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앙라고, 뭐하는 거냐!”
“듀크마. 내가 희생하겠다.”
앙라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물론 저 워다나즈 놈이 저지른 사악한 일들은 절대론 용서할 수 없지만...”
‘이 자식들, 너무 끈질기군.’
이한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슬슬 과거의 원한을 잊을 때도 된 것 같은데!
“...이번에 워다나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던전에 갇혀 있었을 거다. 그것까지 부정할 순 없다. 이번 외출권은 워다나즈에게 양보하고, 다음 외출권을 내 힘으로 손에 얻겠다.”
“앙라고. 네가 보여준 고결함이, 나로 하여금 널 존중하게 만든다. 나도 함께하겠다!”
말리려고 했던 듀크마도 앙라고의 말에 설득되었다.
이 셋 중 한 명만이 외출권을 가져야 한다면, 그건 푸른 용의 탑 개자ㅅ, 아니, 탑의 워다나즈여야 했다.
이한은 처음으로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양심 있는 모습을 보여주자 적잖이 감동했다.
‘이 자식들도 양심이 있긴 하군.’
없는 줄 알았는데!
이한은 흔쾌히 ‘그러면 어서 들어가라’라고 외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물의 정령이 다급하게 이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
물의 정령은 말리라는 듯이 허둥지둥대며 손짓발짓했다.
이한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정령의 다급함만은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알겠다. 샘솟아라!”
물 구슬이 빠르게 날아들고 달려가던 흰 호랑이 탑 친구들을 넘어뜨렸다.
앞으로 넘어진 둘은 흙 위로 굴렀다. 두 학생은 황당한 표정으로 이한을 쳐다보며 외쳤다.
“뭐하는 거냐, 워다나즈?!”
“이게 무슨 짓이냐!”
일단 넘어뜨리고 봤는데, 막상 넘어뜨리고 나서 꼴을 보니 좀 심하게 넘어뜨린 것 같았다.
‘정령이 말리라고 해서 넘어뜨렸다고 하면 발광할 것 같은데...’
이한은 둘을 달래기 위해 다른 이유를 생각했다.
언제나 좋은 건 명예였다.
“명예로운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은 내가, 다른 사람의 희생으로 얻는 외출권을 받아들일 것 같나?”
“...!!!”
둘이 충격을 받아서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이한은 작은 목소리로 물의 정령에게 속삭였다.
“만약 쓸데없는 이유로 멈추라고 한 거면 널 저 안에 가둬버리겠다.”
물의 정령은 이한의 말에 벌벌 떨며 설명에 나섰다.
기둥을 가리키고, 학생을 가리키고, 몸에서 양손을 만들어서 X자를 그렸다.
이한은 직감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설마, 학생을 넣어도 안 열린다는 건가?”
물의 정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한은 경악했다.
나름 해골 교장의 머릿속을 읽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해골 교장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뭐 이런 새끼가 있지?
여기서 사람을 넣어도 안 열린다고??
‘이제까지 어떻게 암살을 안 당한 걸까?’
이한은 천천히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별다른 함정이 주변에 없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서로 싸우고 난 다음 한 명이 가둬지고, 그 다음에도 제단이 열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으려면 주변에 함정이 없는 게 좋았다.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분명 열 방법이 있을 거다.”
“워다나즈...”
앙라고는 이한의 말에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감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이한은 제단에 대고 저번에 흰 호랑이 탑에서 했던 것처럼 강력하게 마력을 퍼부어보았다.
꽝!
소리로는 들리지 않는 강력한 마력의 충돌음이 퍼져나갔다. 물의 정령은 깜짝 놀라서 엎드렸다.
“이, 이건?! 대체...?!”
“마력을 사용해서 걸려 있는 마법을 해제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군.”
듀크마는 아쉬워했다.
그리고는 멈칫했다.
‘...잠깐, 워다나즈 이 놈 저번에 이걸로 침입한 거 아니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아직도 워다나즈가 자기 친구들을 데리고 휴게소를 뚫은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입구의 마법을 뚫은 걸까?
그런데 지금 보니 설마...?
이한은 제단을 두드려보고, 마력을 흘려보내서 구조를 탐색해보고, 마력을 발사해서 흔드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다.
