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화
‘안 괜찮은 거 아닐까?’
티질링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가르시아 교수가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마력만 무사하면 괜찮아요. 다 회복 가능하니까요.”
“아... 네...”
가르시아 교수는 티질링이 슬쩍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번개는 맞아도 괜찮지만, 안의 마력이 다치면...”
“네...”
“저런, 티질링 학생. 가까이 다가와도 괜찮아요. 다들 무사하답니다.”
* * *
“다들 괜찮습니까?!”
이한은 투명화를 풀고 허겁지겁 달려갔다.
번개 마법을 시전하는 순간, 페르쿤트라의 감정이 이한에게도 전달되었던 것이다.
이한의 감정을 페르쿤트라가 읽을 수 있듯이 페르쿤트라의 감정 또한 이한이 읽을 수 있었다.
-망했다!
짧고 간단한 감정이었지만 번개 마법이 작렬하는 순간 이한은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있었다.
페르쿤트라 이 노망난 정령이 힘조절을 하지 못하고 태워버릴 정도로 마법을 시전했구나!
이한은 본인의 마력이 너무 넘쳐서 그랬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애초에 페르쿤트라가 팔에 깃들어서 마법을 도와줬는데 페르쿤트라 탓이지 그게 누구 탓이겠는가.
그리고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르시아 교수가 뒤늦게 도착했다. 가르시아 교수가 학생들을 안전하게 받아내는 걸 보며 이한은 안도했다.
‘역시 유일한 양심...!’
급히 달려오는 이한을 보며 가르시아 교수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마법을 누가 썼나 했는데, 역시 이한 학생이 맞았다.
“다들 괜찮습니다.”
“다행입니다!”
“번개에 조금 감전되긴 했지만요.”
“...?”
이한은 티질링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두 학생이 똑같이 당황한 반응을 보여줬지만 가르시아 교수는 흔들리지 않았다.
진정한 교육자라면 학생들이 똑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똑같이 대답해줘야 하는 법.
“마력만 무사하다면 괜찮답니다. 회복하면 되니까요.”
“...아... 예.”
이한은 아까 티질링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미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던 티질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오세요!
“그그그억...”
“끄어어억.”
붙잡혀 있던 학생들은 안 그래도 마력을 흡수당한 상태에서 감전까지 당한 탓에 몰골이 엉망이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 몇 명이 번개 때문에 근육을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며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젠장. 구해줘도 욕먹겠군.’
이한 본인이었어도 욕했을 것 같았다.
-내가 너희를 구해줬다.
-고, 고맙... 잠깐. 덩굴괴물을 쓰러뜨릴 능력이 있는데 왜 우리까지 같이 감전시키면서 쓰러뜨렸지?
-날 도와주는 이름 있는 정령이 생각보다 멍청해서 힘조절을 못했다.
-그걸 믿으라는 거냐!?
덩굴괴물을 일격에 쓰러뜨릴 능력이 있으면서 힘조절은 못했다고 말하면 이한도 개소리로 들릴 것 같았다.
“자. 다들 일어서보세요.”
가르시아 교수는 지팡이를 휘둘러 학생들의 뭉친 근육을 풀어주고 잃어버린 마력을 보충해주었다.
그걸 뒤에서 본 이한은 새삼스레 놀랐다.
‘가르시아 교수님은 회복 마법도 쓰실 줄 아는 건가?’
저번부터 본 마법들을 따져보면 가르시아 교수가 쓰는 마법들의 분야는 정말 넓었다.
보통 교수들도 자기 전문 분야의 마법만 신경 쓰는 편인데, 가르시아 교수는 이상할 정도로 넓었던 것이다.
왜지?
“감... 감사합니다. 가르시아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여기 이한 학생에게 하세요. 용감하게 덩굴괴물을 쓰러뜨려서 여러분들을 구해줬으니까요.”
“......”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앙라고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고맙다. 워다나즈.”
“꼬우면...”
이한은 ‘꼬우면 잡히지 말지 그랬나?’라고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예상했던 것과 다른 말이 돌아온 것이다.
‘음?’
분명 ‘너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이 사악한 흑마법사 새끼야’같은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순순히 고마워했다.
