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셋은 다시 모래사장 앞에 모였다.
지금 이 지옥의 섬, 아니, 해골 교장의 섬에 난파되어 오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기 위해서였다.
이한은 먼저 물었다.
“혹시 배를 다시 만들 수 있나?”
“......”
앙라고는 고개를 저었다.
작은 나룻배를 만들더라도 생각보다 필요한 게 많았고 손이 많이 들어갔다.
원래도 다른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도와줘서 만들 수 있었던 거였지 앙라고 혼자서는 힘들었다.
“자력탈출은 힘들겠군...”
“미, 미안하다.”
“됐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하나 있다.”
이한이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앙라고와 듀크마는 긴장했다.
이 모래사장을 지배하는 언데드도 쓰러뜨린 워다나즈였다.
대체 어떤 것 때문에 저렇게 말하는 걸까?
“뭐... 뭐지?”
“이러다가는 내일 수업을 빠지게 생겼군.”
“......”
“......”
둘은 처음에는 워다나즈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한은 매우 진지했다.
“농... 농담이 아니었나?”
“지금 내가 농담하는 걸로 보이나?”
“아, 아니. 미안하다.”
“이... 이런 상황이면 수업은 빠져도 되지 않나?”
듀크마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물었다. 이한은 살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수업을 빠져서는 안 된다. 알겠나?”
성적은 목숨보다 중요했다.
이한의 박력에 두 학생은 머리로는 몰라도 가슴으로는 이해했다.
정말로 중요하긴 한가보다!
왜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알... 알겠다.”
“나도 사과하겠다. 하지만 워다나즈, 내일 수업을 들으러 갈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주말의 저녁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내일 아침이 되면 새로운 한 주가 찾아오고 수업들이 시작될 터.
그 사이에 탈출할 수 있을까?
“너희들이 사라진 걸 눈치채고 구출하러 올 놈들은?”
이한은 둘을 보며 물었다.
여기서 배를 만들어서 나가는 것보다, 밖에서 오는 걸 기다리는 게 더 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둘은 고개를 저었다.
“눈치 채더라도 바로 구하러 오지는 못해.”
“배도 없을 테고...”
“흰 호랑이 탑은 기사들이 모인 곳이면서 왜 이렇게 단결이 안 되나?”
이한은 꾸짖듯이 말했다.
둘은 매우 억울해졌다.
그건 단결하고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다행히 월요일 오전 강의가 <기초 마법 인성 교육>이긴 한데...”
이한은 생각에 잠겼다.
해골 교장의 강의가 내일 있다는 건 어떻게 보면 행운이었다.
만약 강의 시간에 해골 교장이 ‘섬에 가서 외출권을 찾아온 놈들이 있나? 없다고? 안 되겠군. 내가 기회를 줄 테니 이번 시간에는 섬에 가서 외출권을 찾아와라’라고 말한다면, 이한 일행은 가만히 있어도 구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해골 교장이 그럴까?’
해골 교장 성격에 다들 과제를 못해왔다고 ‘내가 조금 도와줘야겠군’이라고 말할까?
그보다는 ‘그것도 못하나? 더 열심히 해오도록’같은 말이 나오는 게 더 가능성 높아보였다.
이한이 생각에 잠긴 동안 앙라고가 무릎을 쳤다.
“그렇군! 강의가 시작될 때까지 없으면 우리가 사라졌다는 걸 다들 확실히 눈치챌 테고, 그러면 교장 선생님께서도 우릴 구하러 오시겠지! 그 때까지만 버티면...”
“아니. 그냥 바로 섬을 탐색해야겠다. 자력으로 탈출해야겠군.”
“......”
“......”
이한의 반응에 둘은 아연실색했다.
“구하러 올 수도 있지 않... 나?”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강의 때까지 학생이 없으면 걱정되서라도...”
“그럴 리는 없다.”
이한은 더더욱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둘은 시무룩해졌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다.’
마법학교에 들어온 이상 앙라고나 듀크마도 이제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된 것이다.
밖에서 구출이 올 리 없는 이상 여기서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한은 해골 교장이 준비한 다른 것들을 뒤져볼 생각이었다.
‘외출권과 거기까지 가는 시련을 준비해놨을 테니 분명히 다른 것들도 있을 거다.’
아니면 최소한 가져간 나룻배라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테니 찾아야 했다.
