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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학교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96화 (96/687)

096화

교수가 자신의 존재를 잊었을 때에는 조용히 숨 죽이고 있어야 하는 법.

잊혀진 짐승의 동상은 그 지혜를 통달한 존재였다.

하지만 심심한 건 어쩔 수 없는 법이지. 이렇게 찾아와줘서 고맙구나.

“위대하신 동상님께서는... 이 학교에서 탈ㅊ, 아니, 필요한 지혜를 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한은 탈출 이야기를 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잊혀진 짐승의 동상이 언제 배신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혜라... 그렇게 말하니 낯부끄럽구나. 지혜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줄 수는 있단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은 도와줄 수도 있겠고.

“과연!”

이한은 잊혀진 짐승의 동상이 심심해하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런 도움을 주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내 능력 밖의 일들은 도와줄 수 없단다. 그러니 드래곤을 구해달라는 부탁 같은 건 하지 말렴.

“혹시 교장 선생님을 좀 선하게 만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색의 드래곤을 원하니? 차라리 드래곤이 낫겠구나.

“죄송합니다. 농담이었습니다.”

당연히 이한은 그런 터무니없는 걸 요구할 생각이 없었다.

이한이 원하는 건 한 가지였다.

본관 상층에 위치한, 첨탑 마구간으로 가는 길.

“본관 첨탑에 있는 마구간의 위치를 알고 계십니까?”

세 군데 정도 알고 있지.

이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드디어 원하던 걸 찾은 것이다.

“그 중... 가장 가기 쉬운 곳으로 가는 길을 알고 싶습니다.”

어렵지 않지.

“!”

하지만 그 전에 나를 이겨야 한다!

“?!?”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자 이한은 당황했다.

이한은 지팡이를 쥐고 경계의 눈동자로 동상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동상은 덤벼드는 대신 앞에 청동으로 된 체스판을 깔았다.

한 판 두자꾸나!

“......”

상대는 정말로 심심했던 게 분명했다.

*         *         *

심심함은 맹독 중의 맹독이었다. 교수의 밑에서 오랫동안 충성스럽게 버텨낸 동상도 심심함을 이기진 못했다.

잊혀진 짐승의 동상이 좋아하는 건 체스였다.

체스의 장점은 혼자서도 둘 수 있다는 점이지.

말과 함께 동상의 꼬리와 다른 머리가 흔들거렸다.

이한은 상대의 실력을 가늠해보기 위해 물었다.

“혹시 제가 오기 전에 온 다른 신입생하고도 체스를 두셨습니까?”

그랬지.

“그 신입생이 몇 번 이겼습니까?”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

이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투탄타가 한 판도 이기지 못했나?’

투탄타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지만 계속 덤볐는데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는 건 많은 걸 의미했다.

이 잊혀진 동상의 체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그리고 그걸 숨길 정도로 교묘하다는 거지.’

압도적인 차이가 나면 다시 덤비지 않았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이겨줘야 상대가 희망을 읽고 다시 덤벼들었다.

그렇게 조절하려면 엄청난 실력 차이가 필요했다.

‘내가 이길 수 있을까?’

이한은 스스로가 체스를 잘 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체스를 안 둬본 건 아니었다.

연구실에 갇혀 있는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이 이한도 무의미한 내기 활동을 즐기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인기가 좋은 게 체스였다.

이한이 다른 학생들 사이에서는 한 번도 진 적이 없긴 했지만...

...그건 우물 안의 개구리일 뿐, 옆 연구실의 외국인 교수 상대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그 외국인 교수는 약자 상대로 이기는 게 매우 즐거웠는지 심심하면 이한을 불러대서 격파하곤 했었다.

눈앞의 동상이 그 교수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못하지는 않을 터.

‘하지만 단 한 번만, 한 번만 이기면 된다.’

어떻게 상대를 흔들든 방심하든 한 번만 이기면 됐다.

