에서 뭐라뭐라 떠들긴 했지만 이한은 듣지 못했다. 그만큼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괴되기 쉬운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보내서 소환마법을 완성시키는 일.
다른 학생들한테는 그냥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한한테는 지독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조금만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마력의 파도가 마법진을 찢어발길 테니까.
때문에 이한은 남들이 시작할 때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소환마법은 적성에 안 맞을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이한의 운명은 볼라디 교수처럼 전투마법사에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의외로 마법진은 망가지지 않았다.
이한 본인이 놀랄 정도였다.
‘내가 이 정도였나?’
마법진에 대한 완벽한 이해.
그리고 최근 (강제로) 늘어난 마력 컨트롤.
이 두 개가 합쳐지자, 이한은 마법진을 파괴하지 않는 데에 성공했다.
놀라운 결과물이었다.
‘아차. 과제는 소환이었지.’
마법진을 파괴하지 않고 마력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한 이한은 계속 마법진에 마력을 흘려보내다가 정신을 차렸다.
과제는 마법진 안 부수기가 아니라 마법 깃펜 소환하기였던 것이다.
“나와라, 깃펜이여.”
이한은 간단하게 중얼거리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쾅!!!
그 순간 굉음과 함께 마법진 위로 마법 깃펜들이 우수수 생성되었다.
이 본 적 없는 특이한 실패 현상에 놀라워하던 가르시아 교수는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밀레이 교수의 눈썹이 저렇게 올라간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원래 이한 학생이 마력이 많아서 저런 실패가...”
가르시아 교수가 대신 하는 변명에, 밀레이 교수는 표정을 원래대로 돌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건 실패가 아닙니다. 가르시아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