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상황을 이해한 요네르가 위로하듯이 이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령은 변덕스러운 짝사랑 상대 같아서 아무리 잘해줘도 그 마음을 얻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는 그냥 받아들여야 했다.
“요네르. 난 괜찮은데.”
“으응...”
“난 진짜 괜찮아.”
“그래그래.”
보통 앞에 ‘진짜’를 붙이면 거짓말일 때가 많았다. 요네르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닐리아는 물의 정령이 자신한테 달라붙자 당황스러워했다.
이한이 계약하고 싶어 한 상대인 만큼 받아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 저리 가! 저기 워다나즈랑 계약해!”
닐리아는 물의 정령을 밀어냈지만, 물의 정령은 끈덕지게 닐리아에게 달라붙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이한을 살짝 슬프게 만들었다.
‘나는 노망난 벼락 정령 밖에 안 찾아왔는데 말이지.’
하지만 슬프더라도 친구를 위해서라는 축하해줘야 할 때가 있는 법.
이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닐리아.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난 물의 정령과 계약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뭐? 진짜?”
닐리아는 놀라서 귀를 쫑긋거렸다.
“하지만 아까 계약하자고 하려고 했었잖아.”
“잘못 들었겠지.”
요네르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한에게는 여러 다양한 재주가 있었지만 그 중 절대 따라할 수 없는 재주가 바로 저 얼굴로 뻔뻔하게 거짓말하기였다.
숨도 쉬지 않고 진지하게 거짓말을 하면 방금까지 의심하던 상대도 ‘그... 그런가?’하고 흔들리는 것이다.
“닐리아. 나는 저 정령에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너 저번부터 정령과 계약하고 싶어했잖아. 그리고 물의 정령도 좋다고 했고.”
‘쓸데없는 기억력만 좋아가지고.’
이한은 닐리아를 욕했다.
과제할 때나 기억력이 좋을 것이지 왜 그런 사소한 것만 잘 기억한단 말인가.
“착각한 모양이군. 물론 내가 물의 정령과 계약하고 싶다고 말했었지. 하지만 그건 이름 있는 물의 정령 이야기였어. 닐리아.”
“아...!”
닐리아는 납득이 간다는 듯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쳤다. 확실히 워다나즈의 재능이라면 그래도 이상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물의 정령도 그런 거였냐면서 놀라워하며 손뼉을 쳤다.
이한은 정령을 한 대 치고 싶었다.
“알겠지? 그러니까 그 정령과 계약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 나는 상관하지 않으니까.”
“으음... 어떻게 할까...”
닐리아는 고민했다.
정령과 계약하는 걸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울 줄은 몰랐던 것이다.
“너희들이 보기에는 어떻게 생각해?”
닐리아의 질문에 이한과 요네르가 서로 쳐다보았다.
둘이 보기에는...
‘닐리아는 친구가 더 필요해.’
‘정령 친구라면 더더욱 좋겠지?’
둘은 의견 교환을 끝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정령이라면 좋을 것 같군.”
“나도 그렇게 생각해!”
“둘이 그렇게 말한다면...”
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정령이 기뻐서 통통 뛰었다.
* * *
주말을 섬에서 언데드 소환수와 보내고 나면, 볼라디 교수의 얼굴이 반갑게 느껴지는 게 가능했다.
이한은 볼라디 교수를 보고 반가워한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스톡홀름 신드롬 걸리면 약도 없다던데.’
“안녕하십...”
“저번에 번개 마법을 썼었지.”
“......”
볼라디 교수는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주말에 잘 쉬었냐고 안부를 묻지 않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예...”
이한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사실 각오하고 있었다.
가르시아 교수 앞에서 볼라디 교수를 만났을 때부터 슬픈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아, 이 교수가 번개 마법도 가르치겠구나.
그리고 이런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었다.
“번개 원소는 물 원소와 달리 마법사들 중에서 잘 다루는 사람이 적다.”
“그렇군요.”
“물 원소보다 다루는 게 어렵다.”
“예.”
“하지만 넌 저번에 번개 마법을 사용했으니 지금부터 내가 가르치는 것들을 해낼 수 있다.”
“......”
이한은 볼라디 교수한테 <기초 제국 언어와 논리> 좀 들어보라고 권하려다가 말았다.
