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화
“그걸 정말 직접 길렀다고?”
살코는 놀라움과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푸른 용의 탑 학생인, 그것도 제국 대가문들 중 손꼽히는 워다나즈 가문 출신인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이 저런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고 윤기 돌고 탐스러운 감자를 직접 길렀다니.
들어도 믿기지 않았다.
“그래. 직접 길렀다.”
이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고 있던 다른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나섰다.
“워다나즈가 직접 기른 게 맞아, 투탄타.”
“저번에 직접 대접까지 받았어! 정말 맛있었다고!”
“그랬군. 뭘 지불했지?”
살코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멈칫했다.
...그냥 먹었는데...
“설마 아무 대가도 없이 얻어먹었나??”
살코는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당장에라도 망치를 휘두를 것 같은 살벌한 인상에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겁에 질렸다.
투탄타 가문의 가훈은 간단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아무리 같은 탑 친구라 하더라도 일하지 않고 공짜로 얻어먹었다면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악행이었다.
양심 없는 귀족이나 기사 같은 작자들이 할 짓!
“으... 어... 아니...”
보다 못한 이한이 나섰다.
“날 도와줘서 그 대가로 내가 대접한 거다.”
“!”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감동받은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
‘워다나즈...!’
“맞아! 그랬어!”
“우리가 워다나즈를 도왔지!”
그 말에 살코는 표정을 풀었다.
“다행이군. 난 너희들이 설마 아무 대가도 없이 남에게 얻어먹는 그런 짓을 했을까봐 걱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살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단어가 무위도식이라구. 살코.”
“그래. 알겠다.”
이한은 걸어가려는 살코에게 물었다.
“감자 하나 가져가겠나?”
이한이 살코에게 물어 본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텃밭에서 기른 감자는 모두가 좋아했다. 심지어 황녀도 극찬했다.
물론 이한은 요즘 추종자들의 말과 달리 황녀가 뭘 먹든 간에 다 맛있어하는 막입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긴 했지만...
그리고 아까 살코가 이한의 광주리에 있는 감자를 매우 뚫어지게 쳐다봤던 것이다.
감자를 좋아하거나 혹은 감자와 원수를 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니. 난 괜찮다. 지금 너한테 지불할 게 없으니.”
“그냥 받아도 괜찮은데.”
“날 모욕하지 마라. 워다나즈. 투탄타 가문의 드워프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적선 받지 않는다.”
‘그런데 넌 엘프잖...’
이한이 말하기도 전에 살코는 후다닥 가버렸다. 마치 감자를 오랫동안 쳐다보면 감자한테 유혹당하기라도 할 것처럼.
* * *
“저 같은 도둑에게는 힘든 시대입니다.”
이한을 만난 랫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원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그 출신이 다양했던 만큼, 각자 따로 모여서 노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각을 드러내는 인물이 나오기 마련.
투탄타 살코가 바로 그런 드워프, 아니, 엘프였다.
뛰어난 마법 실력과 바위처럼 단단한 책임감 덕분에 투탄타를 따르는 친구들은 늘어났다.
‘닐리아는 왜...’
이한은 갑자기 닐리아가 안쓰러워졌다.
닐리아도 나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주었는데,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은 닐리아를 좋아할지언정 리더로 믿고 따르진 않았다.
살코와는 정반대였다.
‘다크엘프와 엘프의 차이인가? 아니. 그것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살코의 추종자들은 늘어났고, 동시에 검은 거북이 탑에서 운영하는 암시장도 그 규모가 점점 커졌다.
소문을 들은 푸른 용의 탑이나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와서 이것저것 물자를 교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이제 문제도 슬슬 늘어났다.
-아니 이게 왜 빵 다섯 개나 해!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야, 이 커피 가짜잖아! 내 빵 내놔!
-이미 구매한 건 환불할 수 없다니까! 그리고 애초에 민들레로 만든 가짜 커피라고 했잖아!
다른 탑 학생들이 오고 가는 만큼 문제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다른 탑 학생들과 마찰이 생겼을 때 강하게 받아치기 힘들었다.
