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요네르는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이 이한을 납치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했다.
그게 가능한가 싶었던 것이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던 랫포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아니, 가능해.”
닐리아는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근심 때문에 긴 귀는 양 옆으로 축 가라앉아 있었다.
“가장 영리한 짐승도 함정에 빠질 때가 있잖아.”
“저기, 이한이 짐승은 아닌...”
“만약에 흰 호랑이 탑 비겁자들이 워다나즈가 다니는 길에 덫을 놓았다면? 혹은 워다나즈가 마시는 물에 독을 탔다면? 혹은 워다나즈가 먹는 빵에 약을 넣었다면? 혹은...”
“......”
“......”
요네르와 랫포드는 닐리아를 어떻게 말려야 할지 고민했다.
저러다가 이한의 무덤을 미리 파려는 것 아닐까?
더 큰 문제는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닐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림자 순찰대 출신 사냥꾼이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정말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겠는데...”
“내가 계산해보니 90% 확률로 흰 호랑이 탑 놈들이 납치한 것 같아.”
“이 자식들, 죽여 버리겠어!”
“다들 진정해. 진정하고 침착하게 어떻게 죽일지 계획을 짜자고.”
요네르는 어떻게든 말리려고 다른 학생들을 찾았다.
‘황녀님은...’
그러나 어느새 황녀도 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진지한 표정으로 흰 호랑이 탑 학생들 공격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요네르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한이 없으니 탑에 말이 통하는 정상인이 없었던 것이다.
‘어서 돌아와...!’
* * *
월요일 아침, <기초 마법 인성 교육> 강의는 평소보다 훨씬 더 분위기가 살벌했다.
물론 원래 <기초 마법 인성 교육> 강의는 좋은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들 무덤에 끌려온 것마냥 침울한 분위기를 풍기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달랐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듯이 눈빛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워다나즈가 어디 있는지 말하지 못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냐, 푸른 용 자식들아! 우리가 그런 짓을 했을 것 같냐? 우린 그런 짓을 안 한다!”
“세 명이서 한 명한테 덤벼드는 주제에 무슨!”
아픈 곳을 찔린 흰 호랑이 탑 학생 한 명이 얼굴을 붉혔다.
그 반응에 푸른 용의 탑 학생이 지팡이를 위협적으로 흔들며 다가왔다.
바로 저주를 날릴 기세였다.
“워다나즈가 있는 곳을 말해!”
“우리도 지금 두 명이 사라져서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너희들이 납치한 거 아니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의 반응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격분했다.
감히 고귀한 핏줄을 이은 그들의 명예를 무시하다니.
“우리? 우리가?? 가문의 명예를 알고도 감히 그런 소리를?”
“밤에 남의 기숙사 탑에 침입하는 놈들이 무슨.”
지젤이 비웃듯 말했다.
이번에는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이 아픈 곳을 찔렸다.
그러나 지젤이 예상하지 못한 상대도 있었다. 가이난도였다.
“우린 그런 적 없는데?”
“......”
“증거 있어? 증거 있으면 갖고 와봐. 우리가 했다는 증거 있어?”
“...저 자식 황족 맞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수군거렸다.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 중에서도 저 정도로 뻔뻔한 새끼는 없었던 것이다.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정말 워다나즈를 납치했다면 서로 돌려주고 화해하는 게 낫지 않겠나? 곧 수업이 시작한다.”
검은 거북이 탑의 드워프, 아니, 엘프 학생 살코가 입을 열었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어디서 끼어드냐는 듯이 눈썹을 찌푸렸지만 살코의 뒤에 서있는 검은 거북이 탑 학생들도 밀리진 않았다.
다들 험상궂은 성장 배경을 갖고 있는 만큼 기사 가문 출신이라고 겁부터 먹지는 않는 것이다.
불사조의 탑 학생들도 입을 열었다. 시아나 사제와 티질링 사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워다나즈 가문의 이한 님을 납치하셨다면 돌려주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세 탑 학생들에게 모두 의심을 받자, 흰 호랑이 탑 학생들은 버티지 못하고 울분을 터뜨렸다.
