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화
요네르가 재빨리 이한의 말을 받았다.
버드나무는 매우 기특하다는 듯이 학생들을 칭찬했다.
“훌륭하구나. 교수도 없는데 너희들끼리 식물을 지키고 있었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분위기가 조금 괜찮아진 것 같자 이한은 상대의 신분을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아. 신입생들이라 나를 모르는구나. 나는 학교에서 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란다. 버드나무 교수님이라고 부르도록 해라.”
상대는 정말 겉모습 그대로의 이름이었다.
가이난도는 버드나무 교수를 보고 산속에서 만났던 말하는 떡갈나무들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물었다.
“혹시 말하는 떡갈나무들하고 관계가 있으신가요?”
“나는 버드나무고 그치들은 떡갈나무지. 트롤 꼬마야.”
“네? 저는 인간인데요?”
“그래. 나도 버드나무지 떡갈나무가 아니다.”
“......”
이한은 버드나무 교수 앞에서 말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보아하니 대충 비슷한 나무와 묶어서 취급하는 걸 싫어하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 교수는 천천히 걸어오더니 가지를 휘적거리며 쓰러진 황소를 건드렸다.
그리고는 나무옹이에 잡힌 주름을 깊게 만들고 말했다.
“우레걸음 교수가 기르던 황소로군. 하여간 허술한 드워프야.”
‘젠장. 진짜 교수의 황소였군.’
이한은 자리에 없는 우레걸음 교수를 욕했다.
몬스터를 물약 먹여서 강하게 만들거면 관리나 잘하던가 왜 풀어놔서 이 소란을 만든단 말인가.
“이 황소를 마비 저주로 제압한 거냐?”
버드나무 교수는 의아하다는 듯이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1학년 학생들이 한 것치고는 매우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강력한 마비 저주를 쓸 수 없을 텐데.
“약화 물약을 사용한 다음 저주를 썼습니다.”
“그래도 힘들었을 텐데. 대단하구나.”
버드나무 교수는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그러자 땅에서 덩굴이 자라나더니 황소를 칭칭 감아 나무 우리 안에 가둬버렸다.
“이 녀석은 내가 나중에 우레걸음 교수가 돌아오면 알려주도록 하마.”
“교수님께서는 여기에서... 식물들을 돌보고 계셨나요?”
시아나 사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버드나무 교수는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원래 내 정원은 다른 곳에 있단다. 우레걸음 교수한테 부탁을 받았지. 오늘만 이 각수관을 대신 돌봐달라고 말이야. 귀찮지만 황제의 관료를 만나야 한다는데 어쩌겠는가.”
“예? 제가 알기로는 번개걸음 교수님과 같이 시장에 간다고 하셨는데요.”
“......”
버드나무 교수는 우뚝 멈춰섰다.
“...그게 정말이냐?”
“네. 나중에 번개걸음 교수님께 여쭤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
버드나무 교수는 가만히 서있었지만, 가지 끝에 걸려 있는 이파리가 사납게 왔다갔다하는 모습에서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너는 워다나즈 가문이구나. 그렇지?”
“?!”
교수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맞히자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뭐지?
“놀랄 것 없다. 네 이야기를 다른 교수들한테 들었을 뿐이니까. 어쨌든 알려줘서 고맙구나.”
버드나무 교수는 부드러운 말투로 감사를 표했다.
“혹시 필요한 게 있느냐? 있다면 말해 보거라.”
“...저희가 연금술을 연습하려고 하는데, 혹시 쓸만한 재료나 시약을 구할 만한 곳이 있을까요?”
“흐음...”
버드나무 교수는 고민했다.
물론 마법학교의 드넓은 부지에 널린 게 재료와 시약이었지만, 아무래도 신입생이 가기에는 조금 위험한 곳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이한은 아주 세심하게 버드나무 교수의 표정을 관찰했다.
상대가 나무 정령 비슷한 종족이라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교수인 이상 이한의 예리한 시야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지금!’
이한은 도박에 가까운 수를 던졌다.
“혹시 우레걸음 교수님의 실험실에서 빌릴 수는... 아, 아닙니다. 이건 너무 무례한 소리였군요.”
