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화
“다들 모여! 더르규가 잡혀갔어!”
“?”
보아하니 가이난도만 잡혀간 게 아니었다. 이한은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안뜰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엉망이 된 꼴로 허둥대고 있었다.
“흰 호랑이 탑도 잡혀갔나? 혹시 저 자식들이 가이난도를 일부러 던져준 건가?”
이한은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더르규가 잡혀간 것에 분노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몰려와서 가이난도를 붙잡아 던졌나 싶었던 것이다.
“아니야. 가이난도는 그냥 자기 발목에 걸려서 넘어졌어.”
“...그렇군.”
* * *
이한과 요네르가 두 교수에게 잡혀서 ‘진짜 마법사는 관료로 취직하지 않고 대학원에 간단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을 다 듣고 나온 학생들은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워낙 숨 막히는 강의였기에 강의가 끝나고 나면 다들 밖으로 뛰쳐나와 신선한 공기를 들이키곤 했다.
-정신 차려! 쓰러지면 안 돼! 다음 강의가 있다고!
-나... 나는 그냥 두고 가... 여기서 자야겠어...
쓰러지기 직전인 학생들은 푸른 용의 탑에만 있지 않았다.
어느 탑의 학생이든 지루하고 괴로운 강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워다나즈하고 메이킨 진짜 괜찮은 거 맞아? 교수님이 눈치채셨으면 어떡하지?
-교수님은 우리 대신 몬스터를 앉혀놔도 눈치 못 채고 수업하실 거야.
-하긴...
-농담이 아니라 진짜 심각해. 난 이 강의 몇 번만 더 들으면 영원한 잠에 빠질 거 같아.
-지금 과제도 이 정도인데 중간고사 때 시험은 어떻게 해? 백지로 내도 괜찮을까? 징벌방으로 끌려가면...
-솔직히 말해서. 나 강의 들으면서 아까 불 질러볼까 생각했었어.
-나도. 차라리 풀려난 소환수들이 나타났으면 싶더라고.
쾅!
학생들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그냥 시끄러워서 그랬는지 정말로 풀숲에서 소환수가 나타났다.
몇몇 학생들은 저번에 본 적 있는 덩굴괴물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다들 도망쳐!
-건물 안으로 도망가!
-누가 교수님 불러와!
-아니야! 교수님은 불러도 도움이 안 될 거야! 그럴 시간에 도망가!
발빠르게 도망친 학생들도 있었지만 가이난도처럼 자기 발에 걸려서 넘어진 학생도 있었다.
덩굴괴물은 굳이 도망치는 학생들을 쫓지 않았다.
놈은 여유롭게 쓰러진 학생 몇몇을 덩굴로 잘 묶어서 들어 올린 다음 신나서 떠나버렸다.
“...잠깐. 더르규도 넘어졌나? 넘어질 친구는 아닌데.”
“그 흰 호랑이 탑 오크 친구는 가이난도를 구해주려다가 붙잡혔어.”
“......”
이한은 더르규한테 미안해졌다. 괜히 친구라고 가이난도 도와주려다가 같이 잡혀갔다니...
본관 안에서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헐떡이며 뛰쳐나왔다.
“어떻게 됐어?! 교수님은?!”
“알, 알아서 하시라는데...”
“......”
“......”
교수를 부르러 갔던 학생이 갖고 돌아온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흰 호랑이 탑 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탑 학생들도 할 말을 잃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그러나 이한은 침착했다.
‘교수를 잘 골랐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하게 행동했군.’
급하다고 아무 교수나 붙잡고 ‘도와주십시오’하면 안 됐다. 비교적 친하고, 양심이 있는...
‘잠깐. 양심 있는 교수는 없지.’
...비교적 친하고, 좀 호구 같은 면이 남아 있는 교수한테 부탁해야했다.
아마 저 흰 호랑이 탑 학생은 급한 나머지 아무나 붙잡고 부탁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워다나즈? 어떻게 해야 할까?”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한을 간절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쫓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을 것인가?
그들이 결정내리기에는 너무 힘든 선택이었다.
“쫓자. 교수들은 지금 어디있는지도 모르는데다가, 흔적을 놓치면 찾기 귀찮아질 거야.”
