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화
-너 스스로를 믿어라!
페르쿤트라는 원래라면 절대 하지 않을 낯간지러울 소리를 내뱉었다.
하여간 사사건건 얄미운 놈이었다.
보통 다른 마법사들은 능력이 없는데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령 네가 뭘 안다고 하지 말래? 지켜보고 있어! 안 죽어!’같은 말로 오만하게 굴다가 실패한다면, 이한은 능력이 있는데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무모하십니까?’ ‘자기 일 아니라고 그러시는 겁니까?’같은 식으로 반응했다.
겸손한 것도 정도가 있지...
-스스로에 대한 신뢰는 객관적인 상황 분석으로 나오는 거지 그런 응원 몇 마디로 나오는 게 아닙니다만.
-자, 집중하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냥 자기 할 말을 했다. 괜히 휘말리면 자기만 열받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다른 원소들을 다뤘던 것처럼 번개의 이미지를 떠올려라.
원소 마법의 기본.
그 원소의 이미지를 강하게 떠올리고 머릿속에서 구현화시키는 것.
자신의 마력 성질을 원소에 맞게 변화시키는 이 과정은 가장 기초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번개 속성은 조금 달랐다.
-단,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을 떠올리지 마라!
“!”
흔히 마법사들이 가장 떠올리기 쉬운 번개의 모습은 하늘에서 번쩍하고 내리찍는 벼락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번개 원소로 속성 변환을 시킬 때 그런 벼락을 떠올리는 건 위험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마력을 한 곳에 유지시킨 채 통제해야 하는데, 벼락의 이미지는 그런 통제와는 정반대에 위치한 것이다.
타오르는 화염도, 고여 있는 물도, 얼어붙은 얼음도 같은 자리에 계속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벼락은 본질적으로 계속 머무를 수 없는 존재였다.
하늘에서 내리치고 나면 사방으로 흩어질 운명을 타고난 현상.
어린 마법사가 섣불리 벼락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마력을 번개의 속성으로 전환시켰다가는 바로 통제를 잃고 번개가 사방으로 난사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저번에 지하 징벌방에서 이한의 화염을 멋대로 건드렸다가 같이 죽을 뻔한 페르쿤트라로서는 이런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야 했다.
이 어린 마법사의 마력을 봤을 때, 한 번만 사고를 일으켜도 그건 곧 대형사고일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이해한다. 벼락을 떠올리지 않고 어떻게 번개의 상(像)을 그릴 수 있겠냐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수많은 번개 속성을 다룬 마법사들은 그 제약을 넘어서 결국 해냈다! 너도 결국에는 익숙해질 수 있을 거다. 진정한 마법사는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안주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자신의 뜻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자. 내게 팔을 빌려다오.
물론 페르쿤트라는 이한이 생각한 것처럼 아무 방법도 없이 무모한 이야기만 지껄이는 멍청한 정령이 아니었다.
이한의 능력이 뛰어나단 건 인정하지만, 어린 마법사가 아무런 연습도 없이 번개 속성을 다루는 건 매우 힘든 일이 맞았다.
당연히 생각이 있었다.
저번에 징벌방에서 했던 것처럼, 본인이 직접 이한의 팔에 깃들어 번개를 통제하는 걸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힘을 잃고 소환됐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파지직!
-했습니다. 이제 팔을 빌려드리면 됩니까?
-......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지팡이 위에 형성된 번개의 구체를 보고 경악했다.
놀랍게도 이 어린 마법사는, 페르쿤트라가 깃들어서 도와주기도 전에 원소 변환을 끝내고 번개 속성의 마력을 한 자리에 유지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대체 어떻게???’
페르쿤트라의 경악과 달리, 이한은 번개 속성을 다루는 데에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애초에 이한은 다른 마법사들과 사고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이한은 매우 간단하게 접근했다.
벼락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없다는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팡이 위에 마력으로 된 구(球)의 모양을 떠올리고 그걸 축전지로 생각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이한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발상!
구체 안에 충전되듯 차오르는 전기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방식이 상성이 좋았는지 덕분에 바로 성공했다.
실제로 다른 원소들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느낌까지 들었으니...