이한은 횟수로 승부할 계획을 세웠다.

체스도 의외로 변수가 있는 게임인 만큼 백 판쯤 하면 한 번은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참. 미리 말해두겠다. 진다면 페널티가 있다.

“...뭡니까?”

이한은 움찔했다.

음영이 드리워진 동상의 모습이 갑자기 압박감을 풍겨내는 것 같았다.

지면 대가 없이 한 판 더 둬야 한다.

“...그게 답니까?”

생각보다 페널티가 약했다. 동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도전했을 때 또 진다면 그 때는 두 판을 둬야 하지. 그 다음 도전에서도 진다면 세 판을...

‘저 정도로 심심하면 그냥 교수님한테 일을 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이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백색 폰을 잡았다.

*         *         *

킹이 옆으로 눕고 한 판이 끝났다. 이한은 경악했다.

‘투탄타...!’

정말 잘 두는구나.

동상은 감탄했지만 이한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놀랍게도 이한이 이긴 것이다.

그것도 첫 판에!

이쯤이면 동상과 투탄타의 실력을 의심해봐야 했다. 이런 동상 상대로 한 판도 이기지 못하다니.

‘괜히 긴장했다.’

자. 여기. 내가 만든 지도란다.

“감사합니다.”

이한은 동상이 내민 지도를 받아서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물었다.

“한 판 더 두시겠습니까?”

상대가 생각보다 만만하다는 걸 깨달은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이한은 조금 더 뜯어내기 위해 말을 걸었다.

그러나 동상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아니. 오늘은 정말 만족했단다. 너무나도 재밌는 판이었으니.

“......”

덕분에 한숨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고맙구나.

이한은 대체 이번 판의 어떤 부분이 상대를 저렇게 만족시켰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자기가 못 이길 것 같아서 저러는 건 아니겠지?

“예... 잘 되셨군요.”

이한은 떨떠름한 마음으로 축하하고 밖으로 나왔다.

살코가 복도에서 정과 끌로 조그만 조각상을 하나 다듬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왔군.”

살코는 부스러기를 툭툭 털어내더니 이한을 보지 않고 말했다.

귀족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이한이 가진 자존심은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나왔을 테니 상당히 굴욕적이리라.

“이길 때까지 안내해주겠다. 혼자서는 들어가지 못할 테니. 다음에 가고 싶을 때 말하도록.”

“이겼다.”

“...??!?!!”

살코는 귀를 의심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저 짐승 동상의 체스 실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투탄타 가문 내에서 적수가 없었던 살코도 한 번도 이기지 못할 정도였던 것이다.

앞으로 워다나즈와 같이 준비해서 다시 도전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냥 이겼다고?

“정, 정말로?”

“그래. 덕분에 한 숨 잔다고 하더군.”

살코는 한 번 존중하기로 한 상대의 말을 아무 이유 없이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한의 말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워다나즈. 괜찮다면 내가 한 번 확인해 봐도 괜찮겠나?”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이한의 허락을 구한 살코는 다시 복도의 조각상을 수리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정말 동상이 자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살코에게 말했다.

“고맙다. 덕분에 필요로 하던 정보를 얻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살코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존경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한을 쳐다보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표정을 되돌렸다.

살면서 귀족 가문 출신한테 이런 존경심을 갖게 될 줄이야!

살코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돌아섰다.

“돌아가자. 내가 길을 안내해주겠다.”

등을 돌린 살코는 이한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살코를 보는 이한의 눈빛은 처음의 눈빛에서 닐리아를 보는 눈빛 비슷하게 바뀌어 있었다.

*         *         *

이한은 매우 피곤한 표정으로 휴게실의 문을 열었다.

암벽을 뭉쳐서 만든 것 같은 살코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e4로 폰을 올리고 상대가 e5로 맞받아치면 f4로 몰아치는, 투탄타 가문의 장기인 ‘드워프 갬빗’을 너한테 이야기해주고 싶군.