지금은 소환수가 남긴 흔적이 앞에 길게 새겨져 있는데다가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지만, 시간을 더 주면 쫓기 힘들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이한에게는 한 가지 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페르쿤트라!’
이한이 이름을 부르자 안에 잠들어 있던 페르쿤트라의 조각이 반응해서 공명했다.
지금, 계약을 맺은 계약자가 정당한 권리로 정령을 소환해내고 있었다.
“우레를 노래해주십시오, 정령이여! 뇌성과 벼락을! 멸망한 왕국의 종루를 지키는 종지기도, 창해(滄海)를 헤매는 조각배의 망루꾼도 당신의 이름을 두려워합니다. 당신과 계약한 자가 마땅한 자격으로 당신을 부릅니다!”
이한이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고 황녀는 깜짝 놀랐다.
여기서 가장 빨리 정령을 부린 마법사인 만큼, 이한이 지금 어떤 정령을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정령을 부를 때 사용하는 주문은 그 정령의 위엄과 격을 드러냈다.
저렇게 길고 복잡한 주문은, 분명...
콰지지지직!
이한이 지팡이를 꽂은 자리에서 번개의 꽃이 개화하며 정령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번개의 정령!’
황녀 곁에 있던 기사, 로웨나는 황녀보다 더 놀랐다.
황녀보다 강력한 정령과 계약한 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워다나즈 또한 말도 안 되는, 괴물같은 재능을 소유한 마법사였으니까.
그렇지만 번개의 정령은 정령들 중에서도 가장 난폭하고 사나운 축에 들어가는 정령이었다.
더군다나 저렇게 길게 부를 정도면 결코 약할 리도 없었다.
‘대체 어떻게? 무슨 수로 계약을?!’
“나오십시오!”
이한의 부탁과 함께 페르쿤트라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먹만한 번개의 구체가 스파크를 튀기며 모습을 갖췄다.
학생들은 그 모습에 당황했다.
어?
“???”
“...아! 그렇구나! 정령의 강함은 크기랑은 상관이 없었지!”
우레걸음이 보여줬던 토끼 모양의 정령도 어마어마하게 강하다고 들었었다.
저 정령도 저렇게 평범한 겉모습을 갖고 있지만, 분명 비범한 힘을 숨기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워다나즈가 아까 그렇게 고생을 해서 불러낸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워다나즈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학생들은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한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던 페르쿤트라와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아무리 분신이라지만...?
-뭡니까? 너무 일부분만 온 거 아닙니까?
-내가 지금... 네 명령으로 갇혀 있는 상황이란 걸 잊은 거냐...!
페르쿤트라는 답답하다는 듯이 이한에게 텔레파시로 외쳤다.
물론 페르쿤트라가 이한에게 ‘밖에 나가면 잊지 말고 나를 소환해내라! 내 능력은 고작 이것만이 아니다!’라고 말하긴 했었다.
그러나 그건 당연히 며칠 정도 지나고 나서의 이야기였다.
지금 페르쿤트라는 이한이 징벌방을 나가기 위해 ‘잠시 여기에 갇혀 있으라’하고 명령을 내린 상황 아닌가.
그게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밖으로 여유 있게 소환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페르쿤트라가 강력한 정령이니까 그나마 일부의 일부라도 이렇게 간신히 밖으로 소환된 거지, 원래라면 끝날 때까지 소환이 안 되어야 정상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설명한 페르쿤트라였지만, 이한의 눈빛은 차가웠다.
-지금 내 말을 못 믿는 거냐...?!
-못 믿는 건 아닙니다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자꾸 이렇게 안 되는 이유가 생기면 제가 뭘 믿고 부르겠습니까?
페르쿤트라는 차라리 옛날 마법사들이 그리웠다.
거만하고, 성질 더럽고, 논리라고는 하나도 없이 떽떽대며 억지를 부리던 놈들.
그런 놈들은 페르쿤트라도 강하게 맞받아치고 태워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어린 마법사는 공손한 태도로 재수 없는 소리를 해댔다.
더 억울한 건 반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라. 무엇 때문에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 힘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두고 보아라!
‘과연 그럴까?’
-네 감정을 내가 느낄 수 있다고 했지!