‘말했던 것보다 쉽군. 호들갑이 심하신데.’
이한은 실례되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니 페르쿤트라는 징벌방에서 만났을 때부터 꽤 호들갑이 심한 편이었다.
화염도 그렇고...
-너는... 번개에 꽤 재능이 있다!
-그렇습니까?
이한은 무덤덤했다.
속성 관련된 칭찬을 몇 번 듣다보니 이제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냥 예의상 해주는 거 아닌가?
어린 마법사들에게 자신감은 중요한 것인 만큼 ‘너는 A 속성에 재능이 있다!’고 해주는 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심드렁함은 페르쿤트라에게도 전달됐다.
페르쿤트라는 기가 막혔다.
페르쿤트라 정도 되는 정령이 칭찬을 해주는 건 정말로 드문 일인 것이다.
-내 말이 거짓으로 들리느냐?! 정말로 재능이 있다!
-예...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이한은 본인이 벼락치기를 많이 해서 번개의 재능이 생겼거나, 혹은 번개 속성 마법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 99% 후자일 테지만...
-그런데 팔에는 언제 오실 겁니까?
이한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페르쿤트라가 팔을 빌려달라고 해놓고 우두커니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기다려라. 지금 깃든다!
‘건망증까지 있으신 건 아니겠지.’
조울증에 건망증까지 있으면 아무리 능력 있는 정령이라 하더라도 불러낼 때 좀 고민을 해봐야 했다.
이한이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팔에 깃들었다.
-지금부터 내가 전해주는 주문에 집중해라.
페르쿤트라는 자신의 마법을 이한에게 전수하려고 했다.
정령들의 마법은 난폭하고 변덕이 심했지만, 강대한 정령 페르쿤트라가 팔을 빌려준다면 새내기 마법사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페르쿤트라의 하급 벼락.
지금 페르쿤트라가 이한에게 전수하려는 2서클 마법이었다.
원리는 단순했다.
마력을 번개 속성으로 전환시킨 후 쏘아 보낸다!
날카로운 화살이나 창의 형태를 부여하거나, 다른 복잡한 속성을 넣을 필요도 없었다.
번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덩치가 상당한데 이걸로 충분한 거 맞습니까? 괜히 성질만 돋우는 게 아닐까요?
-제발 너보다 나이 많은 정령이 말하면 좀 들어라! 말대꾸 좀 하지 말고!
페르쿤트라는 반쯤은 빌듯이 외쳤다.
오만한 놈이 아닌 건 좋았는데 이건 너무 겸손해서 페르쿤트라의 속이 타버릴 지경이었다.
그런다고 이한은 순순히 납득하지 않았다. 페르쿤트라는 이 빌어먹을 계약자가 순순히 말을 듣게 하려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득밖에 없다는 걸 결국 받아들였다.
-잘 들어라. 번개는 원소 중에서도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난폭하다.
‘번개의 정령이 말하니까 괜히 좀 다른 의미로 들리는데.’
-다른 원소들은 그 자체만으로 공격용으로 쓰기 쉽지 않다.
그건 이한도 동감했다.
당장 물 원소 마법을 제대로 된 공격용으로 쓰려면 몇 가지를 추가해야 했으니까.
‘물’이라는 속성뿐만 아니라 ‘구체’나 ‘창’ 같은 속성을 부여하고 거기에 ‘조종’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지만 번개는 다르다.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파괴력을 갖고 있지.
-그런데 화염도...
-형태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복잡한 조준도! 왜냐하면 적중만 하면 되니까!
페르쿤트라는 이한의 말을 끊고 자기 할 말을 계속했다.
-저 소환수는 원래 평범한 식물 몬스터였지만 학생들이 이런저런 몬스터들과 추가로 융합시킨 덕분에 매우 복잡한 속성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덕분에 번개가 더 잘 통하게 되었지. 잘 생각해봐라. 지금 네 목표는 저 놈이 잡아간 학생들을 구출해내는 거겠지? 저 놈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렇긴 합니다.
-그렇다면 이 하급 벼락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디에라도 맞는 순간 놈은 붙잡고 있는 학생들을 모조리 놓쳐버릴 거다. 번개의 힘은 적을 움츠러들게 만드니까! 놈도 너와 계속 싸울 생각은 없을 거다. 배불리 마력을 먹었으니, 그런 공격을 받으면 도망칠 거다!
