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화
이한이 따지기도 전에 버드나무 교수는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물론 떠나지 않았어도 이한이 항의하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항의가 통할 교수는 저런 걸 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요네르. 미안하다.”
이한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아까 잔뜩 챙겼을 때 튀었어야 했는데, 괜히 교수한테 잘 보이려고 했다가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다.
“응? 뭐가?”
그러나 요네르는 벌써 식물 근처의 마른 흙을 파내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물을 줘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부당한 노동인데 분하지 않나?”
“식물 돌보는 거 재밌잖아? 너도 좋아한다면서?”
놀랍게도 요네르는 전혀 불만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식물 돌보는 걸 좋아하는 만큼, 여기에서 책으로만 봤던 희귀 식물들을 직접 돌볼 수 있는 경험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내 식물은 그럭저럭 좋아하지만 남의 식물은, 특히 교수 식물은 좀... 아니다. 기분 좋으면 됐지.”
이한은 말하려다가 말았다.
생각해보니 요네르의 사고방식이 긍정적이긴 했다.
교수가 시켰다고 생각하면 우울하지만, 책에서만 볼 수 있던 희귀한 식물들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우울함이 사라지진 않는군.’
요네르처럼 긍정적이기에는 이한이 너무 속물이었다.
그래도 이한은 움직였다.
감정은 감정. 일은 일이었으니까.
“이한. 흙이 말라 있는데 물을 줘야 할까?”
“잎이 단단하고... 책에서 그리 물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넘어가자. 얘는 확실히 물을 줘야 할 것 같은데...”
“잠깐. 그 식물은 그냥 물이 아니라 빗물만 줘야 해. 읽은 적 있어.”
“맞아. 나도 읽었어.”
“내가 너무 아마추어 같은 지적을 했지?”
“아니. 서로 아는 지식은 맞춰봐야 하잖아.”
식물원에 남은 두 학생은 씩 웃으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전문가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법!
다른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있다면 ‘대체 왜 식물 하나 보살피는데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귀족 가문 출신 소년소녀들이 하기에, 식물을 기르는 일은 정말 까다롭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한에게는 달랐다.
‘교수들보다는 식물들이 낫지.’
물론 매일매일 흙 상태를 확인한 다음 물의 종류와 온도를 맞춰서 식물에게 주고, 벌레나 곰팡이 생기면 치우고, 공기 환기시켜주고, 물약 챙겨주고 같은 일들이 성가시고 귀찮게 느껴질 순 있었다.
하지만 식물들은 말수가 적고 과묵한 편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식물은 교수보다 사랑스러운 점이 있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다 한 거 같지?”
“그래.”
둘은 땀을 닦아내며 허리를 폈다. 식물 관리는 검술 훈련 못지않게 고된 일이었다.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너희 어린 인간들을 보고 있었다.
“...?!”
“!”
이한은 바로 지팡이를 뽑아들고 목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겨눴다.
놀랍게도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근처의 연못이었다.
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연못 안에서 거대한 물의 덩어리가 나타났다. 누가 봐도 강력한 정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이름은 파르아키스. 이 연못의 정령이다. 너희 어린 인간들은 드워프의 제자겠구나.
“...예. 교수님을 아십니까?”
그래. 나는 드워프와 이 정원을 돌봐주기로 계약을 맺었지.
정령이 둘을 매우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이유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어린 인간들 중에 너희처럼 성실하고 세심하게 식물들을 돌보는 인간은 드문데...
‘아. 이래서였나?’
파르아키스를 보니 버드나무 교수가 무슨 생각으로 둘을 여기 보낸 건지 알 것 같았다.
버드나무 교수는 식물학을 가르치는 교수.
식물을 돌보는 것에 진심인 이한과 요네르를 보고 감동받았으리라.
그래서 여기 식물들을 돌보는 것을 높게 평가하는 정령에게 보낸 것이다.
둘이 진정으로 식물들을 아낀다면 정령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빠르게 사과했다.
버드나무 교수가 그냥 자기 일을 대신 시킨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감동받았다. 원래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런 정성을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말을 마친 정령은 이한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데 너는 정령들이 두려워할 것 같은데, 어떻게 나무 정령을 데리고 있지?