-아니. 생각도 못합니까? 서로 프라이버시를 좀 존중합시다.
* * *
이한은 서둘러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함께 흔적을 쫓았다.
앞을 보니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추적을 결정했는지 달려가고 있었다.
“이 자식들! 따라하지 마!”
“우리가 할 소리다! 너희야말로 저리 꺼져!”
“마법도 제대로 못 쓰면서... 헉헉헉.”
그리고 이 달리기의 승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검술 수업이나 체력 훈련 수업까지 따로 듣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따라가는 건 체력적으로 무리였다.
이한은 안쓰럽다는 듯이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냐.”
“저... 저 놈들이 무식하게 체력이 좋은... 헉헉.”
“먼저 갈 테니, 따라올 수 있을 만큼 따라와.”
“안 돼! 워다나즈! 커헉... 너 혼자 갔다가는,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널...”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지는 않을 것 같은데...’
로웨나나 아산처럼 이한을 비교적 잘 아는 친구들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학생이라면 혼자서 흰 호랑이 탑 학생들과 붙여 놓을 경우 위험하겠지만, 이한은 좀 경우가 달랐다.
혼자 붙여놔도 흰 호랑이 탑 애들이 위험하지 않을까?
“괜찮으니까 회복되는 대로 따라와라.”
-너는 왜 그렇게 체력이 좋은 거냐?
쭉쭉 달려가는 이한을 보며 페르쿤트라는 의아해했다.
딱히 기사 가문 출신도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왜...?
그러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페르쿤트라는 다급히 외쳤다.
-적이다. 적이 숨어 있다!
“나는 밤에 숨노니!"
이한은 본능적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근처에 숨을 곳이 없는데?
지금 이 길 근처에는 커다란 풀숲 같은 게 없었다.
숨을 만한 장애물을 찾으려면 좀 더 달려서 산 쪽으로 향해야했다.
-아래!
“!”
이한은 바로 몸을 날렸다.
만약 땅에 숨어 있었던 거라면 이한이 투명화를 썼다 하더라도 소리와 진동으로 눈치를 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덩굴괴물은 이한을 노리지 않았다. 땅 속에서 튀어나오면서 앞쪽의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을 붙잡았다.
“앙라고!! 안 돼!”
염소 수인족 한 명이 그대로 덩굴에 휘감겨서 올라갔다.
-어떻게 숨어 있었던 겁니까?
-마법사들이 쓸데없는 능력을 부여한 게 분명하다. 원래 땅 속으로 스며들어서 의태하는 능력 같은 건 없는 몬스터인데!
‘이 학교는 교수들만 지랄하는 게 아니라 선배들도 지랄을 하는군.’
이한은 지팡이를 움켜쥐고 덩굴괴물에게 집중했다.
붙잡힌 흰 호랑이 탑 학생이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졌다.
-놈은 마력을 흡수한다. 마력을 뺏기지 않도록 주의... 넌 좀 뺏겨도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주의해라! 붙잡히면 귀찮아질 테니!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습니다.
마력 많다고 덩굴한테 잡힐 정도로 이한이 멍청하진 않았다. 이한은 지팡이를 휘두르며 화염을 불러내려고 했다.
“타올ㄹ...”
-안 돼!!!! 절대 안 돼!!!!!
이한의 화염에 트라우마가 있던 페르쿤트라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확신이 서기까지 이한이 화염 마법을 쓰는 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안 됩니까?
-위험하다! 다른 학생들까지 태워죽일 수 있어!
-공격용이 아니라 놈이 접근하지 못하게...
-그래도 위험해!! 안 돼!!
‘그 정도인가?’
이한은 의아해했다.
불꽃 덩어리들을 근처에 띄워놔서 접근 못하게 막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원래라면 한 번에 제압할 수 있는 놈이지만, 지금 나는 그럴 힘이 부족하다.
이한은 배신감 섞인 눈빛으로 페르쿤트라를 쳐다보았다.
아까는 이 정도 힘으로도 된다고 했으면서!
페르쿤트라는 허겁지겁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게 마법을 가르쳐주겠다! 네가 나 대신 사용하는 거다.
-그냥 어떻게든 직접 사용하시면 안 됩니까? 제가 배우자마자 바로 쓰는 건 좀 걱정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