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화
14에 19를 곱하면 266이 나오지 417이 나오지 않았다. 맞는 게 한 자리도 없었다.
이한은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가이난도. 하급 마력 회복 물약을 어떻게 만들지?”
아까 다른 친구들이 물어봤던 질문.
정말 지혜의 물약이라면 아까처럼 제대로 대답할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갈라말두의 밑동을 잘라내고, 남은 부분을 새끼손가락하고 같이 잘라낸다. 동시에 설향초를 손으로 가늘게 찢어야 하는데...”
아까처럼 차분하고 침착한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었지만 이한은 속지 않았다.
지금 도마 위에 갈라말두의 밑동과 함께 새끼손가락이 잘려나가지 않았는가!
“지혜의 물약이 아니라 자신감의 물약이었군.”
“......”
푸른 용의 탑 친구들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모든 과제와 시험을 쉽게 통과할 수 있었는데!
“하지만 지혜의 물약으로 속이고 흰 호랑이 탑 애들한테 팔면 안 되나?”
“오오...”
“뭘 ‘오오’야. 안 된다.”
이한은 학생들을 말렸다.
황녀가 물약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이한의 말에 눈치를 보고 슬쩍 다시 앉았다.
“어째서?! 워다나즈. 저 자식들이 얼마나 무례하고 건방진 놈들인지 알잖아!”
“저번에도 네 욕을 했다고!”
“나도 안다. 하지만... 잠깐. 무슨 욕을 했지?”
이한은 넘어가려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네가 고학년 학생보다 흑마법을 훨씬 더 잘한대.”
‘그게 욕은 아니지 않나?’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는 알겠지만 욕치고는 좀 너무 약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말을 한 거겠지만 이한에게는 그다지...
차라리 ‘워다나즈는 졸업하면 굶어죽을 걸’이나 ‘워다나즈는 졸업 못 하고 교수들한테 끌려갈 걸’같은 말이 훨씬 더 모욕적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괜찮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 때문에 쓸데없이 분노하지 마라.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호수니까.”
“!”
그 말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했던 과제를 떠올렸다.
해골 교장이 내준 과제였다.
“꼭 호수까지 가야 하나?”
“그냥 과제 하나 정도는 포기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놈들하고 협력해서까지 해야 하다니. 중요한 건 명예지 성적이 아니잖아.”
그 말에 이한과 요네르와 황녀와 아산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이 깜짝 놀란 눈으로 학생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성적이 중요하지 않다는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성적이 곧 명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야.”
“그래. 성적이 곧 출ㅅ... 아니, 명예지.”
이한은 ‘출세를 하려면 성적이 좋아야 한단다’라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여기 있는 놈들은 대체로 ‘성적 안 좋으면 어때, 가문이 있는데 굶어죽겠어?’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만큼 별로 효과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하면 나중에 위험할 거 같다.’
저번에 볼라디 교수와 키르민 교수가 말하는 걸 보니, 왠지 마법학교 안에서 ‘저는 관료가 되어서 출세하는 게 목표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위험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확실하게 자리를 잡고 떠나기 전까지는 숨기는 게 맞을지도 몰랐다.
“미... 미안. 내가 생각이 짧았어.”
별 생각 없이 말을 꺼냈던 친구는 이한과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사과했다.
그렇구나!
성적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구나...!
* * *
‘물약 상자에서 좀 쓸만한 게 나오길 바랐는데.’
이한은 아쉬워하며 호수를 쳐다보았다.
구체적으로 수면 보행의 물약이나, 수중 호흡의 물약 같은 게 나오길 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교장의 과제는 물과 관련해서 엿먹을 일이 있을 것 같았으니까.
물에 빠지거나 물을 먹거나...
하지만 지금 훔친 물약 상자에서 확정된 물약은 제국 서부 포도주(맛있음), 칸투스 물약(노래의 재능을 부여했다), 자신감의 물약이 전부였다.
이한은 진지하게 흰 호랑이 탑 학생들한테 남은 물약들을 조금씩 몰래 먹여볼까 고민했다.
