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화
흑암관.
모르툼 교수가 공방으로 쓰고 있는 탑은 여전히 음산했다.
‘학생들이 더 오길 원하면 주변 환경부터 개선해야 할 것 같군.’
해골, 뼈다귀, 묘비, 맹독 물병 상자가 주변에 굴러다니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오기 싫어했다.
이한이 보기에, 이번 신입생들 중에 흑마법을 배우러 올 사람들은 이한하고 가이난도가 전부일 것 같...
“??”
이한은 놀랐다.
흑암관 앞에 다른 신입생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이나.
“저... 저 자식들 왜 흑마법을 배우러 온 거야?”
“그렇게 정색할 이유가 있나?”
이한은 가이난도의 반응에 의아해했다.
가이난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교수님께서 나한테만 재능 있다고 하셨잖아!”
“......”
너 흑마법 싫다면서?
이한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말을 돌렸다.
“가이난도. 너만큼 재능 있지는 않더라도 흑마법을 배우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해.”
가이난도는 이한의 말에 살짝 반성했다.
생각해보니 조금 너그럽게 대해줘도 될 것 같았다.
“어이. 다들...”
“나한테 친한 척 말 걸지 마라. 푸른 용 탑의 잡놈들아.”
“......”
가이난도는 울컥해서 지팡이로 상대를 후려갈기려고 했다. 이한은 팔을 잡고 말렸다.
“흰 호랑이 탑 놈이군.”
“그래.”
상대의 눈동자에는 금색 빛이 희미하게 일렁거렸다.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이목구비에, 이한은 상대가 피가 섞였다는 걸 깨달았다.
“천사 혼혈인가?”
“그래. 영광스러운 선조의 피를 이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치고는 피가 상당히 희미한 것 같은데.’
당장 악마 혼혈인 티질링은 그 피가 짙어서 겉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지금 눈앞의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꽤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한의 예민한 감지력이 아니었다면 눈치 채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영광스러운 선조의 피를 이었는데 모라디 가문의 명령을 듣는 건가?”
이한은 바로 이간질을 시도했다.
지젤의 명령을 듣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줄어들수록 이한과 더르규의 생활은 쾌적해질 것 아닌가.
기사들의 명예와 긍지는 찌르기 좋은 약점이었다.
“착각하지 마라. 워다나즈. 나 라파드엘은 모라디의 명령 따위는 듣지 않으니까.”
“뭐? 모라디의 명령을 듣지 않는데 왜 그렇게 싸ㄱ... 재ㅅ... 개ㅅ...”
적당한 어휘를 찾지 못한 이한은 그냥 질문을 끝냈다.
“왜 그렇게 굴지?”
“몰라서 묻나?”
라파드엘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시치미를 떼는 게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가이난도가 옆에서 속삭였다.
“저번에 흰 호랑이 탑 놈들 징벌방으로 보내서 아냐?”
“겨우 그거 가지고?”
“아니면 저번에 휴게실에 들어가서 깃발을 훔쳐서 그런 걸지도.”
“겨우 그거 가지고?”
“...???”
가이난도는 당황했다.
어라?
그... 정도면 꽤 충분한 이유 같은데?
라파드엘은 미간을 좁히며 이한에게 말했다.
“초이 가문의 더르규! 이래도 모른다는 소리를 하지 않겠지. 네놈이 사악하게 농락하고 있는 명예로운 친구의 이름이다.”
“......”
이한은 오랜만에 할 말을 잃었다. 가이난도가 대신 변호해줬다.
“아니, 그, 더르규는 우리 친구인데.”
“변명까지 비겁하군... 마법으로 공격해서 기절시켜놓고 아직도 친구라고 지껄이나!”
“......”
가이난도는 도와달라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더르규가 흰 호랑이 탑 놈들한테 미움받을까봐 똑같이 대해준 거다.”
“그걸 말이라고 하나?”
라파드엘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반응했다.
이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떤 오해는 풀 수 없는 것이다.
“잠깐. 너... 그랄 가문 출신이지?”
가이난도는 뒤늦게 라파드엘의 가문을 떠올렸다.
남부 기사 가문, 그랄 가문.
선조에 천사의 피가 섞여 있다는 걸 자랑으로 여기는 그랄 가문은 기사 가문들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정의에 엄격한 가문이었다.
