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화
“우리 사이의 오해는 잊어버리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협력할 생각이 있나?”
“차라리 학교가 무너지는 걸 꿈꾸는 게 빠를 거다.”
흰 호랑이 탑 학생 중 한 명이 그렇게 대꾸했다.
이한은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건 몰라도 워다나즈 네가 협력을 말하다니!”
몇몇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이한은 이미 사악한 대마법사였다.
“네가 깃발을 가져간 것 때문에 우리는 이 <기초 마법 인성 교육> 강의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기회가 사라졌는데!”
“그건 오해가 있는 것 같군. 아직 F가 확정은 아니잖나.”
이한은 논리적으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설득하려고 했다.
논리적으로 ‘왜 협력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가?’를 납득시킨다면 저 꽉 막힌 기사 놈들도 말을 들을지 몰랐다.
“물론 F일 확률이 95%긴 하겠지만 말이야!”
“하하! 하하! F래요! F!”
“......”
물론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이 꼭 도움이 된다는 보장은 없었다.
아산과 가이난도는 이한을 거들기 위해 끼어들었다가 이한의 살의 넘치는 눈빛을 받고 그대로 쭈그러들었다.
‘우... 우리가 뭐 잘못했나?’
‘도와주려고 한 건데...’
“잘 생각해봐라. 교장 선생님께서 이 <기초 마법 인성 교육> 강의를 하는 건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서다. 그런데 정말로 과제 하나 실수했다고 F를 줄 거라고 생각하나?”
물론 이한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고 말했다.
“오히려 과제 하나 실수했다고 포기해버리면 그게 F를 받을 짓 아닐까? 지금부터라도 충분히 노력한다면 학기 끝에는 다들 A를 받을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외출권이라니. 밖이 얼마나 매력적인 곳인지 아나? 나는 한 번 갔다 온 적이 있어서 안다. 밖은 천국 같은 곳이지.”
‘교장의 함정을 제외한다면.’
“딱딱한 침대 위에서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고, 원하는 걸 뭐든지 먹을 수 있다. 잘 생각해봐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무시하려고 해도 홀린 듯 빠져들어가는 스스로를 부정할 수가 없었다.
벌써 몇몇 학생들은 ‘이번만 협력해볼까?’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지젤이 나서서 입을 열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모라디. 네가 나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알고 있지만 내 진심을...”
이한은 이간질을 시도하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차원이 달랐던 것이다.
지젤이 중성적이고 날카로운 분위기를 뿜어내며 입을 열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시선은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이제까지 워다나즈와 엮여서 일이 좋게 흘러간 적이 있었던가?”
“모라디 네가 부하들 시켜서 날 습격했잖아. 다들 속지 마라. 모라디가...”
“워다나즈와 엮여서 징벌방에 간 친구들은?”
“오해다. 교장 선생님이 잡아간 거야.”
“또, 저번에 휴게실을 습격한 건 누구였지?”
“그것도 교장 선생님께서 시키신...”
이한은 최선을 다해 변호하려고 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넘어간 뒤였다.
탁-
요네르가 이한의 어깨를 붙잡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뜻이었다.
‘젠장.’
선량한 척을 하기에는 이한이 했던 일들이 있어서 한계가 있었다.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수밖에 없나?
“더르규. 이리 와봐라.”
“?”
초이 가문의 명예로운 오크 친구, 더르규는 이한이 부르자 다가가려고 했다.
“더르규. 가지 마.”
“맞아. 뭔가 이상하다고.”
친구들의 말에도 더르규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이한은 그런 친구가 아니다.”
“......”
그런 친구 아닌가?
친구들의 만류에도 더르규는 걸어왔다.
“왔다. 이한. 무슨 일이지?”
이한은 더르규가 가까이 다가오자 더르규를 붙잡고 사납게 외쳤다.
“협력하지 않으면 더르규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다. 호수로 끌고 가서 써먹은 다음에 밑바닥에 던져 버려주지!”
“...저, 저 자식이 진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경악했다.
결국 저 워다나즈 놈이 본색을 드러낸 것이다!
더르규는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상황을 깨달았다.
‘이한이 두 탑 사이를 중재하려고 이러는 거군.’
“나, 나를 구해다오.”
“더르규!!”