“......”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요네르는 자신도 모르게 대신 변호에 나섰다.
“이한은 이렇게 보여도 정말 착한 친구에요.”
미안하지만 어린 인간아. 하급 정령들에게는 계약자의 성품까지 알아볼 능력이 없단다.
약하고 급이 낮은 정령일수록 지성이 떨어졌다.
그나마 계약자의 성품을 알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같이 지내면서 서로 알아가야 하는데, 이한 같은 경우에는 그런 기회를 갖기가 힘들었다.
어지간한 정령들은 다 도망치게 만들 것 같은 마력을 전신에서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말하는 떡갈나무들에게서 지팡이를 선물 받았습니다.”
아하. 그래서 그렇구나. 너무 마음 아파하지는 마라. 네 지팡이의 나무 정령도 처음에는 무서웠고 지금도 무섭긴 하지만 네가 좋은 인간이라고 칭찬해주는구나.
“......”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무서워하고 있었던 거였어?
요네르는 안타까워하며 물었다.
“파르아키스 씨. 이한이 정령과 계약할 방법은 없을까요? 정령계에 있는 정령들과 접촉해보려고 해도 정령들이 피하고 있어요.”
글쎄... 나도 이건 처음 겪는 고민이라...
파르아키스는 첨벙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어떠냐?
“그게 뭡니까?”
이한은 살짝 기대했다.
이름이 있는 강력한 정령인 만큼, 역시 현명한 방법을 갖고 있는...
정령과 계약하는 건 포기하고 다른 존재들과 계약하는 건? 마력이 그 정도로 많다면 대부분 두려워하겠지만, 꼭 그게 단점만은 아니다. 그런 점을 좋아하는 존재들도 있을 테니까.
“...저는 정령하고도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만.”
으음. 역시 그런가. 하긴, 그런 점을 좋아한다면 보통 사악한 존재들이겠지. 너처럼 선량한 마음을 가진 인간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겠구나.
“?”
이한은 당황했다.
...그랬나?
그러나 요네르는 전혀 놀랍지 않다는 듯이 동의의 뜻을 보였다.
“그렇죠.”
“나는 꼭 정령하고만 계약할 생각은 없...”
흠... 꼭 정령과 계약을 해야겠다면 난폭하고 사나운 정령들과 계약하는 것도 방법 중 하나긴 하다.
파르아키스는 다른 방법을 내놓았다.
하급 정령들의 성격이 모두 다 겁 많고 순진무구하진 않았다. 하급 정령들일 때부터 난폭하고 사나운 놈들도 있었다.
특히 불안정하고 파괴적인 원소의 정령일수록 그런 경향성을 강하게 가지곤 했다.
“그런 방법이...! 잠깐,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그런 말씀을 안 해주셨습니다만.”
이한은 이상함을 깨달았다.
혹시 우레걸음 교수가 이한을 엿먹이려고 일부러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가능성 높은 이야기였다.
그야... 하급 정령이 아무리 난폭하고 사나워도 앞뒤 가리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으니까... 아마 피하고 도망칠 가능성이 더 높긴 하겠지.
“......”
“......”
이한과 요네르는 다시 침묵했다. 요네르가 안타까워하는 시선이 괜히 마음 아팠다.
그래도 내가 말한 방법이 아예 틀린 건 아니다. 강하고 급이 높은 정령일수록 널 보고 바로 도망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정령이라면 대화로 네 진실한 성품을 알려줄 수도 있겠지.
“조언 감사합니다.”
음... 아니다. 강하고 급이 높은 정령이라고 다 되는 건 아니고, 가능하면 그 중에서 난폭하고 사나운 정령한테 접촉하는 게 좋겠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정령이라고 꼭 도망간다는 건 아닌데, 이게 정령들이 대체로 무의미한 싸움을 좋아하지 않다보니까...
“......”
변명하듯 말하는 파르아키스의 말에 이한은 차라리 듣지 말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듣고 나니 더 막막해진다!