이한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가르시아 교수 앞이라서 눈치를 보나 싶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앙라고는 분함 반, 감사함 반이 섞인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정말 분하지만, 기사로서 받은 은혜에 대해 제대로 감사하지 않으면 그건 기사가 아니지. 고맙다.”
“그러면 이제까지 있었던 우리 사이의 원한은 잊어버리는 건가?”
“그건 아니지. 착각하지 마라. 워다나즈.”
“......”
냉정한 대답에 이한은 살짝 상처받았다.
고마우면 그 정도 원한은 잊어줄 수 있지 않나?
물론 이것저것 좀 많이 쌓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번 일은... 정말로 고맙다. 더르규가 왜 너한테 속... 아니, 왜 널 믿는지 조금은 알 것 같군.”
앙라고를 시작으로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진지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다. 워다나즈.”
“너하고 친하게 지낼 일은 없겠지만, 이번에 네가 보여준 명예는 잊지 않겠다.”
“너하고 친하게 지낼 일은 없겠지만 이번 호수 과제도 최대한 협력하도록 하지.”
같이 붙잡혀 있다가 이제 좀 기운이 돌아온 더르규가 뒤늦게 다가왔다.
더르규는 친구들이 이한에게 감사인사를 하는 걸 보고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봐라! 모라디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했지?”
“으음... 확실히 그럴지도.”
“그렇다면 이제 서로의 원한을 잊고 우정을 쌓을 준비가 되었나?”
“그건 아니지. 선 넘지 마라. 더르규.”
“이제까지 했던 일들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어버리란 거냐?”
“......”
더르규는 친구들의 냉정한 대답에 살짝 상처받았다.
분위기 좋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야! 그렇게 세게 쏘면 어떻게 해! 너 흰 호랑이 탑 놈들 있다고 일부러 그런 거지?!”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 회복된 가이난도가 비틀거리면서 다가왔다.
가이난도가 보기에, 이한은 절대 저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흰 호랑이 탑 놈들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려고 그런 게 분명했다.
그건 다 좋은데 하필 왜 가이난도 본인이 붙잡혀 있을 때 한단 말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음해를... 황자. 사과해라.”
“가이난도 황자. 당신은 황족으로서의 긍지나 명예도 모르는 건가? 구해준 사람한테 그게 무슨 막말인가?”
가이난도는 뒤늦게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와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생각지도 못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비난에 가이난도는 갑자기 억울해졌다.
이한과 친해도 가이난도 본인이 몇 배는 더 친할 텐데, 평소에 이한의 선의도 무시한 놈들이 갑자기 저런다니!
“네놈들이 뭘 안다고!”
“우리가 황족의 피를 갖고 있진 않지만 명예는 알지.”
“사과해라. 황자.”
가이난도는 억울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황족으로 인정받는 것이 조금 기쁘기도 했다.
이한이 옆에서 그걸 눈치 채고 어이없어했다.
“지금 황자라고 불려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런데 너희들이 황족취급 안 하는 건 사실이잖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다들 워낙 쟁쟁한 대귀족 가문들이라 세 자리 숫자 넘어가는 황자한테까지 길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한은 굳이 그렇게 말하는 대신 가이난도를 배려해주기로 했다.
“그건 다들 널 친하게 생각해서 그러는 거다. 가이난도.”
“그건 그렇긴 하지...”
가이난도가 살짝 기분 좋아하는 그 짧은 사이도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무리 친하더라도 예의는 지켜야지. 우리도 저 워다나즈에게 감사인사를 했는데.”
“빨리 사과나 해라. 황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가이난도를 압박했다.
칼 찬 기사들의 압박을 견딜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가이난도는 이한이 새삼 저 두꺼운 놈들 상대로 용케 개패듯이 패고 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내가 미안해. 구해줬는데 그런 비난을 하다니.”
“앞으로 조심하도록.”
“황자. 스스로의 명예를 만드는 건 스스로의 행동이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기사답게 고개를 끄덕이며 사과를 인정해줬다.
그리고 훌쩍 떠나버렸다.
이한은 어이가 없었다.
