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화
이한은 억울한 표정으로 불타는 강아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미 불타는 강아지는 저 멀리 도망친 상태였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걸 보고 ‘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수군거리고 있었다.
이한은 괜히 얄미웠다.
“힘내, 워다나즈! 강아지가 무서워한다고 그 사람의 인격이 결정되는 건 아니야!”
“맞아요,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다른 탑의 친구들이 응원을 해줬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날 죽이려고 할 정도로 성질이 더럽거나, 아니면 언데드거나. 둘 중 하나라도 아니면 다 도망친다고 생각해야겠군.’
슬픈 깨달음과 함께 이한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부스럭댔다. 불타는 강아지는 컹컹대며 짖어댔다.
“?”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이 뭘 하나 싶었다.
놀랍게도 이한이 꺼낸 건 고구마였다. 가이난도는 무심코 앞으로 걸어 나가려다가 친구들한테 붙잡혔다.
“와라.”
이한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고구마를 흔들었다. 불타는 강아지는 짖는 걸 멈추고 고구마 냄새를 맡아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제법이군.’
번개걸음 교수는 미소지었다.
사실 성질 더러운 불타는 강아지한테서 버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수업이지, 고구마로 꼬드기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수업이 아니긴 했지만...
발상이 좋았다.
몬스터의 반응에 억지를 부리거나 고집을 피우는 대신, 몬스터가 원하는 것을 유연하게 알아맞히는 것.
그게 바로 몬스터를 길들이는 첫 번째 단계였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저렇게 행동하는 걸 보니...
탁!
이한은 고구마에 정신 팔려 다가온 불타는 강아지가 시선을 돌리는 순간 재빨리 달려들어서 놈을 껴안았다.
그리고는 도망치지 못하게 드러누웠다.
“잡았다.”
“......”
번개걸음 교수는 황당해했다.
야!
-컹! 크르릉! 컹! 컹컹! 끼잉... 낑낑낑.
처음에는 놀라서 짖던 강아지는 몇 초 만에 두려움에 굴복했다.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어서 이한을 올려다보았다.
이한은 바닥에 드러누운 상태로 강아지의 배를 긁어주었다. 강아지는 헥헥대며 꼬리를 흔들었다.
번개걸음 교수가 생각한 친밀한 길들임과는 조금 다르긴 했지만, 저것도 길들임은 길들임이었다.
...공포와 속임수를 사용하긴 했지만.
“교수님. 보십시오. 친해졌습니다.”
“그래. 잘 했다. 오랫동안 껴안고 있어봐라.”
흰 호랑이 탑의 라파드엘은 흙바닥에서 일어나지 않고 불타는 강아지를 껴안고 있는 이한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진짜 독한 놈이었다.
기사 가문도 아니라 대귀족 가문 출신이면서!
저 정도로 독해야 그런 흑마법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걸까?
* * *
“흐아암.”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하품을 했다. 몇몇 학생들이 따라서 하품을 했다.
그제야 번개걸음 교수는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시간이 좀 많이 지났는데?’
사실 번개걸음 교수가 준비한 화염 저항의 물약은 제각각 지속 시간이 달랐다.
학생들이 미리 보고 예측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길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무슨...’
번개걸음 교수는 이한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놀랍게도 물약 효과는 아까 끝난 상태였다. 몸에서 화염 저항의 기운을 찾아봐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한은 그냥...
온몸에서 마력을 방출하면서 불타는 강아지의 화염을 밀어내고 있었다.
강아지가 낑낑대며 화염은 뱉어내도 이한 쪽으로 전혀 오지 못하고 바닥으로 밀려 사그라들었다.
마력으로 방어막을 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마법을 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순수한 마력 방출로 화염을 막아내다니.
저건 마법사의 기술이 아니라 검사의 기술이었다.
‘무식한 놈 같으니!’
번개걸음 교수가 보내는 시선을 이한은 다른 뜻으로 오해했다.
‘교수님. 저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한도 할 말은 있었다.
