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3화
“워다나즈, 네가 미리 준비한 게 아니었어?”
“가끔 너희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한데...”
이한은 박살난 구멍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혀를 찼다.
“안 좋군.”
“왜 그러십니까?”
“잔해가 각수관 안쪽에 있잖아. 밖에서 들어온 거야.”
각수관 안에서 우레걸음이 기르던 놈이 부수고 탈출한 거라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됐지만, 지금 꼴을 보니 각수관 밖에서 덩치 큰 몬스터가 들어온 게 분명했다.
랫포드는 이한의 말에 살짝 감명 받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정말 대도둑의 자질이 있으십니다.”
“큭...!”
“나, 나도! 랫포드. 나도 추리할 수 있어!”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상한 경쟁심을 보였다.
수업 성적이나 마법 능력은 밀리더라도, 도둑으로서의 능력은 밀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닐리아는 왜 저러느냐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저러는 거야?”
“명예로운 도둑놈들이 나오는 동화책들을 많이 읽고 자라서 그런가봐.”
요네르의 말에 닐리아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제국의 귀족들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동화를 읽고 자란단 말이야?’
“사냥꾼은 없어?”
“어... 사냥꾼 출신 도둑이 나오는 동화는 있긴 할 텐데...”
친구들이 대화하는 사이 마음의 결정을 내린 이한이 각수관 문을 열었다.
“다들 잘 들어라. 우린 지금부터 각수관에 몰래 침입하는 게 아니다.”
“?”
“???”
몰래 침입하는 게 아니라니.
그러면 뭐지?
페인트로 벽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 왔다 감’이라고 쓰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우린 각수관에 멋대로 침입한 소환수를 막고 교수님의 소중한 물건들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거다.”
“...아. 아하!”
“과연...!”
소환수의 침입이 꼭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나중에 잘못되면 소환수 핑계를 대며 우길 수 있게 됐으니까.
...물론 그게 우레걸음 교수한테 통할지는 의문이었지만.
* * *
“빛이여.”
이한은 빛의 구체를 띄웠다. 어두운 각수관 1층이 환하게 빛났다.
복도 옆에 위치한 온실들과 강의실.
밤에 마법학교를 돌아다녀본 학생들은 알겠지만. 밤의 마법학교는 낮의 마법학교와는 전혀 달랐다.
낮에는 평범하게 보였던 강의실도 밤에는 언데드 몇 마리는 숨어 있을 것 같았고...
따뜻한 온실에서 햇살을 받으며 자라던 식물들도 어둠 속에서는 마치 숨을 죽이고 이쪽을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우레걸음 교수가 그런 식물을 준비해놨어도 이상하진 않지.’
그나마 1층은 학생들이 다 알지만, 2층부터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대체 무엇이 있을까?
“!”
1층의 계단을 올라 2층으로 올라가자, 강렬한 마력이 안에서 느껴졌다.
공간 자체에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공간 확장!’
1층보다 수십 배는 넓어 보이는 공간이 학생들을 맞이했다. 2층은 드넓은 식물원이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특이하고 거대한 식물들이 주렁주렁 자리를 잡고 자라고 있는 모습에 학생들은 그대로 압도당했다.
“뛰어난 연금술사는 뛰어난 원예사여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래도 그렇지, 규모가 정말 대단한데요...”
시아나 사제는 놀라워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재료를 모으기 위해 직접 산과 들을 누벼야 하는 만큼, 연금술사 자신이 기를 수 있는 건 당연히 길러야 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규모가 정말 대단했다.
“와. 이 식물은 이름이 뭡니까?”
가이난도는 앞에서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꽃을 가리키며 신기해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달빛과 함께 흔들거리는 모습이 정말로 아름다웠다.
이한은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그 꽃은 네펠롭스야.”
“오오. 무슨 효과가 있어?”
“꽃잎을 건드리는 짐승을 통째로 잡아 삼키지.”
“......”
가이난도는 기겁해서 뒷걸음질쳤다.
“하지만 그 꽃에서 나오는 꿀은 상당히 비싸게 팔리는...”
“그게 지금 중요하냐?!”
“물어봐서 대답해준건데.”
이한은 그렇게 대꾸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한이 이름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들이 훨씬 많았다. 요네르나 시아나 사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각수관은 기숙사 탑이 아니었다. 우레걸음 교수가 사용하는 공방인 만큼, 그렇게 함정이 많을 리 없었다.