지금 그들도 두 명이 사라져서 ‘워다나즈가 납치한 거 아닌가?’ ‘설마 두 명이 있었는데?’ ‘그런데 세 명이서 덤벼도 졌잖아’같은 대화를 밤새 나누고 왔는데...
이 비열한 푸른 용의 탑 놈들이 분위기를 이상하게 몰고 있었다.
지젤이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흰 호랑이 탑 학생들 대부분을 이끄는 엘프는 지금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데, 우린 워다나즈의 손끝도 건드리지 않았다. 믿지 못하겠다면 여기 다른 학생들한테 물어봐. 그쪽과 친분이 있는 학생들도 있을 테니까.”
황녀 아덴아르트의 추종자인 로웨나나, 그나마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뽑히는 더르규 등 흰 호랑이 탑 학생들 중에서도 따로 노는 학생들이 있었다.
시선이 쏟아지자 로웨나가 신중하게 대답했다.
“황녀님. 제가 보기에는... 납치 계획이나 그런 건 없어 보였습니다.”
그 말에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의 시선이 황녀에게 쏠렸다. 황녀는 차갑게 고개를 흔들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황녀님?! 황녀님?!?”
로웨나는 모시던 황녀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푸른 용의 탑 학생들은 기세등등해져서 외쳤다.
“믿지 못하겠다잖아!”
“역시 수상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군. 초이 가문의 더르규! 네 의견도 듣고 싶다. 어떻게 생각하지?”
지젤도 지지 않겠다는 듯이 더르규에게 물었다.
“그래. 말해봐. 어떻게 생각하는데?”
더르규는 지젤의 목소리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서늘해졌다는 걸 깨달았다. 극도로 분노한 것이다.
다른 탑 학생들이 없었다면 욕설과 함께 쌍검이 뽑혀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 생각에... 일단 납치 계획이나 그런 건 듣지 못했다.”
“거 봐라!”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잖아!”
상반된 반응이 오고 갔다. 지젤은 더르규를 보며 물었다.
“내가 지금 내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는데 믿지 못하는 건 아니겠지?”
“......”
더르규는 살짝 망설였다.
원래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더르규였다면 지젤이 저렇게 말했을 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믿을 수밖에 없군’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법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워다나즈 가문 같은 명문가 출신의 이한도 자기 가문 이름을 마구 남용하는데, 지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또 없었다.
“...초이! 너 진짜...!”
지젤이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로 따지려 드는 그 순간 강의실에 공기가 차가워졌다.
모든 학생들이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아침이다! 뭘 하고 있었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서로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서로에게 단단히 화가 난 학생들이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해골 교장 앞에서 있었던 일을 다 털어놓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이 지옥 같은 학교에도 나름의 암묵적인 규칙이 있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는 바로 ‘해골 교장 앞에서는 서로 입을 다물기’였다.
싸우고 있었던 것 같은데? 더 싸우지 그러냐?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저희가 얼마나 사이가 좋은데요?”
해골 교장은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던 학생들도 화해하고 싶게 만들어지는 동작이었다.
재미없는 놈들 같으니. 알겠다. 그래서 외출권은 갖고 왔나?
불편한 침묵. 해골 교장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실망이 크군. 아무도 없다니! 너희 선배들은 이런 과제를 주면 제 때 제 때 다 해왔다.
이한이 있었다면 ‘다들 저런 개소리에 속지 마라’라고 했겠지만 불행히 이한은 먼저 선행학습을 위해 섬에 가있었다.
학생들은 기가 죽어서 시무룩해졌다.
어쩔 수 없지. 이번만 내가 기회를 주마. 자. 다들 일어서라. 그리고 호수로 걸어가라!
생각치도 못한 해골 교장의 너그러움에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물론 섬에 뭐가 준비되어 있는지 모르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이한이 언제나 했던 말이지만, 해골 교장이 친절할 때는 의심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해골 교장은 호숫가로 걸어가는 학생들을 보며 싱글벙글 기뻐했다.