애초에 물약 하나에 의존해 목숨 걸고 불타는 강아지를 껴안는 게 위험한 일 아닌가.
이한도 본능이 있는 만큼,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몸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방법이 남들은 절대 따라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방법이긴 했지만...
이한은 화염 저항의 물약이 끝났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했다. 아무리 마력으로 몸을 보호해도, 물약의 효과가 끝났다면 뜨거움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으니 이상한 기분이 드는군.’
일종의 과대망상 같은 기분.
마치 화염 원소 마법을 조금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안에서 생겨났던 것이다.
볼라디 교수한테 죽을 뻔 하고 나서 구슬을 좀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든 것과 비슷했다.
후자는 근거가 있다면 전자는 근거가 없었지만.
‘...함정인가?’
이한은 강아지를 빤히 쳐다보았다. 불타는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면서 헥헥댔다.
이한은 이 강아지가 고구마에 속은 원한을 풀기 위해 속임수를 하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약 끝난 지 한참 됐다.”
“예? 정말입니까?”
번개걸음 교수의 말에 이한은 정신을 차리고 놀라워했다.
그 모습에 번개걸음 교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다음에는 절대 마력으로 못 막는 놈 데리고 와야겠군.’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화염 강아지가 혹시 최면도 걸 수 있습니까?”
“...혹시 화염 저항의 물약이 아니라 술을 마신 거냐?”
* * *
이한에게 설명을 들은 번개걸음 교수는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건 최면이나 속임수가 아니라, 네가 정말로 화염 원소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 거다.”
“하하. 그렇습니까.”
이한은 절대 믿지 않는다는 투로 대답했다. 번개걸음 교수는 한 대 때리려다가 말았다.
“정말이다. 지금 기초 원소 마법을 배우고 있을 텐데? 기초 원소 마법을 쓸 때 중요한 게 뭐였지? 그 원소와의 친숙함이잖나.”
기초적인 원소 마법을 쓸 때 중요한 건 그 원소의 이미지를 얼마나 선명하고 강하게 그릴 수 있느냐였다.
덥고 뜨거운 곳에서 자란 학생은 화염 원소에.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자란 학생은 물 원소에.
각자 살아온 방향에 따라 영향을 받는 만큼 이렇게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특정 원소와 계속해서 접촉하면 그 원소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마법사라면 직감을 놓치지 마라. 워다나즈. 네 화염 원소에 대한 이해는 실제로 올랐을 거다.”
번개걸음 교수는 진지하게 말했다.
반신반의하며 들었던 이한이었지만,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불타는 강아지를 껴안고 버티기만 했는데 화염 원소에 대한 이해가 오르다니.
“그런데 그렇게 오르는 걸 보니 화염 원소에 재능이 있었나보군?”
“예? 저는 물 원소에 재능이 있습니다만.”
이한은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보통 반대되는 속성의 재능을 다 갖고 있기는 힘들었던 것이다.
번개걸음 교수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답했다.
“화염 원소에 재능이 없으면 불타는 강아지 몇십분 쓰다듬었다고 그런 이해를 얻지는 못하지.”
“!”
생각해보니 이한은 화염 원소에 대한 재능을 시험해 볼 기회가 그리 많지 않았다.
가르시아 교수가 위험하다고 말렸고 밖에서도 몇 번 잘못 썼다가 죽을 뻔했고...
어라?
‘사실 화염 원소에 재능이 있었던 건가?’
교수에 대한 분노로 활활 타오르던 경험이, 어쩌면 화염 원소에 대한 재능이 된 걸지도 몰랐다.
물 원소는 그냥 볼라디 교수가 자꾸 괴롭혀서 익숙해진 걸지도...
“워다나즈. 자신의 한계를 규정짓지 마라. 무엇이든지 직접 해보고 깨달음을 얻는 게 좋을 거다.”
“감사합니다.”
“화염 저항의 물약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에 배울 수 있을 거다. 내가 네게 맞는 몬스터를 준비해주마.”
“감사합... 잠시만요. 교수님! 교수님!”