더르규가 비참하고 슬픈 표정으로 말하자 몇몇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라파드엘이 뛰쳐나와서 외쳤다.
“그만둬, 이 워다나즈 놈! 협력하지! 협력할 테니까 더르규를 내버려둬!!”
“맞아. 협력할 테니까 더르규를 놔줘!!”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입을 모아 이한에게 외쳤다.
“명예를 걸고?”
“명예를 걸고!”
“좋아. 놓아주도록 하지. 하지만 앞으로 조심하라고.”
이한은 더르규를 풀어주었다.
지젤은 이한을 미친놈 보듯이 경악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게 진작 협력하겠다고 했으면 서로 편했잖나.”
“넌... 나보다 사악한 인간이야. 워다나즈.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너 같은 인간은 처음 보니까.”
“너만 그렇게 생각하겠지.”
이한은 지젤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꾸하고 고개를 돌렸다.
가이난도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한과 눈이 마주치고 멈칫했다.
“너 지금 설마?”
“아, 아니야! 목 운동하고 있었어!”
* * *
<기초 마법 인성 교육>에서 골치 아픈 과제가 나왔지만, 이한과 친구들은 거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의 협력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언제 터실 건가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아직 고민 중입니다.”
이한의 말에 요네르가 옆에서 의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왜 시아나 사제님한테 존댓말하는 거야? 안 그랬잖아.”
“...내가 그랬었나?”
이한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게 시아나 사제의 광기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한 잘못은 아니었다.
누구라도 ‘물약이 필요하니 교수의 실험실을 털죠’라고 하면 약간 압도될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두 분?”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한의 속마음을 조금 눈치 챘는지 요네르가 대신 변호했다.
“플레맹 교단이 원래 연금술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가 종종 있어.”
‘요네르는 교단 홍보에는 소질이 별로 없군.’
사실 지금 중요한 건 시아나 사제나 플레맹 교단의 광기가 아니었다.
정말 언제 털어야 되느냐가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실험실 문을 열었는데 안에 앉아 있는 우레걸음 교수와 눈이 마주친다면 한 달 정도는 악몽을 꿀 것 같았다.
‘시간대는 당연히 저녁에서 밤 사이가 될 거다. 하지만 날이 문제다. 남은 평일에 털어야 할까? 아니면 주말에?’
우레걸음 교수의 스케줄은 이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두막에서 만날 때는 있었지만 그 외 시간에는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 완전히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우레걸음 교수한테 슬쩍 물었다가는 나중에 용의자로 찍힐 것이고...
“워다나즈. 오늘은 오두막에 올 필요 없다.”
<기초 탈 것 훈련> 강의를 하기 위해 내려온 번개걸음 교수가 이한에게 말했다.
이한은 오두막에서 잡일이 끝나면 날아다니는 탈것을 길들이기 위해 각종 훈련 지식을 추가로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조카 녀석 데리고 시장에 좀 다녀올 생각이다. 사야 할 게 있어서.”
“아. 그렇군요.”
이한은 최대한 표정을 관리했다. 그리고 목소리에서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도록 전력을 다해 말했다.
“언제 가십니까?”
“오늘 낮에 강의 끝나고 가서 내일쯤 돌아오겠지. 나하고 조카만 나가서 미안하게 됐다.”
번개걸음 교수는 진심을 담아 미안해했다.
솔직히 다른 학생은 몰라도 이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처럼 일하는 학생은 데리고 나가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소처럼 일하는 수준인데...
“아닙니다. 교수님. 교칙은 모두에게 평등한 법 아닙니까.”
“혹시 고나달테스한테 협박받았냐? 어쨌든 알겠다. 갔다 올 때 맥주 사탕이라도 사다주마.”
드워프들의 간식 취향은 좀 특이한 편이었지만 이한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뭐든지 사다주면 감사한 법.
그리고...
‘오늘 저녁!’
기회는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이한은 친구들을 불러서 은밀하게 말했다.
“오늘 저녁.”
“...!”
“오늘 저녁...!”
친구들은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구도 발을 빼진 않았다.
“오히려 좋지. 주말에는 푹 쉴 수 있겠어.”
“오늘 저녁이라... 기다리고 있었다고.”