‘무슨 놈의 논리가...’
“이야기를 들었다.”
볼라디 교수가 이한을 보며 말했다.
이한은 깜짝 놀랐다.
지금 볼라디 교수가 하라는 강의는 안 하고 학생들, 아니 학생과 일상의 잡담을 하려는 것일까?
사람이 안 하던 짓을 갑자기 하면 죽는다던데...
“고나달테스의 소환수, 조르반 2세를 쓰러뜨렸다고 하던데.”
“......”
해골 교장이 옆에 있었다면 기뻐했을 것이다.
이한을 열받게 만드는 데 성공한 셈이었으니.
이한은 해골 교장에게 분노했다.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해골 교장을 아침에 봤고, 지금은 점심 먹고 볼라디 교수의 강의실에 들어왔으니 그 짧은 사이에 정말 부지런하게도 말한 것이다.
대단하다 정말!
“예... 교수님께 배운 덕분에 쓰러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다.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낸 이유는 그것 때문이 아니다. 소환수에게 기습을 당해서 팔을 다쳤다고 들었는데.”
‘빌어먹을.’
이한은 해골 교장이 왜 말했는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전투에서는 언제나 그렇지. 하지만 당하고 나서 어떤 변명을 해도 적은 들어주지 않는다.”
볼라디 교수가 가장 얄미울 때는 반박할 수 없는, 맞는 말을 할 때였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한은 이제 ‘그게 뭡니까?’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지팡이를 들고 볼라디 교수의 미세한 동작 하나까지 집중했다.
볼라디 교수가 개수작을 부리는 순간 대응할 생각이었다.
교수는 그런 이한의 반응에 오히려 흡족해했다. 옅은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허공에 스파크가 튀더니 작은 번갯불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한을 조준했다.
이한은 물의 구슬을 날려서 먼저 막으려고 했지만 볼라디 교수는 똑같이 물의 구슬을 날려서 상쇄시켰다.
“!”
직접 피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날아오는 번갯불을 피하는 건 불가능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직선으로 쏘아져 나오는 번갯불은 다른 원소에 비해 훨씬 빠르긴 했지만 실제 낙뢰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궤도가 직선으로 단순했다.
알라르롱이나 잉걸델 교수 같은 검객들의 변화무쌍한 공격에 비하면, 직선으로 쏘아져 날아오는 번갯불은 꽤 빠르긴 했지만 예측 가능했던 것이다.
파직거리며 날아오기 직전에 보여주는 궤도를 먼저 예측한다!
이한은 능숙하게 고개를 젖혀 번갯불을 완전히 피해냈다.
쏘아져 나온 번갯불이 이한 옆을 뚫고 지나가 벽에 부딪혀 파지직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볼라디 교수는 바로 그거라는 듯이 살짝 끄덕였다.
“마법을 써서 막아내지 마라.”
“...그냥 피하라는 겁니까?”
“그래.”
교수는 이한이 반문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다음 공격을 날렸다. 번갯불의 개수가 늘었다.
이한은 피하면서도 스스로가 신기할 정도였다.
‘내가 이렇게 잘 피했나?’
마법학교에 와서 얼마나 지독하게 시달렸으면 이렇게 회피 능력이 늘었단 말인가.
몇 분을 공격해도 이한이 능숙하게 피해내자 볼라디 교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이 정도는 쉽게 하는군.”
‘...서투른 척을 했어야 했나?’
이한은 아차 싶었다. 교수가 뭔가 시켰을 때 바로 잘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볼라디 교수는 그런 속임수를 쓰기 힘든 상대였다.
속임수를 쓰려고 해도 진심으로 공격하는데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팍!
갑자기 강의실 안이 어두워졌다. 볼라디 교수의 눈동자만 보일 정도로 캄캄해졌다.
‘어두운 상황에서? 교수답군.’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
온갖 전투상황에 대비하는 걸 즐기는 볼라디 교수인 만큼, 어두운 상황에서 공격을 피하는 것도 당연히 시험하리라.
...그러나 이한은 아직 볼라디 교수를 얕보고 있었다.
탁-
“이게 뭡니까?”
볼라디 교수가 손수건을 던지자 이한은 의아해했다.