이한은 번개걸음 교수를 애타게 불렀지만, 번개걸음 교수는 불타는 강아지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매정하게 지나가버렸다.
* * *
저녁.
이한은 닐리아와 함께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같이 앉아서 바늘을 놀렸다.
다들 옷이나 외투 구석에 불탄 구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불타는 강아지가 남기고 간 상처였다.
닐리아는 이한이 밖에서 사온 옷감들을 보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치 늙은 장인이 수제자를 볼 때 짓는 표정 같았다.
“보는 눈이 있어, 워다나즈. 잘 사왔어...!”
“다 네 가르침 덕분이지.”
“튼튼하고 질기고, 물도 잘 안 들어가네. 맞아. 외투로 두를 천은 이래야지.”
“그러고 보니 야영도 준비해야 할 텐데.”
해골 교장이 시킨 과제를 하려면 호수를 건너가야 했다. 재수 없으면 거기서 하룻밤 자야 할지도 몰랐다.
“나! 나 야영 잘 알아!”
이한의 말에 닐리아는 신이 나서 손을 들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모두 다 감탄사를 내뱉으며 닐리아를 쳐다보았다.
닐리아의 길쭉한 귀가 위로 솟는 걸 보며 이한은 갑자기 짠해졌다.
‘검은 거북이 탑 놈들, 너무 칭찬에 야박한 것 같군.’
이렇게 착한 친구를...
“뭘 준비해야 할까, 닐리아? 야영용 텐트?”
“괜찮아. 외투 하나만 있으면 돼.”
“앗. 그러면 바닥에 깔 야영용 이불은?”
“괜찮아. 외투 하나만 있으면 돼.”
“...모포는 그래도 필요하지 않아?”
“괜찮아. 외투 하나만 있으면 돼.”
닐리아는 그림자 순찰대의 지혜를 친구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두근두근거렸다.
외투 하나만으로 추운 골짜기에서 잠들 수 있는 그 지혜는 친구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안색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듣다 못한 이한이 끼어들었다.
“닐리아가 농담한 거니까 다들 오해하지 말라고.”
“하... 하하! 농담한 거구나! 하하하!”
“나는 100% 확률로 농담이라고 생각했었지!”
닐리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농담 아닌데? 짐은 외투 하나만... 읍읍.”
요네르가 급히 닐리아의 입을 막아버렸다.
사소한 문제가 있긴 했지만, 친구들은 옷 수선과 준비를 끝냈다.
어두운 천으로 새로 만든 망토와 복면은 만약의 상황에서 그들을 보호해 줄 것이다.
랫포드는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훌륭한 도둑놈 같습니다.”
“하하. 뭘 그렇게까지.”
“쑥스럽게시리.”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랫포드의 칭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게 멋있나?
“시간 됐다. 가자.”
이한과 친구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저녁, 그들은 우레걸음 교수의 실험실을 털 것이다!
* * *
학생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이미 몇 번이고 밤에 나와 본 적 있는 학생들과, 한 번도 밤에 나와 본 적 없는 학생들로.
이한은 당연히 전자였다. 이제 저녁에 학교를 돌아다녀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마치 산책을 나온 것 같은 자연스러움.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 각수관의 문은 열 방법이 있으신가요?”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적인 자물쇠는 랫포드가.
마법적인 자물쇠는 이한이.
‘이미 확인은 끝냈다.’
각수관은 수업을 위해 들락날락하는 만큼 1층 정문 자물쇠를 확인하기도 쉬웠다. 랫포드는 이미 가짜 열쇠를 만들어 온 상태였다.
“조용히 따라오도록.”
이한은 친구들한테 그렇게 말하고 랫포드와 함께 각수관 정문으로 다가갔다.
친구들은 조심스럽게 그 뒤를 쫓았다.
“!”
놀랍게도 각수관 정문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있었다. 무언가 덩치 커다란 놈이 돌진해서 부순 것 같은 구멍이었다.
학생들은 감탄했다.
“미리 준비해놨구나! 대단해!”
“...뭐냐 이건?”
“???”
이한의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에, 자리에 있던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