꼬르륵-
“......”
이한은 시선을 돌렸다. 앙라고가 부끄럽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배가 고프겠지. 그렇게 움직였으니. 뭘 좀 먹고 하는 게 낫겠다. 먹을 게 있나?”
이한의 질문에 둘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럼 식사를 하고 움직일까.”
말과 함께 이한은 배낭에서 빵과 통조림을 꺼냈다.
앙라고는 배낭에서 나무껍질을 꺼냈다.
이한은 순간 앙라고가 그릇 대용으로 꺼낸 줄 알았다.
그러나 앙라고는 하얀 나무껍질을 쥐더니 듀크마에게 말했다.
“듀크마. 물 끓이자. 삶아서 먹게.”
“잠깐. 잠깐.”
“?”
앙라고와 듀크마는 왜 그러냐는 듯이 이한을 쳐다보았다.
이한은 나무껍질을 보며 물었다.
“...그걸 먹나?”
앙라고는 씩 웃었다. 약간의 자부심이 섞인 웃음이었다. 이한이 모르는 걸 자기가 알고 있다는 것이 상당히 기쁜 모양이었다.
“워다나즈. 이 나무의 속껍질은 먹을 수 있다. 푹 삶아서 먹으면 제법 부드럽고 단맛이 난다고.”
“......”
몰라서 물은 게 아니야!
이한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먹을 게 없어도 그렇지 나무껍질을 벗겨서 삶아 먹다니.
“흰 호랑이 탑에서는 사냥으로 고기를 구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고기를 구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양이 부족하지.”
“워다나즈. 잘 모르는 모양이군. 사냥을 한다고 다 잡히는 게 아니라고. 게다가 보존하기도 꽤 어렵지. 대부분은 잡는 대로 먹어야 하니 이런 비상식량에는 어울리지 않아.”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자기들만 아는 게 나와서 의기양양하게 설명하자, 이한은 한 대 패려다가 말았다.
이한도 사람인 이상 저들이 좀 불쌍했던 것이다.
“...내가 갖고 온 게 있으니까 같이 먹자.”
“!”
“정, 정말인가?”
“그 토마토 채소 스튜를?”
워다나즈가 만들었다는 토마토 채소 스튜는 벌써 전설이 되어 있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도 들어봤을 정도였다.
“아니... 호숫가 나오면서 토마토 통조림을 갖고 다니지는 않지. 채소를 갖고 다니지도 않고. 나도 간단하게 나 먹을 것만 갖고 와서 양이 부족하다. 근처에서 더 찾아봐야 해.”
이한의 말에 둘은 살짝 실망했다.
하긴 생각해보니 워다나즈도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누가 호숫가에 정찰하러 나왔다가 섬에 표류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겠는가.
이한은 가죽 배낭에서 냄비, 올리브기름이 담긴 유리병, 버터, 소금, 후추, 달걀, 살짝 딱딱하게 굳은 흰 빵, 절인 베이컨을 꺼냈다.
그걸 본 둘은 어이가 없었다.
‘간단하게 자기 먹을 것만 갖고 왔다면서...!’
‘푸른 용의 탑 자식들 진짜 얼마나 잘 먹고 사는 거야?’
한 번도 흰 호랑이 탑에 배정된 게 부끄럽거나 아쉽지는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솔직히 조금 부러웠다.
저걸 대체 어떻게 확보한 거지?
“역시 부족하군.”
“아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
“아까 보니까 먹을 수 있는 버섯이 있던데, 좀 챙겨야겠군.”
이한이 일어서자 둘도 따라 일어섰다.
“왜 일어나지?”
“아까 네 팔이 되어주겠다고 했었지 않나.”
“너 혼자 보낼 수는 없지.”
둘은 제법 비장하게 말했지만 이한은 냉정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버섯 구분할 줄 아나?”
“...세 번 중 한 번은 맞췄...었던 것 같은데. 저번에.”
“우리 중 두 명은 죽겠군. 됐다. 내가 말하는 걸 캐기나 해라.”
버섯 캐기의 핵심은 아는 것만 캐는 것이었다.
조금 이상하다 싶거나 조금 불길하다 싶으면 아는 버섯 같아도 캐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걸 아는 이한은 아주 안전한, 확실하게 정체를 아는 버섯만 골라서 캐내라고 말했다.