직접 먹여보면 빠를 텐데...
‘근력 강화의 물약이나 거인화의 물약이 있다면 조금 곤란하긴 하겠군. 나부터 죽이러 올 테니.’
이한은 위험성을 생각하고 그만두기로 했다.
역시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물약을 사람 상대로 시험하는 건 윤리적으로 잘못된 일이었다.
“방패여, 펼쳐져라!”
이한은 호수를 향해 주문을 외쳤다.
물 원소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는 물이 근처에 있을 때 훨씬 더 편해지고 강해졌다.
물을 소환하는데 사용하는 마력과 정신력이 대폭 줄어드는 것이다.
...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한은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미숙해서 그런가?’
호수의 물을 사용하든 그냥 불러내서 물을 사용하든 감각적으로는 비슷한 것 같았다.
어쩌면 낮은 서클의 마법을 써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낮은 서클에서는 차이점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높은 서클로 올라갈수록 차이점이 느껴질지도...
이한은 방패 형태로 불러낸 물 덩어리를 이리저리 바꿔가며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모두가 행복한 일요일 아침에 이한 혼자 호수에 와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호수를 건너갈 방법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더럽게 크다.’
몇몇 내륙지방 출신 학생들이 ‘와 여기 학교 안에는 바다가 있나봐’라고 착각한 게 무리가 아니었다.
일단 이한이 있는 쪽에서 호수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
다음 주까지 건너갈 방법을 찾아놔야 했다. 해골 교장은 방법이 없다고 사정을 봐줄 사람이 아니었다.
“나룻배여, 나타나라!”
이한은 자기 나름대로 주문을 바꿔가며 배의 형태를 나룻배의 형태로 바꿔보려고 시도했다.
물로 만들어진 나룻배를 소환해보려고 한 것이다.
가르시아 교수가 있었다면 이 어처구니없는 제자의 시도에 경악했을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쳐도 그렇지, 나룻배의 모양을 유지하는 게 얼마나 난이도가 있는 건지 상상이 가지 않아요?
물로 된 방패를 유지하는 것과, 물로 된 나룻배를 소환해서 호수를 건너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일단 방패와 나룻배는 그 크기와 밀도가 달랐다.
당연히 필요한 마력도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났다.
게다가 아무리 나룻배의 구조를 단순하게 잡는다 하더라도 방패와는 차원이 다른 복잡함.
거기에 그냥 공중에 띄우면 되는 방패와 달리 계속해서 물 위에서 형태를 유지하게 만들어야 했으니...
이한도 그 사실을 머지않아 깨달았다.
역시 물로 된 나룻배를 소환하는 건 효율이 좋지 않았다.
‘확실히 애매하군. 이걸 호수 위에 띄웠을 때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호수 속에서 몬스터나 해골 교장이 뛰쳐나와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럴 경우를 생각해봤을 때, 물 나룻배는 무리였다.
‘소환에 성공한 게 아쉽지만 포기해야겠다.’
이한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소환에 성공한 물 나룻배를 호수 위로 풀어버렸다.
다시 한 번 가르시아 교수가 있었다면 경악했을 광경이었다.
-그걸 그렇게 성공했는데 풀어버리면 안 되죠!
‘역시 부여 마법인가?’
물약도, 물 나룻배도 안 된다면 그 다음은 부여 마법이었다.
아이템이나 물질, 생명체에게 직접 새겨서 효과를 유지시키는 계열의 마법.
수면 보행의 마법이나 수중 호흡의 마법도 부여 마법에 들어갔다.
문제는 이한이 부여 마법을 아직 간접적으로밖에 배우지 않았다는 사실.
<기초 제국 기하학과 산술> 같은 강의에서 활용 방법을 배우긴 했지만 아직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는다 하더라도 1학년 때 바로 수면 보행의 마법이나 수중 호흡의 마법을 익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고...
‘흑마법은 이럴 때도 쓸모가 없군. 연금술이나 부여 마법은 실생활에 밀접하게 도움이 되는데.’