당장 우레걸음 교수도 돌아다녀야 했을 테니...
이한은 침착하게 길을 찾았다. 분명 우레걸음 교수가 이 식물원 사이에서 돌아다닐 때 쓰는 길이 있을 것이다.
달그락-
“!”
이한의 생각을 읽었는지, 뼈 소환수가 허리띠에서 달그락 소리를 냈다.
뼈 소환수는 저쪽을 보라는 듯이 방향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생긴 지 얼마 안 된 발자국들이 진흙 위에 나있었다. 몬스터가 낸 것 같은 발자국이었다.
‘그렇군. 몬스터가 먼저 지나갔나!’
우레걸음 교수가 지나다니는 길을 침입한 몬스터가 먼저 찾은 게 분명했다.
이한은 뼈 소환수를 칭찬해주려고 했다.
“워다나즈. 좋은 생각이 났어. 여기 발자국을 보니까 먼저 들어온 몬스터가 지나간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쪽 길이 안전한 길이야.”
닐리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한은 뼈 소환수를 칭찬하려다가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정말 대단해, 닐리아!”
달그락달그락!
“역시 그림자 순찰대 출신이라서 그런가? 정말 대단해. 네가 와줘서 다행이야. 네가 없었다면 어땠을지 상상만 해도 아찔하군.”
“뭘 이런 걸 가지고.”
닐리아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손을 흔들며 넘기려고 했지만, 이미 긴 귀가 쫑긋거리고 있었다.
“자. 내가 길을 찾을게. 다들 따라오라고 해줘.”
“그래그래.”
이한은 그렇게 닐리아를 앞에 보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달그락달그락달그락!
항의하는 뼈 소환수의 모습에 이한은 사과했다.
“미안하다. 우정이란 게 생각보다 어려운 거거든.”
뼈 소환수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 * *
먼저 들어온 몬스터의 발자국을 따라서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좋은 방법이었다.
식물원에 난 길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학생들은 어떤 식물의 공격도 받지 않았다.
우레걸음 교수가 본인이 돌아다니는 길에는 별다른 함정을 깔지 않은 게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교수의 게으름에 감사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
“......”
그러나 행운이 있으면 불운도 있는 법.
식물원 끄트머리에 위치한 3층 계단.
그 계단 앞에 자리 잡고 있는 몬스터를 봤을 때, 이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황소... 맞지?”
“그래. 평범한 황소 같지는 않군.”
1층 정문을 부순 것도 모자라 2층 식물들 몇 개를 짓밟아놓았는지 황소의 뿔에는 잔해, 덩굴, 이파리들이 걸려있었다.
그걸 본 순간 이한은 우레걸음 교수가 예전에 말했던 황소가 떠올랐다.
‘...어라?’
이제까지는 잉걸델 교수가 잡아 놓았던 정령 황소가 그 황소라고 생각했었는데, 잘 보니 지금 눈앞의 황소가 우레걸음 교수가 말했던 놈과 훨씬 비슷했다.
일단 정령이 섞여 있지도 않은데다가 여러 물약으로 신체능력만 강화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건 그냥 고학년들이 소환한 놈이었나?’
이한은 정령 황소를 보고 우레걸음을 욕했던 게 미안해졌다.
‘아니. 생각해보니 미안해 할 건 없군.’
다시 눈앞의 황소를 보니 미안한 마음이 바로 사라졌다.
저딴 놈을 산에 대기시켜놨단 말인가?
“어떻게 할 건가요?”
“굳이 싸울 필요는 없겠지.”
종류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정령 황소를 상대하면서 이미 배운 바가 있었다.
꼭 상대를 두들겨 패서 제압할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식물원이 싸우기 좋은 장소도 아니었을 뿐더러, 황소를 제압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황소는 학생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계단 앞에 자리 잡고 뭔가 우적우적 씹어 먹고 있었다.
“만약 저게 우레걸음 교수님이 기르던 황소라면... 배가 고파서 돌아온 거 아니야?”
요네르의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우레걸음 교수가 기르던 놈이라면 여기 길을 잘 아는 것도 말이 됐다.
1층의 다른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고 바로 여기로 올라온 것도 일반 몬스터라면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면 좀 더 내버려두면 알아서 먹고 비키지 않을까?”
