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화
“움직여라.”
서투르고 실력 없는 마법사일수록 지팡이를 요란하게 휘두르고 주문을 크게 외쳤다.
자신이 없는 만큼 더욱 강하게 행동해야 스스로의 심상(心象)을 구체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한은 지팡이도 거의 휘두르지 않고 목소리도 속삭이듯이 작았다.
이한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볼라디 교수가 혹독하게 훈련시킨 효과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
요네르는 자연스럽게 날아가는 과제들의 모습에 놀랐다.
마치 종이로 만든 새처럼, 이한과 요네르의 두꺼운 과제는 부드럽게 공기를 가르고 교수의 과제더미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단순히 과제를 날리는 건데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건 이제까지 요네르가 봐왔던 뻣뻣하고 끊기는 <하급 조종> 마법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마법처럼 보였다.
‘집중하자.’
이한은 정신을 집중시켰다.
단순히 과제더미에 꽂아 넣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교수에게 들키지 않아야 했다.
-집중해라.
마치 귓가에 볼라디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종이를 사이에 끼워 넣는 것뿐인 간단한 일이다.”
귓가에 들려오는 볼라디 교수의 목소리가 선명해졌다.
“하지만 결계가 쳐져 있는데?”
“뚫고 들어갈 수 있을 거다. 이미 배운 거니까. 그렇지?”
목소리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선명해졌다.
이건...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한은 두려움에 전율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한의 뒤에서 교수 두 명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요네르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정도였다.
볼라디 교수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시선을 돌리지? 집중해라.”
이한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러자 볼라디 교수 옆에 있던, 처음 보는 교수가 말했다.
“아니야. 그냥 포기하고 물러서는 게 좋을지도...”
“저 말은 무시해라. 넌 할 수 있다. 배웠던 걸 떠올려라.”
“......”
이한은 이번 주에 닥친 불운들을 떠올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치게 운이 없었다.
무슨 저주라도 받았나?
‘하필 지나가는 교수들을 만나다니.’
차라리 가르시아 교수면 낫지 볼라디 교수라니.
이한은 진지하게 행운의 물약이라도 찾아봐야 하나 고민이 들 정도였다.
“아니라니까? 저거 결계가 생각보다 난이도가 높아.”
“할 수 있다. 해라.”
“저기, 교수님들... 죄송한데 의견을 좀 통일해서 조언을 주시면 안 될까요...?”
보다 못한 요네르가 말을 꺼냈지만 두 교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볼라디 교수는 할 수 있으니 하라고 말했고, 처음 보는 교수는 물러나라고 조언했다.
환장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이한은 그래도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결계가 쳐져 있었군.’
공중에 떠서 교수의 옆을 졸졸 쫓아다니는 과제더미인 만큼 당연히 마법이 걸려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결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처음 보는 교수가 말했다.
“저 결계는 누군가 건드리면 시끄럽게 소리를 만들어내는 결계다. 너한테는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저 종이더미 부근에는 보이지 않는 여러 겹의 마력 띠가 회전하고 있거든.”
이한은 그 말을 듣고 마력을 느끼려고 집중했다.
전신에서 뿜어내는 어마어마한 마력 때문에 놓치기 쉬웠지만, 이한이 가진 재능은 마력뿐만이 아니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끈질긴 생활력, 위기의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철저한 계산력, 정령들을 겁에 질리게 만드는 쓸데없는 존재감 말고도 마력을 탐지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던 것이다.
‘보인다!’
집중하자 정말로 종이더미 주변에 펼쳐진 마력의 띠들이 천천히 회전하는 게 느껴졌다.
“지금 학생 수준에서 마력 띠들을 건드리지 않고 접근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그러니까 괜히 배그렉 교수의 말에 넘어가서 무모한 시도를 벌이지 말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좋을 거야. 배그렉 교수는 알다시피 학생 생각을 전혀 해주지 않거든.”
‘정말 그렇죠.’
이한은 매우 공감했지만 입으로는 다른 말을 내뱉었다.
“아닙니다. 교수님께서는 언제나 학생을 생각해주십니다.”