‘설득력 있군.’
이한은 페르쿤트라의 논리에 설득되었다. 괜히 나이 많은 정령이 아니었다.
<페르쿤트라의 하급 벼락>은 이한이 알고 있는 <하급 마비 저주>와 비슷했다.
마력을 속성변환까지만 시키고 날려버린다는 것이 그랬고, 상대를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는 것이 그랬다.
차이점이 있다면 <페르쿤트라의 하급 벼락>이 더 물리적인 피해가 크고, 피하거나 막기 쉬운 저주와 달리 그런 틈을 주지 않는다는 것 정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매우 효과적이었다.
-알겠습니다. 시전하겠습니다!
-그래! 더럽게 오래 걸렸구나!
페르쿤트라의 말을 못 들은 척 하며 이한은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몰아쳐라, 페르쿤트라의 벼락이여!
-잘 했...
응집된 번개 속성의 마력이 성공적으로 쏘아져나가는 걸 보며 페르쿤트라는 칭찬하려고 했다.
그러나 페르쿤트라는 뒤늦게 이상함을 깨달았다.
구체에 응집된 번개 속성의 마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많았던 것이다.
‘...???????!!!’
페르쿤트라는 이한과 쓸데없는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낸 그 짧은 사이에, 이한이 무의식적으로 마력을 더 모았다는 걸 깨달았다.
‘안 돼!!’
* * *
푸른 용의 탑 학생들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덩굴괴물을 쫓아가는 동안, 불사조의 탑 학생들과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조금 더 현명하게 행동했다.
바로 가르시아 교수를 찾으러 떠난 것이다.
“교수님! 이쪽이에요!!”
다행히 학생들은 걸어가는 가르시아 교수를 찾는데 성공했다.
그 옆에 해골 교장도 둥둥 떠서 지나가고 있었고, 볼라디 교수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둘한테 말도 던지지 않았다.
“어서요! 급해요!”
“다들 침착하세요.”
가르시아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비명을 지르듯이 외치던 학생들이 순식간에 진정했다.
동시에 땅이 흔들리며 가르시아 교수를 매끄럽게 밀어냈다. 가르시아 교수와 학생들은 질풍처럼 나아갔다.
“이쪽이 맞나요?”
“네! 네!”
다행히 덩굴괴물이 남기고 간 흔적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가르시아 교수의 시야에 멀리서 싸우고 있는 덩굴괴물이 잡혔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둘러싸고 검을 휘두르며 놈을 때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효과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 명씩 더 끌려가고 있었다.
가르시아 교수는 지팡이를 들었다. 먼저 덩굴괴물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방 먹일 생각이었다.
그 순간 굵은 벼락이 허공에서 쏘아져나갔다.
파지지지지직!
벼락은 그대로 쏘아져나가 덩굴괴물의 몸통을 그대로 타격했다. 거리가 멀었는데도 가르시아 교수는 벼락에 담긴 강한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 거꾸로 곤두설 정도였다.
-■■■■■■...
덩굴괴물은 감전되는 수준이 아니라 그대로 새까맣게 타버렸다. 붙잡혀 있던 학생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르시아 교수는 황급히 지팡이를 휘둘러 떨어지는 학생들을 안전하게 착지시켰다.
“괜찮아요?!”
“으어어어어...”
부들부들 떠는 학생들의 모습에 가르시아 교수는 순간 마력을 한계 이상으로 흡수당했나 걱정했다.
저 덩굴괴물은 마력을 흡수하는 몬스터인 만큼 어린 마법사들이 잘못 걸리면 크게 내상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를 불러온 티질링 사제는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친구들을 쳐다보았다.
괜찮을까?
“다행이에요!”
가르시아 교수의 입에서 안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티질링도 따라서 안심했다.
다행히 괜찮은 모양이었다.
“다들 안 다쳤나요?”
“네. 다들 괜찮아요. 번개에 조금 감전되긴 했지만요.”
“...?”
티질링은 당황했다.
그거 괜찮은 거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