상대는 대귀족 가문 출신이거나 기사 가문 출신인 것이다.
그래서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은 가장 믿음직스러운, 닐리아가 아닌 살코한테 부탁했다.
살코는 고민 끝에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대신 자신의 규칙을 따라달라고 강하게 말했다.
-내 규칙을 다른 탑 놈들이 따르게 만들고 싶다면 우선 너희들부터 지켜줘야 해!
-알겠어. 투탄타!
-당연히 네 규칙을 따라야지!
-먼저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는 걸 기억해둬.
-좋은 규칙이야!
-다른 탑 녀석들은 절대 지키지 못할 걸?
-마찬가지로 장물도 금지야.
-......
-......
-왜 그러지? 문제라도 있나?
-없어! 없어!
당연히 불만도 있었지만, 그만큼 살코가 으르렁대는 덕분에 다른 문제가 사라진 건 사실이었다.
설명을 다 들은 이한은 분개했다.
“하여간 소수 진상들 때문에 선량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건 똑같군. 흰 호랑이 탑 놈들 때문에 너와 나 같은 도둑들이 굶어죽게 생겼어.”
“그러게 말입니다.”
랫포드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했다.
“힘들겠군. 랫포드. 그럼 뭘 하고 있나?”
“아. 전 괜찮습니다. 장물은 몰래 팔고 있습니다.”
랫포드의 태연한 말에 이한은 살짝 감탄했다. 역시 괜히 프로 도둑놈이 아니었다.
암시장 안에서 또 암시장 짓을 하다니...
“물론 대놓고 하지 못하다보니 규모가 많이 줄었습니다. 대신 다른 걸 하고 있습니다.”
“?”
랫포드는 암시장 한쪽을 가리켰다. 몇몇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앉아서 장사 대신 다른 걸 하고 있었다.
“이, 이걸 잘 보세요. 카드 세 장 중 황제 카드가 있어요. 뒤, 뒤집고 섞을 테니까... 찾, 찾으면 두 배에요.”
카드 세 장을 뒤집은 다음 이리저리 현란하게 섞고 황제 카드 찾으면 건 돈의 두 배.
...도박이잖아!
“도박은 괜찮나?”
“투탄타는 도박을 좋아하지 않지만... 도박까지는 허락해줬습니다. 아무래도 저런 것까지 금지하면 좀... 불만이 너무 심할 테니 말입니다.”
범죄자 비율만 놓고 보면 검은 거북이 탑에 가장 많았다.
도둑 길드, 도박 길드 등등 그런 출신들은 보통 검은 거북이 탑에 들어오는 것이다.
살코도 그걸 알았기에 저런 돈 놓고 돈 먹기는 노동이라고 눈을 감아줬다.
카드 맞추기 도박 말고도 체스 내기, 자물쇠 따주기(이게 아마 랫포드의 일인 것 같았다) 등등 다양한 컨텐츠들이 있었다.
‘무슨 모험가 길드냐?’
“으아악! 내 빵!! 내 3일치 빵!!”
“미, 미안해요. 적당히 느리게 섞었는데...”
흰 호랑이 탑 학생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재산을 날린 모양이었다.
“포기하지 마. 듀크마. 이번에는 운이 나빴어. 한 번만 더 해보자!”
“별로 어렵지 않아! 이번엔 된다고!”
이한은 상대를 쳐다보았다. 저번에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모르툼 교수의 흑마법 수업에서 만난 적 있던 거인 혼혈, 이미르그였다.
이한은 묘하게 감탄했다.
‘확실히 거인이면 상대가 방심하겠군.’
누가 봐도 이미르그의 거대한 손은 서투르고 느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이미르그가 카드를 섞으면서 살짝살짝 재주를 부리고 있는 것을.
‘잘하는데.’
마법이 있는 세계인만큼, 기술과 기교로 승부하는 마술은 설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런 손기술을 익히는 사람들이 없진 않았다.
바로 도박 길드의 도박사들이었다.