요네르가 부탁하듯이 물었다.
“혹시 파르아키스 씨가 이한과 계약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요네르. 괜찮아. 그만해.”
“아니야. 내가 꼭 도와줄게!”
요네르는 도움을 받은 만큼 이한에게 갚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한은 슬슬 창피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 혼자 정령 친구 못 구해서 선생님이 ‘누구 이한하고 같이 친구해줄 정령 없니?’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어린 인간 마법사가 나하고 계약하는 건 무리란다. 당장 쓰러지...
말하던 파르아키스는 이한을 쳐다보고 다시 말을 바꿨다.
...지는 않겠지만 미안하다. 지금 나는 드워프와 계약을 맺었거든. 널 따라다니면서 도움을 주기는 어렵겠구나.
“괜찮습니다.”
이한은 슬슬 언데드와 친해질 마음의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지? 이 학교에 내가 아는 정령이 하나 소환되어 있단다. 내가 소개해줬다고 하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지도 모른단다.
“!”
이한은 놀라워했다.
생각치도 못했던 좋은 제안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너무 폐를 끼치는 게 아닌가 싶은데...”
너희 두 어린 원예사를 보니 이 정도는 꼭 도와주고 싶구나. 너무 신경 쓸 것 없단다. 그리고...
파르아키스는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그러다가 결국 말했다.
그 친구가 너를 피해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알겠지?
“...예...”
이한은 대체 어느 정도로 강한 정령을 찾아가야 이야기라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령왕이라도 찾아가야 하나?
* * *
파르아키스는 몸을 둥글게 말고 띄우더니 연못의 물을 비웠다. 그러자 그 아래로 깊은 동굴이 드러났다.
여기로 들어가면 그 친구가 있는 곳에 바로 갈 수 있을 거다.
이한은 정령의 친절에 감사해했다. 그러나 파르아키스의 친절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파앗!
이한과 요네르의 손등에 연못을 닮은 고대 문자가 새겨졌다.
내 힘을 조금이나마 담았단다. 그 문양이 너희 어린 마법사들을 도와줄 거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한과 요네르는 진심을 담아서 감사 인사를 표했다.
학교의 어지간한 교수님보다 눈앞의 정령이 훨씬 더 인자한 것 같았다.
그래.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잊지 말거라.
이한과 요네르가 연못 아래로 걸어 내려가자, 파르아키스는 금세 원래 연못으로 돌아왔다. 지하로 향하는 통로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빛이여.”
이한은 빛의 구체를 띄웠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나무 정령의 지팡이를 쳐다보았다.
지금도 자신이 무섭냐고 묻고 싶었지만, 너무 구질구질한 것 같아서 참았다.
‘그래도 정말 묻고 싶군.’
“이한?”
“!”
이한은 속마음을 들켰나 싶어 당황했다.
“왜 그러지?”
“파르아키스 씨는 연못에 계셨잖아. 지금 찾아가는 정령은 어디 있을 것 같아?”
“...흠.”
요네르의 질문은 확실히 예리했다. 파르아키스는 정작 어떤 정령인지 설명해주는 걸 까먹었던 것이다.
“아마... 호수 지하나 강 지하 같은 곳 아닐까 싶은데.”
파르아키스가 연못의 정령인 만큼 친구도 비슷한 정령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 강, 연못, 바다 등등.
‘설마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지는 않겠지.’
최악의 경우 도착한 곳이 바다 밑 던전일 수도 있었다.
이한은 이 마법학교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강의 정령이면 좋겠어. 강의 정령들은 대부분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들었거든.”
“확실히 강의 정령과 계약할 수 있다면 이 감옥... 아니, 이 학교생활에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긴 하겠군.”
말하던 이한은 멈칫했다.
‘그런데 강의 정령은 대부분 부드러운 성격이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또 도망치는 거 아닌가?
철커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둘은 통로에서 벗어나 위로 올라왔다.
어둡고 적막한 공기와 함께, 이한이 한 번 본 적 있는 장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학교의 징벌방이었다.
“......”
이한은 생각했다.
그 친구가 강의 정령은 절대 아닐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