‘너희들 세 명이서 나한테 덤비려고 했던 건 잊었냐?’
이한은 지적하려고 했지만 이미 만족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걸어가 버린 뒤였다.
가이난도는 아직도 억울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진짜 고의 아니었어?”
“고의 아니었다.”
“크윽...! 진짜 고의인 줄 알았는데...!”
정말 고의는 아니었다.
비슷하긴 했지만!
* * *
가르시아 교수는 현장 정리와 뒷수습이 끝나자 이한을 불렀다. 표정에는 걱정이 가득해보였다.
이한은 무슨 소리를 할지 바로 예상할 수 있었다.
-페르쿤트라 씨. 당신이 해명해줘야 합니다.
페르쿤트라가 해명하지 않으면 이한은 가르시아 교수한테 ‘자신의 안전도 상관하지 않고 마법을 갈기는 미친 놈’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여러 의미로 위험한 오해였다.
-따지고 보면 당신 때문이잖습니까.
-알겠다. 알겠어.
페르쿤트라도 가이난도 못지 않게 억울했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책임이 없진 않았으니까.
본인이 이한의 팔에 깃든 이상, 마법이 제대로 통제되는지 끝까지 확인했어야 했다.
그러나...
-...잠깐만.
-?
-시간이... 다 됐는데...
이한은 자신의 팔에 깃든 페르쿤트라의 분신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뿐만 아니라 페르쿤트라 자체가 원래 있던 징벌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한은 경악했다.
-아니라고 하십시오.
-...진짜 미안하다. 고의가 아니었다.
-아니라고 하십시오! 빨리!
-정말 다음에 소환할 때는 진짜 내 능력을 보여주겠...
-지금 이 꼴을 보고서 다음 상황에도 소환하란 겁니까!
새파란 마법사한테 저런 말을 들었지만 페르쿤트라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
-진짜 미안하지만 정말 다음에는...
팟!
페르쿤트라는 사라졌다.
가르시아 교수는 걱정과 엄격함이 섞인 눈동자로 이한을 보며 말했다.
“이한 학생. 방금은 정신이 없어서 말을 못했지만, 아무래도 말을 해줘야겠어요. 번개 마법은 화염 마법과 마찬가지로 원소 마법 중에서 격렬하고 통제하기 위험한, 어려운 마법이에요. 혼자 그렇게까지 익힌 건 정말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지만, 저는 아무래도 학생이 걱정되네요.”
“교수님. 사실 여기에는 깊은 사정이 있습니다.”
이한은 페르쿤트라의 이야기를 상세히 털어놓았다.
물론 우레걸음 교수의 온실을 털었거나 하는 이야기는 전부 다 빼버리고 적당히 각색해서!
하지만 말하면서도 이한은 걱정이 됐다.
‘과연 이런 허무맹랑한 개소리를 믿어줄 것인가?’
“정말 불운이 겹쳤군요!”
‘믿으시네?!’
놀랍게도 가르시아 교수는 믿어줬다. 진정한 교수님이었다.
“그렇군요. 하긴, 이한 학생이 그런 무모한 사람이 아닌데 그런 무모한 짓을 무모하게 저지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만 강조하셔도 충분히 이해했습니다만...’
“그 정령은 조금...”
“칠칠맞고 능력이 의심되십니까?”
“네? 아니요. 그 정도 되는 정령은 능력이 없을 수가 없어요. 아마 이한 학생이 워낙 특이한 계약자라서 이런저런 실수가 있었던 거겠죠.”
“......”
가르시아 교수를 존중하는 이한이었지만, 지금 말은 존중할 수 없었다.
‘지나치게 선량하시군.’
“물론 계약자를 파멸로 끌고 가려는 사악한 정령도 있지만, 지금 들은 걸로는 그런 정령은 아닌 것 같아요. 앞으로는 조심해서, 무엇보다 자기 안전을 생각해서 마법을 사용하세요.”
“알겠습니다.”
“번개 마법을 쓴 건가?”
익숙한 목소리에 이한과 가르시아 교수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볼라디 교수가 얼음처럼 무감정한 눈동자에 희미한 호기심을 담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