애초에 신입생들이 자력으로 건너기 힘든 호수.
해골 교장 본인도 학생들이 과제를 해내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저 강의 시간에 다짜고짜 ‘지금부터 호수를 건너서 섬에 가라’라고 하면 의심하거나 도망치는 놈이 나올 수도 있으니, 그러지 못하도록 과제부터 시작했을 뿐.
깰 수 없는 과제를 준 다음 선심 쓰듯이 호수를 건너게 해주면 아무리 영리한 신입생들이라 하더라도 절대 의심할 수가 없었다.
해골 교장이 이 마법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세월이 얼마던가.
신입생들은 절대 해골 교장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잠깐. 워다나즈 가문의 새끼 드래곤은 어디 갔지?’
이한이 들으면 불쾌해 할 별명을 속으로 생각하며 해골 교장은 둥둥 뜬 머리를 360도 회전시켰다.
그래도 이한은 보이지 않았다.
해골 교장은 설마 먼저 호수를 건너갔나 싶었다.
워다나즈는 신입생이지만 절대 만만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 성격에 능력이라면 시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도착하는 순간 모래사장을 밟았을 테고, 모래사장을 밟았다면 지하 던전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 피했다 하더라도...
모래사장에 대기시켜 놓은 조르반 2세가 붙잡았을 터.
‘다른 이유가 생겨서 강의를 뺀 거라면 행운이고, 혹시 먼저 섬에 갔다면 불운이겠군.’
서로 다른 탑 학생들이 멱살 잡고 싸우기 위한, 아니, 친해지기 위한 시련인 만큼 서로 다른 탑 학생들이 함께 들어오지 않는다면 던전의 시련은 시작되지 않았다.
만약 주말에 호수를 건너갔다면?
그냥 지하에 계속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쩌저적!
해골 교장의 눈빛이 반짝이자 호수에 얼음으로 된 길이 생겨났다. 눈빛 하나로 두꺼운 얼음을 호수 위로 세우는 위업에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이렇게나 친절을 베풀어줬는데 설마 두려워서 물러서는 학생은 없겠지? 하물며 이 제국의 뛰어난 인재들만 모아 놓는 에인로가드에? 둘씩 짝을 지어서 출발해라.
“꼭 두 명이서 짝을 지어야 하나요?”
한 학생의 질문에 해골 교장은 친절하게 대답해줬다.
그러면 다 같이 올라가서 얼음 부수고 호수 밑에 있는 몬스터들 배나 채워주려무나.
“...둘이서 가겠습니다.”
여럿이서 보내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랬다가는 한두명쯤은 모래사장을 밟지 않고 도망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두 명씩 보내야 빠져나가는 학생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이 제국의 제일 가는 마법학교를 책임지는 해골 교장의 교육 철학이었다.
학생들은 두 명씩 얼음으로 만들어진 길을 지나 호수를 건넜다.
???
그러나 첫 학생들이 모래사장 위로 발을 디디자, 해골 교장은 예리한 본능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학생들이 모래사장 밑으로 가라앉질 않는 것이다.
해골 교장은 준비했던 강의가 엉망으로 굴러가자 지금 있지도 않은 영혼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픔을 느꼈다.
어째서?!
“네?!”
옆에 있던 학생들은 해골 교장의 비통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저런 비통한 목소리는 처음 들었던 것이다.
어째서! 조르반 2세, 내가 네게 이름을 주었는데 네가 감히 건방지게 게으름을...
소환수를 당장 앞에 불러내려던 해골 교장은 조르반 2세가 역소환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사라진 워다나즈의 소년, 말을 듣지 않는 모래사장, 역소환 된 조르반 2세.
이 모든 징조들이 말하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불가능을 모조리 제외하고 나면 남은 것은 아무리 믿기 힘들어도 진실이기 마련.
해골 교장은 근 몇백년 사이 이렇게 놀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워다나즈! 워다나즈 네 이놈!!
그 외침에 대답하듯이, 이한이 지치고 창백한 얼굴로 저 멀리 섬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