“높은 확률로 그럴 것 같군.”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자 학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앞의 놈은 덩치만 놓고 보면 정령 황소보다 더 난폭하고 사납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 이한...?”
요네르는 이한의 소매를 붙잡고 당기며 말했다.
“저거... 괜찮은 거 맞아?”
황소는 학생들을 무시하고 옆에 자리 잡은 식물 하나를 확 물어뜯었다. 몇 입 우걱우걱 씹더니 맛이 없었는지 퉤 뱉어버렸다.
그리고는 다른 식물을 하나 더 씹고, 또 씹고, 몇 개는 발로 밟아버리고...
그게 재밌었는지 황소는 조금 더 빠르게 식물들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다.
연금술 전문가인 요네르와 시아나 사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자기 식물이 아닌데도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이한도 안색이 변했다.
학생들이 들어와서 물약을 조금 빌리는 것과, 웬 몬스터 하나가 식물원의 식물들을 온통 때려죽이는 건 차원이 달랐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 교수의 분노가 학생들한테 향할 수 있었다.
“저건 막아야 해! 발이여, 땅을 주름잡아라!”
이한은 주문을 외친 다음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는 황소를 향해 저주 마법을 날렸다.
“마비되어라!”
음의 마력이 파도처럼 형태를 갖추고 황소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황소는 위협을 먼저 느끼고 저주를 피해버렸다.
“워다나즈! 저걸 왜 우리가 막아야 하는 건데?”
“그게 명예라는 거지! 워다나즈. 내가 도우러 간다!”
이한의 뜻을 오해한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지팡이를 들고 달려들었다.
“권능의 화염...”
가이난도가 화염 생성 주문을 시전하려고 하자 이한은 기겁해서 입을 때렸다.
짝!
“?!?”
“식물들 있는 곳에서 불은 절대 안 돼!”
“큭... 마비되어라!”
“마비되어라!!”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배운 마비 저주를 날렸다. 괜히 원소를 잘못 불러왔다가는 이 주변을 태워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한의 저주를 피한 것과 달리 황소는 학생들의 저주는 피하지도 않았다. 저주가 몇 방 작렬했음에도 불구하고 황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우레걸음 교수님은 대체 뭘 먹인 거야!!”
학생들은 비명을 질렀다. 황소가 생각보다 튼튼했던 것이다.
“가서 놈을 방해해라!”
이한은 뼈 소환수를 보낸 다음 물 구슬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황소는 다른 학생들이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한만은 경계하듯이 쳐다보았다.
‘섣불리 저주를 날리는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본능을 가진 몬스터한테 저주 마법을 맞히는 건 쉽지 않았다.
괜히 저주를 날려서 경계하게 만든 탓에 일이 꼬인 셈이었다.
이한은 물 구슬을 연달아 날리기 시작했다. 황소는 정확하게 피해냈지만 이한은 당황하지 않았다.
‘일단 식물들 사이에서 끌어낸다.’
애초에 황소를 식물들에게서 떨어트리려고 공격을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여기 약화의 물약을 받으세요!”
시아나 사제가 물약 플라스크를 꺼내서 건넸다. 받은 학생들은 서둘러 던졌다.
깨지는 소리와 함께 물약을 맞은 황소가 발걸음을 비틀거렸다. 놈의 마법 저항력이 약해졌다는 걸 깨달은 요네르가 외쳤다.
“다들 다시 한 번 저주를!”
“마비되어라, 마비되어라!”
“마비되어라!”
황소는 성가시다는 듯이 머리를 흔들었다. 약화된 탓에 저주가 피부 안으로 파고드는 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한은 물 구슬을 불규칙한 궤도로 황소의 주변에 작렬시켰다. 황소가 움찔하며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이한의 저주가 터져 나왔다.
‘더 빠르게!’
“마비되어라!”
아까보다 빠르게 시전해야 한다는 일념이 이한의 주문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그 결과 이한의 주문이 다 외워지기도 전에 저주가 쏘아져나갔다.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이한 본인도 눈치 채지 못했다.
쿵!
황소는 이한의 저주까지 버틸 수는 없었는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학생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긴 숨을 토해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
키 크고 홀쭉한 버드나무 하나가 식물들 사이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이한은 즉시 대답했다.
“저희는 우레걸음 교수님의 식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맞아요! 이상한 황소가 식물들을 뜯어먹고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