“저 갈색 버섯을 캐라.”
“저건 캐지 마.”
“그건 버려라. 이상하군.”
팔을 다친 이한을 대신해서 열심히 버섯을 캐던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작업을 진행하면서 슬슬 자신감이 붙었다.
이쯤이면 우리도 버섯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색이 탁하고 투박한데 안전한 버섯 아니야?”
“네 입에 넣어버리기 전에 버리도록.”
“......”
앙라고는 얌전히 버섯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러나 듀크마는 영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자꾸 자신만의 창의적인 시도를 하려고 들었다.
“혹시 이 버섯은...”
“이건 먹어도 될 것처럼 생겼는데. 어렸을 때 식탁에 나온 것 같이 생겼다.”
“아까 캔 것과 모양이 비슷한데 이거, 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버섯 캐기의 고수가 되기 위해 열심히 걸음마하는 듀크마를 보고, 이한은 응원하기 위해 말해줬다.
“그래. 그 버섯은 먹어도 된다. 단 한 번만 먹을 수 있는 버섯이지만.”
“오... 잠깐, 왜 단 한 번만 먹을 수 있는 거지?”
“먹으면 죽을 테니까.”
“......”
듀크마도 얌전히 버섯을 옆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이한이 캐라는 버섯만 조용히 캤다.
* * *
준비를 끝낸 셋은 모닥불을 만들었다.
이한이 마법이 아니라 부싯돌로 불을 만들자 앙라고는 의아해했다.
“왜 부싯돌로?”
“워다나즈는 요리의 맛을 생각하는 거지. 마법으로 만든 불보다 직접 손으로 피운 불이 더 요리에 좋다고 할머님한테 들었다.”
‘그랬나?’
이한이 부싯돌로 불을 피우는 이유는 간단했다.
불 잘못 불러냈다가 이 두 학생을 태워버릴 수도 있어서였다.
설명하는 대신 이한은 팬에 버터와 기름을 두르고 뜨겁게 달궜다.
버섯을 맛있게 요리하는 비법은 충분한 인내심을 가지고 뜨겁게 요리하는 것이었다. 섣불리 버섯을 던져 넣었다가는...
‘...그런데 정말 입학하고 나서 요리 실력이 너무 좋아진 것 같군.’
농담이 아니라 요리 실력이 마법 실력보다 더 좋아진 기분이었다.
매일 한정된 재료로 어떻게 메뉴를 다양하게, 맛있게 만들까 고민하다보니 좋아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적당한 자본과 후원만 있다면 마법사보다 요리사가 더 괜찮은 선택지일수도...
치이익!
팬 위에 올라간 버섯들이 기름과 버터를 빨아들였다.
이한은 솜씨 좋게 버섯을 굴려서 옆으로 치우고 남은 기름에는 굳은 빵을 작게 잘라서 올렸다.
모든 과정이 끝나자 알뜰하게 달걀까지 깨서 넣는 모습에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자식들, 아까 언데드 소환수 쓰러뜨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더 감탄하는 것 같군.’
“먹자.”
이한은 소금을 버섯과 빵, 달걀 프라이 위에 뿌려서 간을 맞췄다.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뱃속에 음식들을 쑤셔 넣었다. 구워진 버섯들은 바삭했고, 딱딱해졌던 빵은 기름을 먹어서 촉촉해졌다.
앙라고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런 식사를 다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도 그래. 앙라고. 평생 못 먹게 될 줄 알았지...”
‘너희 들어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다.’
조금 심하게 감상적으로 변한 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을 보며 이한은 말없이 음식을 집어삼켰다.
울먹이는 건 울먹이는 거고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열심히 집어먹었다.
순간 뒤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이한은 들고 있던 그릇을 바로 옆으로 집어던지고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앙라고는 던져진 그릇을 자신도 모르게 몸을 던져서 받아냈다.
“누구냐?”
수풀을 뚫고 나타난 것은 물의 정령이었다.
물의 정령은 하라는 시련은 안 하고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신입생들한테 화가 난 모양이었다. 몸을 불규칙하게 부풀리며 다가왔다.
당장이라도 공격하겠다는 징조였다.
이한도 지팡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찬가지로 당장 공격하겠다는 징조였다.
그리고 이한이 한 발 빨랐다.
“몰아쳐라...”
이한이 주문을 다 외우기도 전에 물의 정령은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