이한은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버드나무 교수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가지를 흔들었다.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구나.”
“네? 하지만...”
“괜찮다. 우레걸음 교수가 돌아오면 황소가 들어와서 훔쳐왔다고 해주마. 너희들이 가져가도 되는 것들을 골라주마.”
버드나무 교수는 그렇게 말하고 3층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아나 사제는 이한을 보며 말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은 절대 사악한 교단에는 들어가시면 안 될 것 같아요.”
“?”
* * *
3층에 발을 내딛는 순간, 컴컴한 어둠이 그들을 맞이했다. 빛 주문도 소용이 없었다.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조심해라. 여긴 워낙 길이 복잡하니 말이다.”
버드나무 교수는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6번 실험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이었다.
덜컥!
버드나무 교수는 문고리를 돌려서 열었다. 실험실 안에는 푸른색 연기가 모든 것들을 얼려버리고 있었다. 버드나무 교수는 재빨리 문을 닫았다.
“이 실험실은 영구히 폐쇄하는 게 낫겠군.”
버드나무 교수는 6번 실험실을 밀어버리고 다시 몇 개의 실험실을 더 불러왔다. 대부분의 실험실은 난장판이었다. 17번 실험실은 공간이 왜곡되어 있어서 책상 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천장으로 흐르고 있었고, 29번 실험실은 시커먼 어둠이 안에 있는 걸 하나씩 삼키고 있었다.
이한은 종이를 꺼내서 버드나무 교수가 하고 있는 행동을 하나하나 다 상세하게 메모했다. 언제 다시 3층에 오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렇군.’
이한은 대충이나마 3층의 방식을 알 수 있었다.
1, 2층에 함정이 그리 많지 않은 건 3층 자체가 반쯤 미로 같은 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실험실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하면, 그리고 그 실험실을 불러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3층에 와봤자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이렇게 공간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곳에는 힘으로 마법을 깨는 것도 위험했다. 무슨 참사가 일어날지 알 수 없었으니까.
정답은 처음부터 차근차근 익혀나가는 것이었다.
학문에는 왕도가 없는 것처럼 도둑질도 마찬가지였다.
‘6번 실험실은 왼쪽으로 두 번 휘두르고 6번. 17번 실험실은 오른쪽으로 네 번, 위쪽으로 한 번 휘두르고 17번. 29번 실험실은...’
“찾았다.”
버드나무 교수가 적당한 실험실을 찾아냈다. 이한은 종이를 빠르게 외투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에 연 실험실은 정말로 연금술사의 실험실처럼 평범했다. 각종 연금술 도구와 플라스크들로 가득했다.
학생들은 아까 본 실험실들 때문에 살짝 겁에 질린 표정으로 들어왔다.
“자, 받아라.”
버드나무 교수는 연금술 도구나 플라스크를 싹 쓸어서 하나씩 던지기 시작했다. 이한은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서 챙겨온 가죽 자루에 세심하게 집어넣었다.
“너무 많이 줬나?”
“아닙니다. 교수님. 감사할 뿐입니다.”
이한은 가죽자루가 차면 바로 친구들한테 건네서 새 가죽자루를 꺼내들었다.
버드나무 교수가 ‘아티팩트인가?’하고 착각할 정도의 바꿔치기 속도였다.
“이 정도면 너희가 연습하기에는 충분할 거다. 너무 위험하거나, 우레걸음 교수가 너무 아끼는 재료는 주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버드나무 교수는 나뭇가지를 흔들어 도둑이라도 든 것 같은 실험실을 정리했다.
어질러져있던 도구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열려 있던 서랍들이 다시 닫혔다.
버드나무 교수는 구석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화분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물뿌리개를 불러왔다.
“제가 돕겠습니다.”
이한은 자청해서 나섰다.
‘잘 보여야 한다.’
버드나무 교수가 우레걸음 교수한테 밀고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게다가 교수한테 잘 보여서 나쁠 것 없었다. 언제 버드나무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될지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 이한의 속셈도 모르고 친구들은 도우려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러나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돌아가.”
“왜? 워다나즈? 우리도...”