-상대가 폰을 잡으면 나이트를 f3으로 보내는 게 내 특기인데 여기에 대해서...

-저번에 뒀던 경기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거 아나? 엘프 놈들은 e4가 아니라 d4로 폰을 보내고 d5에 c4로 응수하라고 하더군! 미치광이 놈들이지!

돌아오는 길 내내 체스 이야기를 주구장창 해댔던 것이다.

이한은 살코처럼 그렇게 체스에 목숨과 열정을 바친 사람이 아니었다.

살코가 토라질까봐 최대한 성의껏 대답해주기는 했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워다나즈! 돌아왔구나!”

휴게실에서 과제를 하고 있던 친구들이 이한을 보고 반가워했다.

요네르는 다른 학생들과 같이 머리를 맞대고 물약들을 확인해보고 있었다.

저번에 이한과 랫포드가 마차에서 훔쳐낸 상자에 들어 있었던 물약이었다.

우레걸음 교수의 실험실에서 시약들을 건진 덕분에 이런저런 실험이 가능해진 것이다.

“혹시 알아낸 거라도 있어?”

“워다나즈. 우리가 해냈어.”

“??”

요네르 옆에 앉아 있던 학생 한 명이 흥분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기적의 물약을 찾아냈다고!”

“공간이동의 물약이라도 찾아낸 건가?”

이한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러자 학생들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공간이동까진 아니고.”

“그래도 충분히 대단한 물약이야! 보여줄게! 가이난도!”

학생들은 가이난도를 데리고 왔다. 이한은 가이난도의 모습이 평소와는 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지적으로 느껴졌다.

‘뭐지? 가짜 가이난도인가?’

가이난도는 매우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이한에게 고개를 까딱거렸다. 묘하게 한 대 때리고 싶어지는 모습이었다.

“가이난도. <기초 마법의 이해>를 가르치는 분이 누구시지?”

“가르시아 킴 교수.”

“하급 마력 회복 물약을 어떻게 만들지?”

“갈라말두의 밑동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을 새끼손가락 두 마디 크기로 자른다. 동시에 설향초를 손으로 가늘게 찢어야 하는데, 이 때 갈라말두가 마르기 전에 재빨리 찢어야 한다.”

술술 나오는 대답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환호성을 터뜨렸다.

“봤지?? 지혜의 물약이야! 지혜의 물약이라고!”

연금술의 물약 중에서는 마시는 사람의 지능을 일시적으로 올려주는 물약도 있었다.

지금 가이난도의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이 불그죽죽한 색의 액체는 분명 지혜의 물약!

‘잠깐. 이 자식들 가이난도로 테스트를 해본 건가?’

이한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넘기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많았으니까.

“이게 정말 지혜의 물약이라고 생각해?”

이한은 요네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네르는 신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 확신은 못하겠어. 그런데 마신 가이난도의 반응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기는 해.”

“다 확인하고 마신 게 아니었나?”

“아니, 그냥 검증 도중에 와서 마셔버린 거라...”

“......”

이한은 뭐라고 말하려다가 참았다.

‘지혜의 물약이라면 좋긴 하겠군.’

학생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이한도 지혜의 물약이 있다면 쓸 곳이 너무 많았다.

일단 가르시아 교수 시간 때 조금 마시고, 볼라디 교수 시간 때 조금 마시고, 우레걸음 교수 시간 때 조금 마시고, 모르툼 교수 만날 때 조금 마시고, 밀레이 교수 만날 때 조금 마시고...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하던 이한은 반성했다.

물약은 몸에 무해하지 않았다. 언제나 대가를 필요로 했다. 저렇게 마셨다가는 몸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는 지혜가 필요한 일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조금 더 확인해볼까.’

이한은 가이난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14X19는 몇이지?”

“417이지.”

즉시 나오는 대답에 옆에서 듣고 있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러나 이한과 요네르, 아산과 황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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