말하는 걸 보니...
“맞다. 사악한 놈들아.”
상대는 이미 이한과 가이난도를 악의 축으로 규정한 것 같았다.
이한은 아주 조금 반성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워다나즈 가문의 이미지 때문이지.’
워다나즈 가문의 광기 어린 이미지만 아니었다면 이한이 저런 오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이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그랄 가문이 왜 흑마법을 배워!?”
가이난도는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따졌다.
그렇게 성기사를 많이 배출하는 그랄 가문 출신이 왜 흑마법을 배우러 온단 말인가.
라파드엘은 당당하게 말했다.
“흑마법을 배우면 흑마법사들을 더 잘 상대할 수 있을 테니까.”
“......”
‘교수님 울겠군.’
이한은 할 말을 잃었다.
고작 4명 왔는데 그 중 한 명이 흑마법 혐오자라니...
“그렇군. 그랄. 흑마법을 배워서 흑마법사들을 상대하길 빈다. 난 네가 날 적대하길래 모라디 가문의 지젤과 함께 손을 잡고 비열하게 내 뒤를 노릴 줄 알았는데.”
“나 라파드엘을 모라디 녀석과 같은 취급하지 마라!”
라파드엘은 매우 기분나빠했다.
더르규를 꼭두각시 갖고 놀듯이 조종하는 이한도 이한이었지만,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자기 손발처럼 부리는 지젤 또한 경멸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모라디 가문의 지젤과 손을 잡고 내 뒤를 노리지 않을 건가?”
“당연하지!”
“그 패거리들과도?”
“당연하다! 뭘 묻는 거냐!”
“그럼 됐다.”
이한은 할 말 다 했다는 듯이 걸어가 버렸다.
뒤에서도 공격 안 하고, 지젤과도 손을 안 잡는다면 앞에서 뭐라고 떽떽대든 별 상관없었던 것이다.
라파드엘은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깜박였다.
뭔가 속은 기분이 드는데 정확히 뭘 당한거지?
이한의 뒤를 따라가며 가이난도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 친구지만 진짜 사악한 대마법사 같긴 해...’
* * *
라파드엘한테 한 번 당한 가이난도는 상당히 적대적으로 변했다. 다른 학생 한 명한테는 친절함 하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넌 왜 흑마법 배우러 왔냐?”
슥-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야 가이난도는 상대방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이한도 큰 키였지만, 상대는 이한이 올려봐야 할 정도로 컸다. 2m는 가뿐히 넘기는 키였다.
‘거인 혼혈!’
압도된 가이난도는 급격히 공손해졌다.
“배, 배우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실례했습니다.”
“안, 안녕. 다들 반가워.”
상대는 검은 거북이 탑 학생이었다. 인사를 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내, 내 이름은 이미르그야.”
“난 이한. 이쪽은 가이난도. 그런데 왜 주변을 보는지 물어봐도 될까?”
“친, 친구들이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어울리는 걸 안 좋아해서...”
“!”
이한은 놀랐다.
‘하긴 이상한 일은 아니군.’
불사조 탑을 제외하고 기본적으로 탑 학생들은 서로 뭉치기 마련이었다.
귀족이나 기사 출신이 거의 없는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기사 가문이 주축인 흰 호랑이 탑이나 귀족 가문이 주축인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닐리아나 랫포드 같은 애가 특이한 거였고...
그래도 이한은 혹시 몰라서 확인해봤다.
“내가 사악한 대마법사라고 생각하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응, 응? 무슨 소리야?”
“아니군. 아니면 됐다.”
다행히 귀족이라서 싫어하는 게 맞았다. 이한은 안심했다.
“난... 흑마법에 관심이 있어서 배우러 왔거든. 같이 흑마법 배우려는 친구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흥! 그럴 일은 없다!”
뒤에 있던 라파드엘이 강하게 대답했다.
흑마법을 배우려는 사악한 학생들과 친해질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미르그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라파드엘을 쳐다보았다. 라파드엘은 움찔했다. 아마 살짝 겁을 먹은 것 같았다.
“그래. 밖에서는 몰라도, 여기서 흑마법을 배울 때는 친하게 지내자고.”
이한은 손을 내밀었다.