“우레걸음 교수님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너희는 자루를 갖고 기숙사로 돌아가 있어.”
“!”
친구들은 이한의 말에 감탄했다.
과연...!
랫포드는 감명 받은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제가 더 가르쳐드릴 게 없을 정도입니다.”
“너무 칭찬하지 말라고. 랫포드. 네게 배워야 할 게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까.”
요네르는 문득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분위기가 훈훈한 것 같아서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면 워다나즈. 먼저 움직일게.”
“기숙사에서 보자!”
학생들은 끙끙대며 자루를 들고 내려갔다. 이한은 요네르가 남아 있는 걸 보고 의아해했다.
“왜?”
“도와줄 사람 한 명은 필요할 것 같아서. 나 한 명 빠져도 자루는 갖고 갈 수 있을 거야.”
“고마워.”
“뭘 이런 걸 가지고.”
“잠깐. 은...”
“...화 줘야되냐고 묻지 마.”
요네르는 경고하듯이 손가락을 뻗었다. 이한은 말을 돌렸다.
“...제나 고맙다고.”
“남부 사투리야?”
말과 함께 요네르는 물뿌리개를 집어 들었다.
사실, 요네르는 이한이 식물을 능숙하게 돌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식물을 돌보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한 일이었다. 단순히 물을 주는 일만 해도 그랬다.
어떤 식물은 물을 적게 줘야 했고, 어떤 식물은 물을 많이 줘야 했다.
날씨가 좋고 더우면 물을 더 줘야 했고, 날씨가 나쁘고 습해지면 물을 덜 줘야 했다.
흔한 식물이면 그나마 낫지 희귀하고 연약한 식물일 경우에는 더더욱 어려웠다.
지식과 직감을 모두 갖고 있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요네르야 본가에 있었을 때 연금술 도감 읽으면서 했던 일들이 식물 기르기였으니 자신이 있었지만, 이한은...
“잘 하는구나.”
버드나무 교수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한도, 요네르도 한두번 식물을 다뤄본 솜씨가 아니었다.
이한은 요네르의 놀라워하는 시선을 느끼고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러지?”
“아... 아니. 물을 너무 잘 줘서.”
“많이 해봤으니까?”
요네르만 식물 관리의 길을 걸어온 건 아니었다.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시작은 교수들 때문에 반강제로 했지만, 원래 한 번 생긴 취미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
전생에는 교수들의 화분 관리를 했다면 이번 생에는 심심해서 워다나즈 가문의 정원을 가꿔왔던 것이다.
요네르는 기쁨과 감격이 섞인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원래 마이너한 취미를 가진 사람들은 서로 만났을 때 매우 기쁠 수밖에 없었다.
“너도 그랬구나...! 너도 가문에서 일하는 하인들이 왜 그런 걸 손수 하시냐고 그랬지?”
‘안 그랬는데.’
이한은 살짝 당황했다.
워다나즈 가문은 워낙 자유방임적인 가문이라 이한이 검을 휘두르든 식물을 돌보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기껏 자기를 도와주는 요네르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랬지.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어. 연금술을 위해서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한...”
요네르는 ‘최고의 친구 상’이 있었다면 당장 메달을 걸어주고 싶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감동받은 건 요네르만이 아니었다. 버드나무 교수도 감동받았다.
“이렇게 식물들을 아끼는 학생들을 만나게 될 줄이야... 다들 따라오거라.”
버드나무 교수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한과 요네르는 물기를 슥슥 닦고서 그 뒤를 쫓았다.
‘뭐라도 더 주시려는 건가?’
교수의 목소리에 담긴 기쁨에, 이한은 은근히 기대했다.
이런 걸 위해 굳이 자처해서 남은 것 아닌가.
2층 식물원의 구석에 도착한 버드나무 교수는 발걸음을 멈추고 식물들을 가리켰다.
“자. 여기부터 여기까지 다 물을 주도록 해라.”
“?”
이한은 예상 밖의 상황에 얼굴이 굳었다.
설마 버드나무 교수가 교수 중에서도 극히 드문, 상으로 일을 더 주는 그런 교수인 건가?
그런 거라면 정말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