아산이 비장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과제 없는 편안한 한 학기를 위하여.”
“과제 없는 편안한 한 학기를 위하여!”
“...?”
이한은 의아해했다.
너희 언제 이런 구호 만들었냐?
* * *
“그만 떠들고 각자 위치로 가라. 자. 다들 열심히 말과 친해지고 있겠지. 어떤 놈은 새벽 일찍부터 말의 먹이를 주고 빗질을 해주고, 어떤 놈은 느지막이 일어나서 대충 말 한 번 쓰다듬고 말 거다.”
가이난도는 움찔했다.
“뭐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 학교는 학생들을 물가로 데리고는 가지만, 물을 강제로 떠먹이지는 않으니까. 다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하는 법이지.”
‘물속에 빠뜨리고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만...’
“오늘 말을 타나요?”
학생 중 한 명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말을 타고 복잡한 승마술을 보여주기에는 다들 친밀함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까지 친해지려면 한 학기 동안 정성을 기울여도 모자랄 거다. 오늘은 다른 몬스터를 상대하는 법을 배울 거다.”
번개걸음 교수는 손가락을 입에 대고 휘파람을 강하게 불었다.
그러자 활활 타오르는 강아지가 뒤편에서 폴짝거리며 뛰쳐나왔다.
온갖 미친 존재들만 봐왔던 학생들의 입에서 자연스레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이한은 긴장했다.
이 마법학교에서는 귀여운 존재가 더 위험할지도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흉악하게 생긴 존재가 안 위험한 건 아니고...
“지금 귀엽다고 좋아한 놈들은 모두 실격이다. 귀엽다고 좋아하기 전에 이 불꽃부터 봤어야지. 이 강아지가 달려드는 순간 너희들 중 절반은 죽을 텐데.”
불타는 강아지는 헥헥대며 데굴데굴 굴렀다. 번개걸음 교수는 잘했다는 듯이 배를 긁어줬다.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원소를 잘 다루는 편이지만, 그건 각종 사고를 피해 살아남은 마법사의 경우다. 제국 사람들이 왜 마법사는 원소를 잘 다룬다고 생각할까? 멍청한 마법사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전에 죽으니까 그런 거지. 화염 속성을 가진 몬스터를 섣불리 길들이려다가 죽은 마법사는 너무 많아서 이름을 다 나열할 수도 없을 거다.”
학생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원래 서있던 영역에서 몇 미터는 멀어진 것 같았다.
“오늘은 화염 속성을 가진 몬스터를 다루는 법을 배운다. 그나마 강아지인 것에 감사해라. 말 정도만 되었어도 불타기 전에 말굽에 치여 죽을 걱정부터 해야 했을 테니까. 워다나즈.”
수제자는 이럴 때 가장 먼저 나오게 되는 법이었다.
이한은 한숨이 나오는 걸 참으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네가 시범을 보여줘야겠다. 이걸 마시도록.”
번개걸음 교수는 화염 저항의 물약을 던졌다. 이한은 살짝 안심했다.
‘맨몸으로 만지는 게 아니군.’
번개걸음 교수가 들었다면 ‘날 뭘로 보는 거냐?!’하고 화를 냈을 생각을 하며, 이한은 화염 저항의 물약을 마셨다.
독한 술을 마셨을 때처럼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숨을 쉬자 약간 매캐한 냄새가 올라왔다.
“다 마셨나? 잘했다. 이제 최대한 오랫동안 저 강아지와 어울려 봐라.”
“물약의 효과는 얼마나 오랫동안 갑니까?”
“그건 네가 알아맞혀야 하지.”
“......”
이한은 멈칫했다.
‘그러니까 위험한 순간을 알아서 깨닫고 빠져나오란 소리인가?’
단순히 원소 저항 마법이나 물약에 의존하지 않고, 위험을 향한 마법사의 직감을 단련시키는 훈련.
...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건 쉽지 않았다.
‘젠장. 이거 마지막이 무조건 좋은 것 같은데.’
다른 놈들 물약 시간을 보고 재면 유리한 것 아닌가!
이한은 집중했다.
만약의 경우 언제라도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도록 마력을 경계 태세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불타는 강아지는 겁먹은 표정으로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겁주지 말고!!”
“아니 제가 뭘 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