이미르그 정도면 매우 친해지기 쉬운 케이스였다. 학교에서 하도 이상한 놈들을 많이 만나서 이 정도면 감사할 정도였다.
이미르그는 기쁜 표정으로 이한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순간 이한은 온몸의 마력을 급히 내뿜어서 버텨야했다.
‘크윽!’
이한은 이미르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표정을 관리했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나도 잘 부탁한다!”
가이난도는 멋모르고 손을 내밀었다. 이한은 말리려고 했지만 가이난도가 먼저 손을 잡아버렸다.
우득!
* * *
모르툼 교수는 늘어난 신입생들을 보고 행복한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한은 괜히 마음이 아팠다.
‘교수를 동정하면 안 되는데.’
스톡홀름 신드롬은 상당히 위험한 증후군이었다.
“콜록. 다들 잘 왔네. 흑마법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내년에는 기대해 봐도 좋겠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모르툼 교수는 라파드엘의 사악한 속셈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이한을 보며 물었다.
“뼈 소환수는 더 찾았나?”
“아직 못 찾았습니다만...”
“콜록. 음침하고 어두운 곳을 더 돌아다녀보게.”
모르툼 교수는 선물이라도 주듯이 이한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물론 별로 낭만적이지 않았다.
‘소환수들 탈주해서 돌아다니는데 학교의 음침하고 어두운 곳을 돌아다녀라... 그쯤이면 사실상 자살 같은데.’
“콜록... 다들 오늘 모임을 기다렸을 테니 빨리 수업을 진행해야겠군. 저번에 저주에 대해 배운 것, 기억하나?”
“예. 물론입니다.”
라파드엘은 종이와 깃펜을 꺼내고 교수의 말을 적어 내려갈 준비를 했다. 모르툼 교수는 흐뭇해했다.
물론 라파드엘의 속셈을 아는 이한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뿐이었다.
나중에 교수님부터 공격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소환마법보다 저주가 더 재밌었어요!”
가이난도는 솔직하게 말했다.
“오늘은 서두르지 않고 저주에 대해 공부해 이해도를 높... 잠깐만.”
모르툼 교수는 말하다가 멈칫했다.
“이번 주에 소환마법을 배웠나?”
“네.”
“콜록. 학생들의 반응이 어땠나?”
“다들 좋아하던데요? 저희 빼고 다들 공방으로 이야기 들으러 갔어요.”
이한은 가이난도의 주둥이를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모르툼 교수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주가 아니라, 오늘은 언데드 소환을 가르쳐주도록 하겠네.”
“와!!”
‘이래도 되는 거 맞아?’
이한은 불안해졌다.
아무리 봐도 커리큘럼을 몇 단계는 뛰어넘은 것 같은데...
* * *
“콜록. 언데드 소환은 소환마법에서도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네. 가장 아름답고 복잡하며 정교한 마법이라고 할까...”
“보통 흑마법사들은 시체를 어디서 구합니까?”
“좋은 질문이네. 라파드엘 학생. 예전에는 묘지를 주로 이용했지만 요즘에는 그러지 않네. 허가 받은 시체를 구입해서 사용하곤 하지.”
“저런... 그래도 불법적인 흑마법사들은 아직도 묘지를 애용하겠죠?”
“그렇지 않겠나?”
“감사합니다.”
라파드엘은 신이 나서 메모를 해나갔다. 모르툼 교수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자네들은 아직... 완성된 언데드 소환을 하기에는 이르네. 완성된 언데드는 잘못 다룰 경우 마법사를 죽일 수 있지.”
서투른 흑마법사가 소환한 해골 전사가 주인을 찔러 죽이는 경우는 가장 흔한 흑마법 사고 중 하나였다.
마법 깃펜에게 죽을 뻔한 가이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쉬운, 비교적 자네들을 죽일 수 없는 것부터 소환할 걸세. 바로 뼈다귀 손부터.”
학생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교수의 말에 집중했다.
쉭!
학생들 앞에 뼈다귀 손들이 나타났다.
“먼저 뼈다귀 손과 친해져보게. 처음에는 자네들의 말도 듣지 않겠지만...”
“...?”
이한은 순간 뼈 소환수와 뼈다귀 손이 바뀐 줄 알았다.
뼈다귀 손이 매우 공손하게 이한 앞에서 대가리를 박고 있었던 것이다.
‘함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