“눈을 가리도록.”
이한은 볼라디 교수에게 다가가서 눈을 가리려고 했다. 그러자 교수가 감정 하나 담겨 있지 않은 무감각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내 눈 말고.”
설마 싶었는데 정말 눈을 가려야 할 줄이야.
작은 반항에 실패한 이한은 경악했다.
“...교수님. 충분히 어두운데 눈을 꼭 가려야 합니까? 피하기 어렵지 않겠습니까?”
“넌 할 수 있다.”
볼라디 교수는 더 이상 대답해주지 않겠다는 듯이 손짓했다. 손수건이 스르륵 올라오더니 이한의 눈을 가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의 공간.
그리고 스파크 튀기는 소리가 났다. 번갯불이 생성된 것이다.
‘미치겠군.’
이한은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두렵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곳곳에 걸린 마법이나 마법사의 마력을 탐지하듯이, 이한은 주변에 위치한 번갯불을 탐지하기 위해 집중했다.
얼마나 잘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볼라디 교수는 팔짱을 끼고 이한을 쳐다보았다.
가르시아 교수가 인정했듯이(적어도 볼라디 교수는 그렇게 생각했다), 볼라디 교수는 자신의 교육방침에 흔들림 없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학생들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라 학생들의 문제다.
해골 교장이 괜히 볼라디 교수와 친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볼라디 교수의 확신은 이한을 만나서 더 견고해졌다.
‘원소 형태 변환, 원소 통제력 훈련의 기초가 확실하게 잡혔다.’
이한이 번개 마법을 쓰는 걸 봤을 때 볼라디 교수는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매우 기뻐했다.
번개 원소의 난이도는 원소 중에서도 최상위권.
그런 번개 원소를 사용한다면 원소 형태 변환과 통제력 훈련의 심화 과정을 손쉽게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바로 번개 마법을 시작...
...해야 하겠지만, 볼라디 교수가 원소 탐지 훈련을 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해골 교장의 증언이었다.
이한이 언데드 소환수를 상대하다가 팔을 다쳤다는 걸 듣자, 볼라디 교수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한이 그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물론 거기서는 ‘신입생이 왜 거대 언데드 소환수와 싸우지?’하는 의문을 가져야 했지만 볼라디 교수는 그런 부분은 깨닫지 못했다.
-만약 내가 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었다면?
저번에 이한이 물 원소 마법에 회전 속성까지 추가하려는 걸 막기 위해, 볼라디 교수는 처음으로 이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았었다.
이런 역지사지는 한 번 시작하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한의 입장에서 생각한 볼라디 교수는 곧 결론을 내렸다.
‘내가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이었다면, 지금 공격과 방어가 아닌 회피의 기술을 가장 배우고 싶을 것이다.’
이한에게 그냥 물어봤으면 됐겠지만 볼라디 교수는 굳이 그러지 않고 혼자서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마법전투에서 회피는 공격과 방어와는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더 고등하고 어려운 기술이었다.
회피의 핵심은 인지(認知).
적의 공격이 어디서 어떻게 날아오고, 어떤 속성과 구조를 가진 마법인지 즉시 파악할 수 있어야 원활한 회피가 가능했다.
-우자(愚者)는 막아내지만 현자(賢者)는 피한다.
이런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인지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까?
사실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훈련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꾸준히 마법을 접촉하고 파악하는 훈련을 하면 인지 능력이 향상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늘 볼라디 교수는 여기서 조종과 형태를 제외하고 탐지에만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팟!
볼라디 교수가 어둠 속에 나타난 번갯불들을 치워버렸다.
이한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지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인 것이다.
놀랍게도, 워다나즈 가문의 소년은 완벽하게 피해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 속에서!
이한은 볼 수 없었지만 볼라디 교수는 미소지었다.
예전에 ‘가르치는 일의 즐거움’에 대해 다른 마법사들에게 들었을 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좀 알 것 같았다.
가르치는 일은 정말 즐거웠다.
허공에 아까보다 훨씬 더 많은 번갯불들과 작은 불꽃들. 물 구슬과 압축된 바람 등 각종 원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한은 눈을 가린 상태에서도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다급하게 외쳤다.
“교수님? 교수님???”