이한은 모르툼 교수가 눈물 흘릴 생각을 했다.
‘번개의 정령도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군. 우레걸음 교수가 부리는 얼음의 정령은 평소 식재료와 시약 보관도 도와주는데... 이럴 때도 물을 얼려서 길을 만들 수 있었겠지.’
이한은 이어서 페르쿤트라가 울컥할 생각을 했다.
‘마법이란 건 어떻게 보면 참 약한...’
“조심해!”
“걱정할 것 없어. 자. 천천히 밀어보자.”
“?”
수풀 너머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이한은 자세를 낮추고 접근했다.
놀랍게도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이 나룻배 비슷한 걸 만들고 있었다. 잘 모르는 이한이 봐도 대충 다 완성된 상태라는 걸 알 정도였다.
“!”
“이대로 띄워도 되나?”
“물론이지. 몇 번이고 해봤어.”
염소 수인족, 앙라고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기사들에게 가끔 기나긴 휴식이 주어지면 앙라고는 부모를 따라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 배를 타고 바다를 돌아다니곤 했었다.
작은 나룻배를 만져본 경험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만들 자신도 있었다.
“띄워서 확인되면 돌아가서 말해주자고!”
“그래!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잠깐... 아예 섬까지 가는 길을 찾아버리면?”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데. 모라디도 좋아할 거야.”
앙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라디나 다른 학생들이 감탄하는 것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그 워다나즈 녀석이 존경과 분함이 섞인 눈으로 자신을 쳐다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짜릿했다.
-큭. 앙라고 알파. 널 인정한다. 나도 아직 찾지 못한 길을 먼저 찾아내다니. 너는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군. 널 얕잡아 본 난 멍청했고...
모든 사악한 마법을 깨우친 워다나즈라 하더라도 이런 항해의 지혜까지는 알고 있지 못할 것이다.
부스럭-
수풀에서 뭔가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이한이 지팡이를 들고 나타났다.
“이봐.”
이한이 부르자 앙라고와 친구는 본능적으로 양 팔을 들어올렸다. 자신들에게 겨눠진 지팡이가 마치 칼끝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이.... 이 자식...!”
“비겁하게...!”
앙라고는 뿔이 떨릴 정도로 억울해했다.
며칠 동안 밤잠도 아껴가며 만든 나룻배였다.
‘바포메트’라는 이름까지 지어주면서 열심히 만든 나룻배였는데, 지팡이 든 날강도한테 이렇게 뺏기게 될 줄이야.
마음 같아서는 덤비고 싶었지만 저번에 이한이 보여준 마법을 생각하면 쉽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검을 뽑고 달려드는 것보다 이한의 지팡이가 먼저 휘둘러질 것 아닌가.
“내 나룻배를! 내 나룻배를 이렇게...!”
“움직이지 마라.”
경고를 날린 이한은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왜 협박을 하고 있지?’
애초에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앞에 나선 것도 어떻게 항해를 할 생각인지, 어떻게 길을 찾을 것인지 물어보려고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강도라도 만난 것마냥 양 팔을 들어 올리니 이한도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지 마라’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습관이란 실로 무섭구나!
“아니지.”
이한은 지팡이를 내렸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너희 나룻배를 뺏으러 나온 게 아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물어보려고 온 거지.”
“그... 그래??”
“하지만 지팡이를 겨누고 나룻배를 내놓지 않으면 저주를 걸겠다고 협박했잖...”
말하던 앙라고는 생각해보니 그런 적이 없다는 걸 기억해냈다. 너무 당황해서 착각한 것이다.
“오해가 있었군.”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얌전히 팔을 내렸다. 이한도 못 본 척 고개를 끄덕여줬다.
“오해가 있었다.”
“내가 만든 나룻배에 관심이 있어서 나온 거란 말이지?”
“그래. 그런데...”
이한은 말하다가 새삼스럽게 앙라고를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만든 배라고?
‘가이난도가 만든 배보다 더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왜?”
앙라고는 이한의 무례한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의아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