그러나 제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쯤 되자 이한은 의심이 들었다.
‘방어 마법을 걸어 놓은 게 아닌 건가?’
이제까지 경험했던 것처럼 방어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면 이렇게 아무 반응도 없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교묘하고 섬세하게 걸어도 그렇지 너무...
잠잠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해골 교장의 마법 실력이 정말 뛰어나고 그에 비해 본인의 실력이 부족해서 이런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이한은 한 번 시험해봐서 나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다들 비켜봐라.”
“?”
이한이 평소보다 몇 배는 거대한 물 덩어리를 띄운 것도 모자라 그걸 천천히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하자 흰 호랑이 탑 학생 둘은 당황했다.
“좀 더 떨어지는 게 좋겠군.”
“???”
잘은 모르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둘은 천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물의 정령은 이한이 말하기도 전에 훨씬 더 거리를 벌린 상태였다.
* * *
꽝!
볼라디 교수가 지금 회전 속성에는 욕심내지 말라고 했지만, 교수의 본분이 학생들을 괴롭히는 것이라면 학생의 본분은 교수의 말을 듣지 않고 반항하는 것이었다.
이한은 그에 따라 충실히 볼라디 교수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한 번 수옥탄을 완성시켰다.
수십 분이 넘게 걸렸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회전하며 작렬하는 물의 덩어리는 그대로 제단과 충돌해서 박살을 내버렸다.
앙라고와 듀크마는 굉음에 화들짝 놀라서 몸을 낮췄다. 거리를 벌렸지만 이 정도 위력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단을 파괴하는 건 물론이고 주변을 아예 박살내버리는 위력.
‘대체 저게 무슨 마법이지??’
둘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한이 물 원소 마법을 쓰는 건 몇 번 보았지만 저 정도 마법을 쓰는 건 처음 보았다.
분명히 가르시아 교수 밑에서 같이 마법을 배웠는데 저 마법은 대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도서관에서 금단의 마법을 찾았나?’
‘워다나즈 가문에 내려오는 비전이겠군!’
이한은 피곤한 표정으로 비틀거렸다.
마력은 넘쳐나도 수십 분 넘게 마법 하나에 집중해서 신경을 혹사시킨 것이다.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스르르륵!
그 때 이한의 품속에 있던, 해골 교장이 선물한 검은 책이 마치 스스로 살아있는 것처럼 흘러나왔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열리더니 저번처럼 페이지를 열고 글자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뇌에 직접 지식을 때려 박을 때 느껴지는 충격.
그 충격이 사라졌을 때, 이한의 머릿속에 남은 새로운 마법의 지식은 <고나달테스의 날카로운 손>이었다.
마법사의 손에 섬뜩한 날카로움을 부여하는 2서클 육체 강화 마법!
...을 왜 지금 주지?
‘뭐하자는 거냐?’
이한은 검은 책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지만, 검은 책은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이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들어가 버렸다.
‘뭐지? 무식하게 부쉈다고 비웃는 건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그럴 수도 있다는 게 무서웠다.
이한은 이 검은 책이 사악한 마도서가 아니라고 100% 확신할 수가 없었다.
“워다나즈. 괜찮...?”
“괜찮다. 가서 외출권 찾아봐라.”
이한은 앙라고한테 한 말이었지만 물의 정령이 후다닥 앞으로 뛰쳐나갔다.
표범 뼈 소환수는 그런 물의 정령을 보고 화난 듯 바닥을 쳤다.
“......”
이한은 물의 정령한테 오해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피곤해서 기운이 나질 않았다.
파다닥-
물의 정령은 공손히 외출권을 찾아서 바쳤다.
제단이 박살나는 탓에 먼지가 좀 묻어 있긴 했지만 멀쩡한 외출권이었다.
“해냈어, 워다나즈! 네가 해냈다고!”
“그 수많은 함정에도 굴복하지 않고 해냈다고!”
둘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물의 정령도 눈치를 보다가 박수를 쳤다.
이한은 외출권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저번에 받은 것과 똑같은 형식의 외출권이었다.
다음 외출권을 갖고 있는 학생에게 하루 외출을 허락한다는 문구와 교장의 서명이 담겨 있는 직사각형 형태의 종이.