마법으로 사기를 쳤다가는 걸릴 확률이 높아지니 순수한 손기술로 승부하는 것이다.
이한은 이미르그가 도박 길드 출신 아닐까 짐작했다.
“이미르그와는 절대 승부하지 마십시오.”
이한의 시선을 오해했는지 랫포드가 충고했다.
나름 손기술이 있는 랫포드도 이미르그와 붙어서 이긴 적은 없었다.
그 정도로 검은 거북이 탑 내에서는 적수가 없는 고수였던 것이다.
“난 도박에 별 관심이 없어. 랫포드. 그냥 재밌어서 보고 있었던 거지.”
이한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자 동전이 사라졌다. 랫포드는 놀라워하며 말했다.
“역시 워다나즈 님! 뛰어난 도둑의 자질을 갖고 계셨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괜한 생각이 아니었군요!”
“다른 사람들 들으면 창피하니까 목소리 좀 낮춰라.”
간단한 동전 마술로 저런 열렬한 반응을 받으니 오히려 더 민망했다.
“아닙니다. 워다나즈 님. 그런 기술을 갖고 계시다면 워다나즈 님도 이 옆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합니다.”
“......”
이한은 순간 솔깃했다.
그럴듯하게 들렸던 것이다.
‘내가 틈틈이 연습했던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였나?’
바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주머니에서 빵과 고기를 갈취하기 위해서...
“하지만 난 다른 탑 소속이잖나.”
“제가 잘 말해보겠습니다. 워다나즈 님에게 신세를 진 친구들이 여럿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랫포드가 일어나기도 전에 뒤에서 살코가 나타났다.
살코 뒤에는 아까 이야기했던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이 죄인처럼 서있었다.
“워다나즈. 다시 물어보니까 여기 친구들이 아무 대가 없이 얻어먹었다고 하던데.”
‘아니 저런 입 싼 놈들.’
이한은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을 욕했다.
잡아뗄거면 끝까지 잡아떼야지 그거 하나 못하다니.
이한은 달랐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잡아뗄 자신이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우리 가문 가훈은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나눠줘라’거든.”
이한의 외모는 개소리를 지껄여도 진지하게 들리도록 만드는 힘이 있었다.
듣고 있던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어쩐지 워다나즈가 다른 친구들을 잘 먹인다 싶었는데...
“널 탓하려는 게 아니다. 워다나즈. 네 잘못이 아니니까. 내 친구들의 잘못을 사과하려고 온 거다. 그건 게으른 귀족들이나 난폭한 기사나 할 법한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살코는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검은 거북이 탑 친구들도 눈치를 보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암시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탑 학생들이 항의했다.
“말이 너무 심하군!”
“게으른 귀족이라니! 귀족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겨운지 몰라서 그러는 말이야!”
“기사로서 우리가 짊어진 명예와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같은 탑 소속의 친구들이긴 하지만 정말 재수 없군.’
이한은 순간 살코의 편을 들 뻔했다.
이런 뻔뻔하고 양심 없는 자식들이...
살코는 아예 못 들은 척 무시했다.
“먹은 만큼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지만 친구들은 지금 당장 그만큼 가진 게 없더군.”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장부를 써서 은화 한 푼도 기록했지만,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한테까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니다. 대신 내가 지불하겠다.”
“!”
이한은 놀랐다.
대신 지불하겠다니.
‘투탄타 가문이 돈이 많긴 하겠군.’
제국에서도 유명한 석공 길드 가문이었으니 돈이 없을 리 없었다.
이한은 지난번 토마토 채소 스튜를 얼마로 부를지 고민했다.
“소문을 들어보니 워다나즈 너는 밤에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다던데. 사실인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완전한 거짓말이다.”
“......”
“......”
암시장 밖에서 듣고 있던 푸른 용의 탑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황당해했다.
‘저 자식 얼굴에 철판 깔았나...?’
‘워다나즈 가문은 감정 훈련법도 시키나봐.’
이한의 부정에도 살코는 자기 할 말을 꿋꿋이 했다.
“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