“그렇다고 하지 않나.”
볼라디 교수는 순수하게 이한의 말을 받아들였다.
만약 이한이 동감했다면 볼라디 교수는 ‘아, 내가 학생 생각을 잘 해주지 않는군’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한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볼라디 교수는 현재 자신의 교육 방식이 학생을 생각해주는 게 맞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것 말고 다른 가능성은 없어보였다.
“정말이야? 제자가 정말 착하군.”
“그건 논리적이지 않다. 워다나즈. 해라. 상대가 걸어가고 있다.”
“안 된다니까...!”
볼라디 교수가 재촉하고, 처음 보는 교수가 말렸다.
그리고 이한은 움직였다.
팟!
두꺼운 과제는 부드럽게 날아가 마력 띠들이 움직이는 사이를 통과했다.
아주 조금의 차이라도 있었다면 마력 띠가 찢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이한은 망설이지 않고 다음 과제를 날려 보냈다. 요네르의 과제도 정확하게 과제 더미 위에 착지했다.
요네르는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볼라디 교수는 보일듯 말듯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배웠으니까.”
“예. 교수님의 지도 편달 덕분입니다.”
이한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자 처음 보는 교수는 더욱 감탄했다.
“정말로 너무 과분한 제자 아닌가?! 만나서 반갑다. 네가 워다나즈겠지? 나는 키르민 쿠 교수라고 한다. 원래라면 악수를 해야 하겠지만, 나하고 악수를 하는 건 추천하지 않는단다. 종족적 사정이 있거든.”
키르민 교수는 볼라디 교수와 정반대되는 사람이었다.
쾌활하고 통통 튀는 목소리에, 신사답게 주름 하나 없이 맵시 있게 차려입은 옷차림. 볼라디 교수와 친하게 대화하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떤 분야를 가르치십니까?”
“나는 환상 마법, 그 중에서도 결계의 전문가지. 방금도 봤잖니?”
“!”
이한은 반색했다.
말하는 걸 듣고 혹시나 했는데 정말로 결계 마법의 전문가였다니.
“안 그래도 이번 학기에 한 번은 가르시아 교수님의 강의실에 들어가게 될 거란다. 환상 마법이 얼마나 재밌고 유쾌한 마법인지 학생들한테 가르쳐줘야지.”
“환상 마법은 쓸모없다.”
“......”
이한은 볼라디 교수의 말에 경악했다.
다른 교수의 분야를 무시하다니.
결투 터지는 거 아니야?
그러나 키르민 교수는 볼라디 교수의 말을 그냥 무시했다.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를 환상 마법으로 속이는 건 다른 분야의 마법보다 몇 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 한 백 번은 말했지. 그런데 자네가 말하는 '일정 수준 이상'의 마법사는 이 드넓은 제국에서 한 줌도 안 되잖아. 그래서 워다나즈. 저 종이뭉치들을 왜 저기에 넣으려고 한 거지?”
이한은 1초 정도 고민했다.
교수의 분위기를 보고, 거짓말을 하면 통할까 생각하고, 가장 좋은 판단을 내렸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낫겠군.’
“과제 제출에 늦어서요?”
“......”
요네르가 창피함으로 얼굴을 붉혔다. 키르민 교수도 예상치 못한 이유에 당황한 것 같았다.
‘고작 과제 제출을 조금 늦은 것 때문에?!’
“죄송합니다. 교수님.”
이한은 일단 볼라디 교수에게도 사과했다. 그러나 볼라디 교수는 예상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
“과제가 늦어서요?”
“내가 낸 과제인가?”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하긴 그렇군요.”
키르민 교수는 두 사제(師弟)의 모습을 기묘한 걸 보듯이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볼라디 교수와 이렇게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에 봤던 것이다.
교수든 학생이든 한 몇 분 대화하면 ‘네 머리 위에 태양이 뜨길 빈다 빌어먹을 흡혈귀 새끼야’하고 자리를 떠도 이상하지 않은 성격인데...
“그래서 무슨 강의였니?”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이요.”
“알펜 나이튼 교수?”