“저기 평평한 바위 좀 갖고 와라.”
“왜 그래, 워다나즈?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좀 쉬고 해도 되잖아!”
“아니. 지금 할 거다.”
이한은 배낭에서 깃펜과 잉크병 몇 개를 꺼냈다.
처음 외출권을 사용했을 때, 이한이 가장 아쉬웠던 건 마차를 쓸 수 없는 것도 아니었고 소환수를 부릴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이한이 가장 아쉬웠던 건 외출권을 위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짜 외출권도 그냥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걸맞은 재질로 만들어진 종이가 필요했고 여러 색의 잉크가 필요했다.
이한은 밖에서 물자를 사들일 때 필요한 걸 세심하게 구해뒀고, 구하지 못한 건 우레걸음 교수의 실험실에서 마저 챙겼다.
언제 어디서라도 외출권을 손에 넣으면 가짜를 만들기 위해서.
“...설... 설마?”
“지금 설마??”
앙라고와 듀크마는 경악했다.
처음에는 부정했었지만, 아무리 봐도 저건 그거였다.
‘위조잖아, 워다나즈!!’
‘대체...?!!’
이한은 엄숙한 장인(匠人)의 표정이 되어 바위 위에 작업 도구를 나열했다.
하도 분위기가 진지해서 둘은 말도 걸 수 없었다.
“움직여라.”
이한의 주문에 깃펜이 살짝 날아올랐다. 원래 깃펜을 움직이는 데에 쓰이는 마법이 드디어 제 용도를 찾은 셈이었다.
원래는 <하급 조종>을 실제 사람 손보다 세밀하게 사용하려면 어마어마한 숙련이 필요했지만 이한에게는 이미 끝난 이야기.
볼라디 교수의 마법전투론이 지금 제자의 손끝에서 외출증 위조로 피어나고 있었다.
눈앞에서 정말로 가짜 외출증이 슥슥 완성되는 모습에 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터무니없는 수염이시여!”
“이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
* * *
이한과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호수 위의 섬에 조난됐을 때, 다른 탑의 학생들은 각자 자신들의 할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중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휴게실에 남아 책을 뒤져가며 남은 물약들을 어떻게든 알아내려고 했다.
“아... 그 물약을 다시 주면 내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다시 주면 안 돼?”
“누가 가이난도 좀 묶어 놔.”
“워다나즈는 어디 갔어?”
“호수 확인하러 갔어. 점심은 우리끼리 알아서 차려 먹으래.”
이한은 휴게실 모닥불 앞에 재료까지 골라놓고 갔다.
재료들을 본 학생들은 살짝 두근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하인들이 만들어 준 식사만 하다가 직접 이렇게 요리할 기회가 오자, 갑자기 없던 창의성이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혹시 내가 파이를 만들어 봐도 될까?”
“괜찮지. 무슨 파인데?”
“예전에 책에서 읽은 건데, 생선을 넣어서 굽는 파이가 있더라. 맛있어보였어.”
“넌 탈락이야.”
“어째서!?”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그래도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즐겁게 요리를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한이 오질 않았다.
“워다나즈 왜 안 와?”
“가이난도 이 자식. 네가 워다나즈 기분 나쁘게 한 거 아니야?”
“아, 아니야! 과제 결국 내 힘으로 다 했다고!”
“어제 저녁 먹을 때 떠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조용히 감사하면서 먹어야 하는데 예의 없게 행동해서...”
“크읏...”
마치 일 나간 부모님이 늦게까지 오지 않을 때처럼, 학생들은 불안해했다.
“안 되겠다. 호숫가 다녀올게.”
“나도. 같이 가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모여서 우르르 호숫가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출발한 이한이 호숫가에 보일 리 없었다.
혹시라도 이한이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이때부터 슬슬 겁먹기 시작했다.
“주변을 찾아봐!”
“혹시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으니까 물어보고!”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각자 흩어져서 탐문을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 몇몇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이 사라졌다고?”
“이 빌어먹을 텅텅 빈 깡통 대가리 놈들이?!”
“왜 그래?”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워다나즈를 납치했대!”
“흰 호랑이 탑 놈들이? ...어? 그게 가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