상대의 이름을 말하는 키르민 교수의 모습에 이한은 긴장했다.
교수들 사이의 우정 앞에서 학생과의 약속은 보잘것없는...
“잘 했다. 잘 했어. 그 교수 과제는 솔직히 해줄 것도 없지.”
“???”
키르민 교수는 오히려 이한을 칭찬해줬다. 볼라디 교수도 드물게 말을 덧붙였다.
“알펜 나이튼 교수는 제국 상급 행정관으로 일했던 마법사다. 마법이 아니라 권력을 다루는 데에 더 능숙하지.”
“그 작자가 옛날에 내 연구예산을 절반이나 깎아버린 거 알아?”
두 교수는 이를 갈며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교수를 욕했다. 그 익숙한 모습에 이한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교수라고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특히 순수 마법 연구의 길로 나아간 마법사들은 제국에서 고위 관직을 받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마법사들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이유야 대충 ‘마법의 순수가 어쩌고저쩌고’ ‘세속의 유혹과 타락이 어쩌고저쩌고’였지만, 이한이 보기에는 아마 후자가 전자의 예산을 건드릴 수 있어서 같았다.
하늘을 무너뜨리고 땅을 갈라지게 만드는 마법사도 연구예산이 없다면 연구를 할 수 없기 마련.
그런 점에서 제국 고위 관직에서 일하며 연구예산을 심사하는 마법사들은 다른 모든 마법사들의 적이었다.
-내 평생의 감이 말하고 있소! 이 던전은 영지 예산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발굴해야 하오. 근처 모험가들을 전부 불러서...
-저번에도 평생의 감이라고 했지 않나. 이 안건은 취소요.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리겠어! 네놈의 밤길을 조심하는 게 좋을거다!
-내 밤길을 노리려면 줄 서서 기다려야겠군. 대기자가 서른 세 명이나 되거든.
...이런 품위 있는 대화들이 매년 벌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한은 두 교수의 대화에도 생각이 바뀌진 않았다.
오히려...
‘아니, 제국 상급 행정관 출신이셨나?’
상대가 제국 고관 출신이라고 하자 이한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제국 관료계에 강력한 인맥을 갖고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한의 목표 중 가장 윗줄에 있는 게 바로 제국 관료였다.
이한은 갑자기 알펜 나이튼 교수에 대한 원한이 눈 녹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지랄맞은 과제량도 갑자기 제국을 짊어진 고관의 책임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앞으로 최대한 더 잘 보여야겠다.’
“워다나즈. 소문을 들어보니 네가 아주 재능이 뛰어나다던데. 조심하는 게 좋겠다. 제국 관료로 끌려가지 않도록 말이야. 너무 뛰어나면 그쪽에서 이런저런 유혹을 보내거든.”
볼라디 교수는 보기 드물게 인상을 찌푸리며 길게 말했다.
“농담은 거기까지만 해라. 쿠. 워다나즈가 그런 하찮은 반마법의 길을 걸을 리가 없지 않나.”
“하긴 내가 무슨 소리를.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데. 제국 관료가 될 리는 없겠지. 그렇지?”
“......”
이한은 오랜만에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 * *
키르민 쿠 교수한테 다음 환상 마법 시간에 보자는 말을 듣고(키르민 교수는 볼라디 교수의 방해는 무시하고 환상 마법을 진지하게 배워보는 게 좋겠다고 추천까지 해줬다), 이한은 요네르와 함께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을 만나러 향했다.
아까 강의실 밖에서 눈빛을 교환한 걸 보니, 다들 무사히 돌아간 건 분명해보였다.
‘다행이군.’
이제 재료를 받아 물약을...
“다들 어제 고생 많았...”
“워다나즈! 가이난도가 납치됐어!”
“!”
탑 앞에 모여 있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한을 보자마자 다급하게 달려왔다.
다들 방금까지 싸우기라도 했는지 꼴이 엉망이었다.
이한은 깜짝 놀라서 물었다.
“누구한테? 설마 흰 호랑이 탑 놈들한테?”
“아니! 풀려난 소환수한테!!”
이한은 안심하려다가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안심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